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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 Nov 05. 2019

<3화. “우도에 살 거야!”>

독박육아 프로젝트 '아내에게 휴가를!'


2019-10-21, 월요일


독박 육아 프로젝트 셋째 날의 기록입니다.








새벽에 유민이가 기침을 많이 하다가 울면서 깼다. 보통 자다가 깨면 “엄마~” 하면서 우는데 잠결에도 엄마가 없는 걸 아는지 오늘은 “아빠~” 하면서 운다. 피곤하지만 별수 있나. 부르면 가야지.


따뜻한 물을 먹이고 토닥여주니 다시 잠들기는 하는데 어째 불안 불안하다. 역시 아내가 없으니 애들이 무의식 중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유민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대성통곡을 한다.


유민 : 엄마 보고 싶어~ 엉엉...


아빠 : 유민이가 엄마 보고 싶었구나~

아빠도 엄마 보고 싶어..

근데 우리가 잘 지내고 있으면 엄마 금방 올 거야~


은우 : 맞아~ 유민아 오늘 우도 갈 거잖아!

우도 대박 좋대!! 재밌겠지?


아빠 : 그래, 유민아 오늘도 재밌는 거 많이 하자^^ 알았지?

아침으로 어제 사온 빵 먹을까?


유민 : 유민이는 생크림 파스타 해줘! 엉엉...


엄마가 그리웠던 유민이는 아침부터 파스타가 먹고 싶다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유민이에게 파스타란 엄마를 떠올리게 하는 요리인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아내는 평소 파스타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 '파스타 장인'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당장 파스타를 해주기는 어려워서 유민이를 설득해서 어제 먹다 남은 미니핫도그랑 빵집에서 사 온 빵, 케이크에 망고까지 해서 든든히 아침을 차려먹었다.





이 정도면 나름 진수성찬이다.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데 은우가 망고를 먹다가 물어본다.


은우 : 아빠, 이거 망고 얼마라고 그랬지?


아빠 : 하나에 오천 원쯤 되겠네. 왜?


은우 : 그럼 내가 가진돈으로 몇 개 살 수 있어?

아빠, 나 돈 얼마 있지?

그거 내가 사고 싶은 거 살 수 있어?


아빠 : 아.. 아빠 엄마가 맡아둔 돈? (명절 때 친척들이 주신 용돈들)

그 돈은 나중에 은우가 대학 갈 때 보태려고 했는데?

다른 어른들이 은우한테 준 용돈은 아빠가 모아뒀다가 나중에 큰돈이 필요할 때 쓸 거야.

근데 은우가 초등학교 들어가서 아빠 엄마한테 받는 용돈이나 은우가 따로 일해서 번 돈은 은우가 마음대로 써도 돼.


은우 : 아빠, 나 대학교 안 갈 건데?

대학교 가면 아빠처럼 잠도 안 자고 공부만 해야 되잖아.

근데 대학교는 비싸?


아빠 : 응. 학교마다 다른데 보통 일 년에 천만 원도 넘어.

근데 대학교는 꼭 가야 되는 건 아니야.

자기가 필요하면 가는 거지.

아빠도 의사가 되고 싶어서 의사가 되는 대학교를 간 거지 누가 시켜서 간 게 아니야.


은우 : 근데 그럼 돈이 많이 들잖아.

아빠는 그때 돈이 많았어?


아빠 : 아니, 돈이 별로 없었지.

그래서 대학교 다니면서 일도 많이 했어.


유민 : 무슨 일?


아빠 : 중학생, 고등학생들 공부도 가르쳐주고.

학교에서 조교라고 해서 교수님 도와주는 일도 하고.


은우 : 그럼 대학교 가면 공부도 하고 일도 해야 되는 거네?

나는 안 갈래.


아빠 : 응. 그래..

근데 은우는 나중에 무슨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


은우 : 난 그냥 놀고먹고 살래.


아빠 : 놀고먹고 하려면 돈이 있어야 되잖아, 돈은 어떻게 벌건데?


은우 : 나도 모르겠어.


아빠 : 응.... 아빠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 ^^;;




뒹굴뒹굴





아침을 먹고 나서 체조를 하려고 하는데 둘 다 어째 기운이 없다. 요새 수면시간이 줄어든 데다가 낮잠도 안 자고 몸도 아프다 보니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다. 일단 만사 제쳐두고 좀 쉬기로 했다. 애들을 양옆 구리에 끼고 자는 방으로 가서 한 시간만 누워있자 하고 누워서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잠이라도 잠깐 잤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둘 다 잠은 자지 않았다. 그래도 좀 누워있으니 컨디션이 어느 정도는 회복된 거 같아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하루 열기를 시작했다.




아침 체조.





한참을 웃으면서 같이 뛰다 보니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땀 때문에 샤워를 다시 해야 했지만 그래도 신나게 춤을 췄더니 유민이의 얼굴에 다시 웃음꽃이 폈다.


체조를 마친 뒤 은우에게 집 정리를 부탁하고 청소기를 한번 돌렸다. 빨래를 개려고 보니 빨래들이 세탁기 안에 그대로 있었다. 어젯밤에 세탁기를 돌려놓은 상태로 널어놓는 걸 깜빡하고 잠들었나 보다. 세탁기를 열어보니 냄새가 약간 안 좋은 거 같아서 그냥 다시 세탁기를 돌렸다. 아내의 빈자리가 느껴진다.



세탁이 다되길 기다렸다가 건조기를 돌려놓고 나서야 오늘 할 일이 다 끝났다. 이제 바야흐로 오늘의 미션을 시작할 시간. 오늘의 ‘가고 싶었던 곳’은 우도, ‘먹고 싶었던 것’은 곰탕이다. 우도에서 1박을 할지 당일치기로 할지는 아직 결정을 못했는데 만약 1박을 하게 되면 곰탕은 당연히 생략하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각자 여벌 옷이랑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짐을 싸라고 했다.


혹시라도 안 챙겨가서 부족한 게 있으면 스스로 불편을 겪어보는 경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이 싸는 짐에 대해서는 일제 관여를 하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은우는 공기, 색종이, 색종이 접기 책 2권, 주사위, 큐브 등등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가방에 욱여넣고 있다. 터질 것 같은 가방에 정작 여벌 옷은 안보이길래 '여행 가면서 장난감 가지고 놀 시간이 어디 있겠니? 꼭 필요한 거부터 챙겨야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나도 아이패드에 게임기에 읽을 책까지 챙겨가고 있으니 누굴 탓하랴. (나중에 우도에 가서 가방을 확인해보니 은우는 여벌 옷을 세벌이나 챙겼는데 정작 속옷은 안 챙겼다.)




피난 가니?



짐을 싸놓고 보니 누가 보면 어디 피난이라도 가는 줄 알겠다. 여러 번에 걸쳐서 짐을 나눠지고 차에 실었다. 드디어 즐거운 마음으로 출발하는 모두의 표정이 오늘의 날씨처럼 밝았다.




날씨가 참 좋았다.



출발~!




가는 길에 동사무소에 들러서 선착장에 제출할 주민등록등본을 뽑았다. 등본을 들고 차에 타니 은우가 묻는다.


은우 : 아빠, 그거 뭐야?


아빠 : 주민등록등본이라고, 우리 가족이 누구누구 있는지 알려주는 종이야.


은우 : (등본을 들고 한참을 보더니) 엄마는 지금 우리랑 같이 없는데 왜 여기에 이름이 있어?


아빠 : 잉? 엄마는 우리 가족 아니야?

멀리 있어도 가족이잖아.


은우 : 아.. 맞네.. ^^;;



은우의 이상한 논리에 피식 웃으며 운전을 하는데 몸이 어째 으슬으슬한 게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아빠 : 은우야 거기 뒷자리에 간식 가방 있지? 한번 안에 봐볼래?


은우 : 응, 잠깐만.


아빠 : 그 안에 은우 약 챙겨 온 봉투 있는데 안에 타이레놀 빨간 박스 있어.

그거 좀 꺼내볼래?


은우 : 꺼냈어.


아빠 : 그거 뒤에 손톱으로 벗겨내면 약 하나 꺼낼 수 있거든?

아빠 하나만 꺼내 줘.

(라고 말하며 한 손을 뒤로 내밀었다.)


은우 : 잠깐만..

아빠, 이거 시간 좀 걸릴 거 같으니까 손 좀 앞으로 하고 있어.

내가 약 꺼내면 말해줄게.



은우는 내가 운전하면서 한 손을 뒤로 내밀고 있는 게 불안했나 보다. 한참을 낑낑거리더니 약을 꺼내 건네주는 은우. 나름 아이들이 못 열게 만든 안전포장인데 꼼꼼하게 껍질을 벗겨서 약을 꺼내는 모습을 보니 은우가 그래도 크긴 컸다는 생각이 들어 내심 대견했다. (하지만 아직 물을 같이 건네주는 센스는 없었다.)


아빠 : (손을 뒤로 내밀며) 은우야, 물도 줘야지~


은우 : 아빠~ 줄테니까 제발 손 좀 뒤로하지 마~


성격이 꼼꼼하고 걱정이 많은 은우는 자나 깨나 안전제일이다.




다시 한참을 달리는데 은우가 많이 지루했나 보다.


은우 : 아빠 몇 시간 남았어?


아빠 : 지니(내비게이션)는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한 시간 정도면 갈 거 같아.


은우 : 왜? 지니가 잘못 아는 거야?


아빠 : 아니, 지니는 안전속도 다 지키고 가는걸 기준으로 계산하거든.

도로에 차가 별로 없을 때 조금 속도 내면 한 시간이면 가.


유민 : 아빠, 근데 너무 빨리 가면 안 돼.


아빠 : 당연하지. 아빠만큼 안전 운전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은우 : 맞아. 아빠가 안전운전은 최고지!

아빠 운전 엄청 잘해!



갑자기 안전운전에 꽂힌 은우는 하루 종일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좁은 길에서 마주오는 차와 교차할 때, 갑자기 튀어나오는 개를 보고 속도를 줄일 때, 나중에는 빨간불에 정지만 해도 뒤에서 은우가 “아빠는 역시 안전운전 최고야!”를 남발했다. '그래.. 안전하게 갈게.. 은우야..'





멀리 보이는 성산일출봉.





안전운전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아빠 : 얘들아, 아빠가 엄마랑 결혼하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

결혼하기 전에 엄마의 부모님을 만나고 인사를 했거든.

엄마의 부모님이 누구지?


은우 :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 : 응, 맞아.

그때 저녁을 같이 먹고 아빠 차로 집에 모셔다 드렸어.

근데 그때 할아버지가 아빠가 운전을 참 안전하고 편하게 잘한다고 칭찬했거든.

사람은 원래 운전할 때 자기 진짜 모습이 나온다고 해.

할아버지가 아빠를 보면서 ‘음.. 이 정도면 내 딸을 맡겨도 되겠군.’ 이렇게 생각했나 봐.

그래서 엄마랑 결혼할 수 있었던 거지.


은우 : 왜?


아빠 : 왜가 아니고.. ^^;;

만약 아빠가 운전을 막 난폭하게 했으면 어떻게 됐겠어.


은우 : 할아버지가 화냈겠지.


아빠 : 그리고 결혼을 허락하지도 않았겠지?

그럼 엄마랑 결혼도 못했을 거고 은우랑 유민이도 태어나지 못했겠지?


은우 : 그러네..


아빠 : 그니깐 아빠가 안전운전 한 덕분에 너희들이 태어난 거야. 알았지?


은우 : 아, 그런 게 어딨어~

이상한 말 좀 하지 좀 마~


유민 : 아빠 고마워 ^^


농담을 다큐로 듣는 은우와 그 와중에 고맙다고 말하는 유민이. 차를 타고 가는 시간이 길었지만 그만큼 아이들과 대화할 시간이 많아 즐거웠다.



아빠 : 아빠가 사진 보니깐 우도에 파는 아이스크림이 엄청 크던데.

니들 혼자서 다 못 먹을 수 도 있어.

근데 그래도 하나씩은 사줄게.

대신 아빠도 조금씩 나눠줘.


은우 : 응. 나 먹다가 못 먹겠으면 남겨줄게.


아빠 : 야~ 그건 아빠한테 버리는 거잖아~

아빠가 음식물 쓰레기 통이냐! ^^;;


유민 : 음식물 처리를 시작합니다!

(우리 집 음식물 처리기 성대모사 중.)


은우 : 하하하 ^^



또 한참을 달리다가 갑자기 은우가 묻는다.


은우 : 아빠, 등화산이라는 산이 있어?


아빠 : 응? 무슨 산? 무등산은 있어.


은우 : 아니 등화산.


아빠 : 아빠는 못 들어 본거 같은데.. 왜?


은우 : 저기 트럭에 쓰여있잖아.


옆으로 삼다수 트럭이 지나가는데 컨테이너에 ‘1등 화산암반수 삼다수’라고 적혀 있다. '1등 화산암반수'를 1'등화산'암반수로 읽은 모양이다. 순간 웃음이 빵 터졌다.


아빠 : 은우야. 크크크..

등화산이 아니고... 크크크..

1등 화산암반수라고.. 하하하.


은우 : 화산암반수가 뭐야?


아빠 : 아.. 웃겨라.. 크크..

흠흠.. 화산으로 생긴 돌에 빗물이 걸러지면 땅속에 깨끗한 물이 모이거든 그걸 화산암반수라고 해.

땅을 파서 그걸 뽑아서 만든 게 삼다수야.


은우 : 삼다수가 진짜 일등이야? 어떻게?


아빠 : 그렇다고 하네. 근데 저거는 광고니깐 1등이라고 해야 사람들이 많이 사지 않겠어?

‘꼴등 화산암반수 삼다수!’ 이러면 아무도 안 살 거 같은데..


은우 : 맞아. 크크크..


유민 : 꼴등!! 웃기다!! 크크크..




또 한참을 가는데 은우가 집에 도둑이 들면 어쩌냐고 물어본다.


아빠 : 괜찮아. 집에 가져갈 것도 없어.


은우 : 아니, 막 책이랑 식탁이랑 그런 거 가져가면 어떡해.


아빠 : 그런 걸 왜 가져가.. ^^;;

혹시 가져가면 신고해서 잡아서 찾아오면 되지.

집에 CCTV도 있잖아.


은우 : 근데 도둑이 다른 나라로 도망가면 어떡해?


아빠 : 도망 못 가.

외국 갈 때 공항에서 다 검사하잖아.


은우 : 아, 그 경찰이 막 뭐 물어보고 그런 거?

그게 도둑인지 확인하는 거야?


아빠 : 비슷해.


은우 : 그런데 작은 나무배를 타고 몰래 바다로 가면 어떡해.


아빠 : 다른 나라의 바다를 허락 없이 침범하면 그 나라를 지키는 군인 아저씨가 못 들어오게 막아.


은우 : 근데 다른 나라로 안 가고 아무도 안 사는 작은 섬으로 도망가면?


아빠 : 그런 섬에서 어떻게 살아...


은우 : 혼자서 농사짓고 사냥하고 살 수도 있지.


아빠 :.......


책이랑 식탁을 훔쳐다가 무인도에 정착해서 혼자 사는 도둑의 모습을 상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은우는 한 번씩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가정해 끝도 없는 질문을 쏟아낸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질문에 끝까지 성의 있게 대답을 해주는 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재미가 있지만 황당한 질문이 이어지면 지치고 한 번씩 짜증이 날 때도 있다.


하지만 사실 은우는 재미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다. 집을 비워두면서 오는 불안한 마음을 무의식 중에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으로 표현하는 것 일수도 있다. 따라서 질문에 계속 대답해주기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라고 안심을 시켜주는 것이 좋을 때도 많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질문에 휩쓸려 간다는 것이다.


아빠 : (아.. 맞다...)

은우야, 근데 사실 은우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도둑이 들지 않게 아빠가 여러 장치를 많이 해놨고 경찰 아저씨도 항상 우리를 지켜줘.

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빠가 은우랑 유민이를 안전하게 항상 지켜줄 거야.


은우 : 응...


(이후 은우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도착!




제주도에서 흔하지 않은 나름의 장거리 운전에 유민이는 도착하기 30분 전부터 잠이 들었다. 덕분에 은우랑 둘이서 신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성산항에 도착하였다. 우도는 제주도에서 나름 핫 플레이스라 일부러 일정을 월요일로 잡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표를 사서 차를 선적하려고 기다리는데 배에 타는 인파가 장난 아니다. 일단 우도에 가서 천천히 돌아보며 숙소를 찾아보기로 했는데 왠지 초조해져서 차 안에서 민박집을 검색해서 전화로 예약했다.


선적하는 차량도 적지가 않아서 한참을 기다려 배를 한대를 더 보낸 뒤에야 차를 선적할 수 있었다. 후진으로 배에 들어가는데 안전제일 은우는 걱정이 많이 되었나 보다.


은우 : 아빠, 바다로 빠지면 안 돼~ 알았지? 응?


신신당부를 하는 은우의 걱정 속에 무사히 차량 선적을 마쳤다. 등 뒤에서 들리는 은우의 한마디.


은우 : 역시! 아빠가 안전운전 최고라니깐!




차를 세워두고 갑판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난간에 붙어서 바닷바람을 맞는 유민이.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유민이를 쫓아다니는 은우.


은우 : 유민아, 그쪽으로 가면 위험해! 너무 가까이 가지 마!

아빠, 핸드폰 꺼내지 마! 바다에 떨어지면 어떡해!


은우의 이런 안전에 지나치게 예민한 모습은 나와 너무도 닮았다. 성격도 유전이 되는 건지 아니면 나를 보고 배운 건지는 모르겠다. 반면 유민이는 소심한 듯하면서도 한 번씩 예상 못할 대범함을 보여주는 구석이 있어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계속 불안해하는 은우의 주의를 환기시킬 겸 점점 멀어지는 제주도와 반대쪽에 보이는 우도를 보여줬다.



우도가는 배.





갈매기.




갑판에서 사람들이 새우깡을 던지니 갈매기들이 모여들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갈매기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바다 유람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우도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엄청 가까웠다. 우도 천진항에 도착해서 배에서 차를 내리니 경치에 감탄이 절로 난다. 뒷자리에서도 난리가 났다.


유민 : 예이~! 드디어 우도에 도착했다!

아빠! 우도는 엄청 멋지고 좋은 나라야!

막 알록달록 하고 엄청 이뻐!


은우 : 아빠, 나 나중에 어른 돼서 아빠 엄마랑 헤어져서 혼자 살게 되면 우도에 집 짓고 살 거야!


아빠 : 응, 우도 진짜 너무 좋다.

진짜 여행 온 거 같은 기분이야!




섬속의 섬 우도.




먼저 예약해 두었던 민박집으로 향했다. 넓은 뒷마당이 있는 가정집을 개조한 민박집인데 주인아저씨가 친절하고 조식으로 나오는 전복죽이 맛있다는 평이 있는 집이다. 민박집에 도착하니 갓난아이를 안고 사장님이 나오셨는데 생각보다 젊은 분이셨다. 역시나 인상도 좋아 보이고 친절하셨다. 방을 안내받고 짐을 풀고 나니 어느덧 점심을 먹을 시간. 아이들이 짜장면이 먹고 싶다고 그래서 사장님께 추천을 받았는데 근처에 짜장면 집들은 비싸도 맛도 없다며 동네 안쪽의 가게를 추천해주셨다. 배달시켜 먹으라고 하셨는데 검색해보니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라 산책할 겸 가서 먹기로 했다.




전원민박




동네길을 따라서 걸어가는데 경치도 좋고 날씨도 좋고 모든 게 완벽했다. 사실 우도에 전기자전거랑 소형 삼륜차가 너무 많이 다녀서 안전에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었는데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교육을 잘 받은 덕에 큰 안전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다른 문제가 있었다. 은우와 유민이는 차가 오면 “담쟁이!”하고 벽으로 붙는데 문제는 삼륜차가 너무 많이 다녀서 ‘담쟁이’때문에 15분이면 갈 거리를 30분이 넘게 걸었다는 것. 은우랑 유민이가 둘 다 배고프고 지쳐 갈 때쯤 겨우겨우 식당에 도착했다.





한참 걸어서 겨우 도착.





도착한 곳은 ED중식이라는 중국집 이름 치고는 다소 생소한 가게였다. 자리를 잡고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식당 안의 TV에서는 ‘세상에 이런 일이’가 나오고 있었는데 평소 미디어 노출이 적던 은우랑 유민이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TV에서 눈을 떼지를 못했다.



탕수육과 짜장면이 나왔는데도 먹는 둥 마는 둥 TV 삼매경인 둘. 먹으면서 보라고 아무리 말해도 TV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빠 : 은우야, 유민아. 잠깐 아빠 좀 봐봐.

여기 아빠 눈 좀 봐봐~

아빠가 할 말 있는데 말 끝날 때까지 아빠 눈 보고 들어주면 좋겠어.


뭔가 심상치 않은 말투를 감지하고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은우. 그리고 내 눈과 TV 사이를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는 유민이의 시선.


아빠 : 응. 그래. 고마워.

아빠도 TV가 재밌는 거 알아.

너희는 평소에 못 보니깐 더 재미있을 거 같아.

근데 우리가 바라던 우도에 왔고, 아까 열심히 걸어서 식당에 왔잖아.

그리고 너희들이 먹고 싶어 했던 짜장면이 나왔어.

평소 같았으면 신나서 맛있게 먹고 서로 얼굴 보면서 이야기도 하고 그랬을 텐데 TV 하나 때문에 우리가 많은걸 놓치는 거 같아서 아빠는 섭섭해.



은우는 알았다며 먹긴 먹지만 여전히 TV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유민이는 애초에 내 말을 듣지도 않고 있었었다. 섭섭하긴 하지만 사실 애들은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tv가 보이는 자리에 앉은 내 탓이지. 그냥 빨리 먹고 나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애들 덜어주고 남은 짜장면을 먹어보니 짜장면이 많이 매웠다. 소스에 후추를 뿌렸는지 어른이 먹어도 매콤할 정도였다. 짜장면이 매울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결국 짜장면은 많이 남기고 공깃밥을 시켜서 탕수육을 반찬삼아 애들을 먹였다.




밥먹고 보라고..ㅜㅜ




밥을 먹고 나와서 숙소로 걸어가는 길. 식당으로 갈 때만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놨다.


아빠 : 아빠가 근데 지금 기분이 별로야.

왜 그런지 생각해보니까 아까 TV 때문에 속상한 것도 있고 음식을 많이 남긴 것도 마음이 안 좋고 그러네.

아까 식당 갈 때는 우리 모두 기분이 좋았잖아.

맛있는 걸 먹고 배부르면 기분이 더 좋아야 되는데 오히려 아까보다 안 좋은 거 같네.


은우, 유민 :........


셋이서 말없이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아이들도 내가 시무룩해 있으니 같이 텐션이 떨어진 듯 말이 없어졌다. 한참을 걷다가 불현듯 이대로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 잠깐 스톱! 멈춰봐 얘들아.

우리 그냥 이렇게 가지 말고 좀 풀고 가자.

잠깐만 서로 안아주자.


걷다 말고 길 한복판에 쭈그려 앉아서 아이들과 부둥켜안았다.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서운한 마음도 눈 녹듯 사라졌다.


아빠 : 우리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이지?

이렇게 안아주니 기분이 참 좋네.

아빠는 너희들 덕분에 기분이 다시 좋아졌어.


유민 : 유민이도!


은우 : 나도.


아빠 : 예이~! 그럼 가자!


다시 텐션을 올려서 숙소로 돌아왔다. 잠시 쉬었다가 차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갔다. 땅콩 아이스크림을 파는 데는 많지만 그래도 원조인 지미스가 제일 맛있다 길래 그쪽으로 향했다.




잠깐 쉬는 사이에도 부지런히 논다.




아이스크림 가게는 절벽으로 된 바닷가에 있었는데 경치가 참 좋았다. 마치 호주의 ‘로크 아드 고지’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경치였다. 아이스크림 가게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사장님께서 참 위트 있는 분이셔서 손님 한 분 한 분과 많은 대화를 나누셨다. 우리 차례가 되어서 사장님이 아이들에게 장난도 치고 이런저런 질문도 많이 하셨는데 둘 다 숫기가 없어서 내 뒤에 숨기 바빴다. 사장님의 농담에 별다른 리액션은 없었지만 고맙게도 서비스까지 챙겨주셔서 경치를 벗 삼아 맛있게 먹었다.  




경치도 아이스크림 맛도 예술이었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바다에 들렀다가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불현듯 말타기 체험을 하기로 했던 게 생각났다.


아빠 : 아 맞다! 말타기!

우리 말타기 해야지!!


유민 : 아 맞다. 얼른 가자!


은우 : 나는 바다에 먼저 갈래.

바다 가고 싶어.


아빠 : 바다는 말타기 하고 가도 괜찮아.

해수욕장은 제한시간이 없는데 말 타는 건 5시까지 밖에 안 한대.


은우 : 그래? 그럼 얼른 가자.


사실 은우가 말 타는 게 무서워서 바다에 먼저 가자고 하는 줄 알았는데 내 설명을 듣더니 자기도 얼른 말 타고 싶다며 얼른 가자고 한다. 우리 셋 중 말 타는 게 무서운 사람은 나 밖에 없었나 보다. ^^;;


인터넷을 찾아보니 앨리샤 승마장이 좋다는 리뷰가 많아 내비게이션을 찍고 갔더니 생뚱맞은 해변에 도착했다. 아마도 승마장이 이사를 갔는데 내비게이션이 업데이트가 안된 것 같다. 마침 내린 곳이 경치가 좋아 겸사겸사 잠시 구경을 좀 하다가 출발했다.




경치가 참 좋다.




우도의 경치.




다시 주소를 검색해서 찾아간 승마장은 우도봉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승마장에는 사람 좋게 생긴 사장님과 카리스마 넘치는 보조 기수분이 계셨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다른 사람들이 타는걸 좀 봤는데 사장님은 간간히 말을 뛰게도 하고 농담도 던지면서 재밌는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보조 기수분은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어서 약간이라도 위험한 행동이 보이면 어른이건 아이건 가차 없었다.




값진 경험이었다.



내심 사장님이랑 같이 탔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보조기 수분이랑 같이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은우는 혼자 타고 나는 유민이와 같이 탔다. 말은 처음 타봤는데 생각보다 높이가 높고 안장이 불안정한 느낌이 들어서 긴장이 되었다. 내 앞에 앉은 유민이도 내심 긴장한 것 같았는데 옆을 돌아보니 거기에는 한술 더 떠서 잔뜩 얼어있는 은우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혼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이런 소심한 가족 같으니라고.


안전을 재차 확인하고 드디어 출발. 우도봉의 경치 좋은 스폿들을 따라서 말을 타고 산책을 하는데 기분이 정말 끝내줬다. 중간에 경치 좋은 곳에서 셀카를 찍고 있는데 안쓰러워 보였는지 기수분이 핸드폰 좀 줘보라고 하시더니 사진을 찍어주셨다.  




말위에서 바라보는 절경.




아이들은 말을 타는 내내 감탄사 외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은우는 약간 무서워하는 것 같았고 유민이는 그냥 아무 생각 없어 보였다. 나는 처음 경험하는 말타기가 생각보다 재밌고 스릴이 있어서 매우 만족했다. 사실 가격이 싼 편이 아니어서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정말 잘 온 것 같다. 다만 나랑 유민이가 같이 탄 하얀 말이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건 내 기분 탓일까. (이름 모를 하얀 말아, 무거워서 미안해.)


꿈같았던 산책을 마치고 말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아이들은 뭔가 평소와는 다른 벅찬 감동 같은 게 있었는지 서로 껴안고 난리가 났다. 바닷가로 향하는 차 안 뒷자리에선 안전벨트를 고삐 삼아서 말을 타는 말타기 놀이가 이어졌다.




감동받은 (?) 아이들.




다음 목적지는 유명한 산호해수욕장. 모래가 산호로 이루어진 모래라서 참 이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르면 잘 떨어진다!! 수심만 깊지 않았다면 아이들과 다닐만한 최고의 해수욕장이 아닐까 한다.





산호 해수욕장.




애들은 바다를 참 좋아한다. 은우는 파도가 닿는 해변가에 철퍼덕 앉아서는 한참을 혼자 모래성을 쌓으며 놀았다. 유민이는 파도가 안 닿는 곳에 멀찌감치 앉아서 사색에 잠겨있었다. 은우랑 같이 손잡고 발을 담그며 놀다가 잠깐 쉴 겸 유민이 옆에 앉았다.


유민 : 아빠, 아까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면서 유민이 한테 막 말했어.


아빠 : 뭐라고 말했어?


유민 : 바다 재밌어? 막 이렇게 물어봐서 유민이가 “응” 하고 말했어.


아빠 : 잘했네~

근데 우도 진짜 좋다. 완전 외국 같아.


유민 : 유민이는 나중에 엄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되면 유민이는 우도로 이사 와서 살 거야.


(나중에는 애들 만나려면 우도에 가야 되겠네. ^^;;)




평화로운 해변.




시간대가 슬슬 마지막 배가 출발할 시간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서 사람이 없는 한가로운 해변을 거의 독점할 수 있었다. 실컷 놀다가 모래를 대충 털고 숙소로 돌아왔다. 은우가 옷이 다 젖어서 일단 씻기고 옷도 갈아입고 다시 나왔다. (속옷을 안 챙겨 와서 노팬티로 나온 은우 ^^;;) 우도를 차 타고 한 바퀴 돌면서 구경도 하고 밥도 먹고 오기로 했다.


5시 반 마지막 배가 떠나고 난 뒤라 우도 전체가 조용했다. 전기자전거랑 삼륜차가 안보이니 세상 편하다. 해안도로를 따라서 드라이브를 하다가 하얀색 등대가 보였다. 잠깐 구경하고 가보자고 해서 내렸는데 이미 해가 진 뒤이고 바람까지 강해서 오래 있기는 어려웠다.





등대와 봉화대.





밤의 우도는 낮과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섬 전체가 어둡고 조용했지만 을씨년스럽기보다는 여유로운 느낌이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구경하면서 섬을 돌아보니 한 시간 가량 걸린 것 같다. 저녁을 먹어야 되는데 문제는 문을 연 식당이 없었다.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도 분명 있을 텐데.. 7시가 넘어가니 은우랑 유민이는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다. 오후 간식도 안 먹었으니 많이 배고프긴 할 것이다. 섬을 한 바퀴 다 돌고 숙소 근처까지 와서야 문연 횟집을 발견했다. 은우한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보니 그냥 쌀밥이 먹고 싶다고 한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다.




해물라면과 조기구이




조기구이랑 해물라면을 시켰다. 은우는 배가 많이 고팠는지 내가 생선살을 발라주는걸 못 기다리고 혼자서 막 발라먹었다. 이번 휴가에 많은 것을 체득하는 은우다. 은우는 평소보다 많이 먹어서 밥도 한 공기 반이나 먹은 반면 유민이는 피곤해서 그런지 식당에서도 계속 누워있으려고 하고 통 먹지를 않았다. 밥을 물에 말아서 생선을 올려 겨우 반 공기를 먹이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서 애들을 씻기고 나도 씻었다. 칫솔과 치약은 챙겨 왔는데 로션을 안 챙겨 왔다. (또다시 느껴지는 아내의 빈자리..) 그래도 씻고 이불을 펴고 누우니 세상 편하다. 낮에 아이들과 약속해둔 게 있어서 자기 전에 TV를 30분 정도 보여주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굿 나이트




30분 뒤 TV를 끄려고 하니 더 보겠다고 투정 부릴 줄 알았던 둘 다 순순히 자겠다고 드러누웠다. 정말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피곤하긴 많이 피곤했나 보다. 둘 다 누운 지 10분도 안돼서 잠들었다. 은우는 코까지 골면서 잤고 유민이도 아침까지 한 번도 안 깨고 잘 잤다!! 둘 다 우도가 잘 맞는 것 같다.


"너희들 진짜 나중에 우도 살아라ㅎㅎ"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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