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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 Nov 12. 2019

<5화. “하귀 영화관”>

독박육아 프로젝트 '아내에게 휴가를!'


2019-10-23, 수요일


독박 육아 프로젝트 다섯째 날의 기록입니다.







난생처음 캠핑카에서 잠을 자본 우리 가족. 캠핑카는 생각보다 아늑하고 온도도 적당해서 별문제 없이 밤새 잘 잤다. 


어젯밤 유민이는 영화를 보고 나서 일찍 잠이 들었다. 은우는 잠이 안 온다며 영화를 더 보고 싶다고 했다. 영화를 틀어주고 옆에 누웠는데 깜빡 내가 먼저 잠들어버렸다. 나도 많이 피곤하긴 했었나 보다. 한참을 세상모르고 자다가 깨보니 은우가 계속 영화를 보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가 가까운 시간. 깜짝 놀라서 얼른 영화를 끄고 은우를 재웠다. 은우는 정말 정도라는 걸 모른다. 그냥 뒀으면 밤이 새도록 봤겠지.




아침이 돼서 해가 뜨자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와 자연스럽게 깰 수 있었다. 유민이는 배가 고팠는지 일어나자마자 어제 먹다 남긴 빼빼로와 마른오징어를 아침으로 먹었다. 정작 아침으로 먹으려고 가져온 자두는 찬밥신세. 애들이 먹겠다고 해서 산 건데 결국 다 내 뱃속으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마른 오징어를 뜯는 유민이.





은우는 늦게 자서 컨디션이 매우 안 좋았다. 표정을 보니 건드리면 언제든지 폭발할 것 같은 상태다. 캠핑카를 정리하고 애들을 차에 태웠는데 어제 사놓은 아이스크림을 달라며 은우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아빠 : 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몸 좀 따뜻하게 한 다음에 먹자 은우야.


은우 : 왜 아빠 마음대로만 해?

어제는 오늘 집에 갈 때 차에서 먹자고 했잖아.



어제 집에 가는 길에 먹기로 한건 사실이라 할 말이 없다. 약속은 약속이니 아이스박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줬다. 오늘은 쉽지 않은 하루가 될 것 같다. 





은우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예민함.





집에 와서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서 애들을 씻겼다. 따뜻한 욕조에 느긋하게 앉아서 빠삐코를 빨아먹는 녀석들. 나도 몸이 찌뿌둥해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 집 청소를 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오늘따라 많이 피곤하다. 오늘은 영화관에 갔다가 태백산 숯불갈비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한 날이다. 야외활동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좀 쉬다가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러 가면 되겠다 생각을 했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개봉작을 찾아보려고 영화관을 검색하는데 상영 중인 아동용 영화가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평일에는 아동영화가 수요가 없어서 상영을 안 하는 것 같다. 일단 애들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니 그럼 공룡랜드라도 가자고 한다. 일단 좀 쉬다가 점심을 먹고 상황을 보면서 결정하기로 했다. 마침 어린이집 행사 때문에도 일정의 변경이 필요했다.


아빠 : 어제 새봄(어린이집 은우 담임교사)한테서 연락이 왔었잖아. 

지금 어린이집에서 프로젝트하는 거 은우만 참여를 못하니깐 하루는 갔다 오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은우 : 안 가고 아빠랑 있을래.


아빠 : 아빠도 당연히 은우가 안 가고 아빠랑 있으면 좋겠는데, 내일 개원 잔치 포스터 붙이고 다니고 몸짓 연습도 한다고 새봄 이가 왔으면 좋겠대.


은우 : 그럼 나만가?


아빠 : 아니, 유민이도 가야지.


유민 : 유민이는 갈 거야!

산이랑 하연이랑 유민이 보고 싶대!


(텔레파시 능력이 생긴 유민이. ^^;;)


아빠 : 그래. 그럼 내일은 둘 다 어린이집 가는 거다?

내일 가기로 했던 한라산은 금요일에 가자.


은우 : 응. 알았어.



잘됐다. 내일은 좀 쉬면서 밀린 책도 보고 운동도 하고 집안일도 할 수 있겠다. 어린이집이 이렇게 소중한 존재였구나. 그런데 생각해보니 금요일은 승은이네 저녁 마실 가는 날이다. 은우는 올해 졸업반이라 이번이 마지막 마실일 텐데.. 어찌해야 되나 고민이 된다. (주 : '마실'은 공동육아 어린이집 특유의 문화로 반 친구들과 그 가족을 집에 초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빠 : 은우야, 근데 금요일은 한라산 말고 승은이네 마실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제 은우 졸업하면 친구들 보기도 어려울 텐데..


은우 : 그럼 한라산은?


아빠 : 한라산은 언제든지 갈 수 있잖아. 

나중에 엄마랑 데이트할 때 가도 좋고.

어차피 유민이랑 같이 가면 은우가 가고 싶은 만큼 올라가기도 어려울걸.


(사실 아빠랑 유민이는 한라산에 별로 가고 싶지 않아... ^^;;)


유민 : 응. 유민이는 많이 걸으면 힘들어.


은우 : 알았어.



의외로 쿨하게 알았다고 말하는 은우. 덕분에 남은 일정은 좀 수월할 것 같다. 내일은 어린이집에 등원을 해야 하기에 애들 낮잠용 이불을 세탁기에 돌렸다. 세탁이 끝나고 이불을 널어놓으려고 건조대를 보니 어제 은우가 널어놓은 옷들이 보인다. 어제 은우한테 부탁해놓고 확인은 안 했는데 은우는 옷들을 말 그대로 그냥 ‘널어놨다’. 뭉쳐서 꾸깃꾸깃한 빨래들을 바라보며 한참을 웃었다.




탁탁 털어서 널어달라고 할 걸...




빨래를 마치고 커피를 한잔 내려서 거실에 앉아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은우는 여전히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로 졸리고 피곤한지 소파에 얼굴을 묻고 짜증을 내고 있다. 특별한 날 가끔 일탈을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다음날의 아이들 컨디션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너무 기분을 냈나 보다. 애들 밥시간, 잠시간은 잘 지켜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어젯밤에 은우가 영화를 더 보여달라고 할 때 은우랑 약속한 게 있었다. 원래 나는 애들을 재우고 태블릿으로 일기를 쓰려고 했기에 은우가 영화를 보는데 태블릿을 사용하면 나는 일기를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은우가 영화를 더 보는 대신 다음날(오늘) 오전에 일기를 쓸 시간을 주기로 약속을 한 것이다. 


은우는 약속해둔 게 있어서 나를 방해하지는 못하고 혼자 놀아보려고 노력은 하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영 힘든 것 같다. 예전에 은우랑 같이 만든 땅따먹기 게임을 혼자 하려고 거실로 가져온 은우. 게임을 하지는 않고 앉아서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괜히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은우 : 아빠, 이거 어떻게 시작하는 거지?


아빠 : 어? 그거 기지에는 바둑돌 3개 놓고 나머지 땅에는 하나씩 놓고 시작하면 돼.


은우 : 아니~ 그게 아니고!! ㅡ.ㅡ+


아빠 : 응? 시작할 때 어떻게 준비하는지 물어본 거 아니야?


은우 : 응. 맞아.


아빠 : 그래서 아빠가 설명해준 거잖아.


은우 : 근데 그렇게 안 했었잖아.


아빠 : 아니야, 은우야 지난번에 그렇게 했었어.

근데 그게 딱 정해진 게 아니고 우리가 그냥 만든 거잖아.

그래서 은우가 다르게 하고 싶으면 바꿔서 해도 괜찮아.


은우 : 아니 그게 아니고~!! ㅜ.ㅜ


갑자기 방에 들어가서 울음을 터뜨리는 은우. 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따라 들어갔다. 


아빠 : 은우야, 아빠가 볼 때는 은우가 아빠랑 같이 게임하고 싶은데

어제 약속한 게 있어서 게임하자고 말도 못 하고 

아빠는 그 마음도 몰라주는 것 같고 그래서 속상한 거 같은데 아빠 말이 맞니?


은우 : 아니야.


아빠 : 그래? 아빠는 그런 줄 알았어.

은우야 근데 지금 은우가 엄청 졸리고 피곤한 거 같아.

사람은 원래 몸상태가 안 좋으면 마음의 그릇이 작아져서 화가 잘나거든.


은우 : 나 화 안 났거든. ㅡ.ㅡ+


아빠 : 그렇구나. 아빠는 은우가 화난 것처럼 보여서 하는 말이야.

근데 은우가 지금 피곤한 건 은우가 어제 늦게 자서 그런 거야.

아빠가 적당한 때에 끊고 재웠어야 되는데 아빠도 캠핑 때문에 들떠서 그렇게 됐어. 미안해.

그래도 늦게 자면 어떻게 되는지 알았으니 하나는 배웠잖아, 좋게 생각하자.


은우 : 그게 뭐가 좋은데! ㅡ.ㅡ+


아빠 : 은우가 지금 화가 많이 나서 아빠랑 말하고 싶지 않아?


은우 : 화 안 났다고!


아빠 : 음.. 그럼 일단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다시 이야기하자.

아빠가 옆에서 재워줄 테니깐 30분 만이라도 자자.



여전히 틱틱 거리지만 막상 안아주고 등을 쓸어주니 이내 몸을 맡기는 은우다. 옆에 누워서 재워주니 몇 분 지나지 않아 숨소리가 곧 잠들 것 같다. 그리고 은우가 막 잠드려는 찰나에 어김없이 문을 열고 등장하는 유민이.


유민 : 아빠! 유민이 동화 듣고 싶어!


아빠 : 어.. 오빠 지금 좀 자야 되는데..

조금만 있다가 들을까? 금방 재우고 나갈게.


은우 :..... 나도 들을래.



망했다. 아이들은 항상 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결국 방에 불을 끄고 누워서 눈감고 동화를 듣는 걸로 합의를 봤다. 잠은 안 자더라도 눈감고 누워있으면 조금이라도 회복되겠지 뭐. 그러고 있다가 잠들면 더 좋고.



애들을 방에 두고 부엌으로 향했다. 어느새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 준비를 해야 한다. 누가 차려주는 밥을 먹을 때는 몰랐는데 밥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밥 먹고 치우고 돌아서면 또 밥 차려야 할 시간이 오는 것 같다. 매 끼니를 유기농 재료로 정성을 다해 요리하는 아내에게 다시 한번 존경심이 들었다. 그리고 평소 밥시간이 늦어지면 아내에게 예민하게 굴었던 나의 행동을 반성하게 되었다. 



오늘의 점심 메뉴는 파스타. 어제 캠핑장에서 구워 먹다가 남은 목살이 있어서 양파랑 마늘 썰어놓고 토마토소스로 해서 파스타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냉장고에서 고기를 썰고 있는데 방에서 또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은우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정말 쉽지가 않다. 한참을 싸우던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유민이가 울면서 뛰쳐나왔다.



유민 : 아빠!! ㅜㅜ 오빠가.. 막..


(이때 번개같이 뛰어나와서 말을 가로채는 은우.)


은우 : 아빠! 나 자려고 하는데 유민이가 막 머리로 밀고 손가락 입에 넣고 괴롭혀!


유민 : 오빠!!! 유민이 말하고 있었잖아!! ㅡ.ㅡ+


은우 : 오빠~~ 유민이 말하고 있었잖아~ 

(은우는 '말 따라 하면서 놀리기'를 시전 했다!)


유민 : 따라 하지 마!!! ㅡ.ㅡ+ 엉엉엉 ㅜ.ㅜ

(효과는 굉장했다!)


아빠 : 은우가 자려고 하는데 유민이가 방해해서 화가 났구나? 

기분이 많이 나빴겠다.


유민 : 오빠가 막 때렸다고!


아빠 : 유민이는 오빠가 때려서 많이 아프고 속상했구나? 

얼마나 아팠을까.. 괜찮아?



속에서 천불이 난다. 당장이라도 잘잘못을 따져서 따끔하게 한마디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경험상 별로 좋은 방법이 아니란 걸 알기에 애들 마음에 공감만 해주고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아빠 : 아빠 지금 파스타 할 건데 도와줄 사람?

'돼지 목살 파스타'라고 아빠가 개발한 요리라 맛있을지는 모르겠다.


은우 : 목살? 사람 목의 살?


아빠 : 돼지 목의 살. 어제 먹다가 남은 거야.

아빠가 고기만 익히고 반씩 나눠줄 테니 소스 좀 만들어줘.


둘 다 의자를 가지고 와서 인덕션 앞에 섰는데 유민이가 갑자기 짜증을 내면서 소리친다.


유민 : 오빠 옆에 하기 싫다고! 

아빠가 가운데에 있고 오빠는 저리 가!


은우 : 유민이나 저리 가!



다시 한바탕 싸움이 났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오는 것이 느껴진다. 정말 육아는 도전의 연속이구나. 좋을 때는 한없이 좋지만 아이들이 싸울 때면 정말 심적으로 힘들다. 잠시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니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니. 너희들을 졸리고 배고픈 상태로 만든 내 업보지.'



아빠 : 얘들아, 여긴 조리기구 앞이라 위험하니 소파에 가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아빠가 고기만 익혀놓고 잠깐 멈춰둘게 이야기 끝나고 와.




요리반 싸움반.




야채도 썰어 놓고 열심히 볶으니 제법 냄새가 괜찮다. 유민이도 눈물을 닦고 다시 심기일전해서 요리를 시작했다. 토마토소스랑 케첩도 좀 넣고 올리브 오일 넣고 어간장도 좀 넣고.. 이것저것 넣다 보니 대충 맛이 나온다. 파스타 면을 8분 삶아서 반씩 나눠줬다. 면이랑 소스를 잘 혼합해서 맛을 봤는데...


아빠 : 얘들아. 망했어!!

면이 하나도 안 익었네.. ㅜ.ㅜ


보통 8분 정도 삶으면 적당하던데. 오늘따라 되는 일이 없구나. 그나마 면수를 버리지 않은 게 다행이다. 소스에 이미 섞인 면을 하나씩 집게로 집어서 다시 삶았다. 그 사이 아이들은 식탁 준비. 3분을 더 삶고 나서야 좀 먹을만한 식감이 되었다. 다시 소스랑 합쳐서 그릇에 담고 치즈를 뿌렸다. 평소 파스타 장인(아내)이 해주는 파스타만 먹던 아이들이라 입에 맞을지 심히 걱정된다.


아빠 : 어때?


은우 : 오! 최고!


유민 : 유민이도 맛있어!


아빠 : 다행이네. 아빠가 먹어도 맛있다.

은우랑 유민이가 맛있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잘 먹을게~


이제야 아이들이 웃는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다행이다. 하긴, 고기랑 밀가루의 조합인데 맛없으면 이상한 거지. ^^;;




생각보다 히트였던 돼지목살 파스타.




유민 : 아빠, 근데 유민이 더 먹고 싶은데 왜 조금밖에 안 줘?


아빠 : 미안해. 파스타 면이 조금밖에 없더라고..

어디 있을 거 같은데 아빠는 못 찾겠더라..

먹고 부족하면 간식 먹자. 


유민 : 그럼 유민이 치즈 먹을래.


아빠 : (슬라이스 치즈를 꺼내며) 이거?


유민 : 아니, 그거 말고 덩어리 치즈.


아빠 : 덩어리 치즈?


유민 : 막 피자 만들 때 엄마가 쓰는 거~


아빠 : 아.. 자연치즈! (주 : 모차렐라 치즈)

잠깐만.. 

유민아 근데 아무리 찾아도 없네. 다 먹었나 봐.


유민 : 그럼 지금 당장 가서 사 오자.


아빠 : 아빠는 설거지를 해야 될 거 같은데..

다른 거 간식 먹을 거 많으니깐 유민이가 한 번만 양보해줘.


유민 : 그래, 그럼 그 대신 다음에는 꼭 사줘.


아빠 : 응. 고마워 유민아.


배가 차서 기분이 다시 좋아졌는지 오래간만에 말이 통하는 유민이다. 설거지를 마치고 아이들을 자는 방으로 불렀다.


아빠 : 긴급제안!

너희들이 오늘 잠이 너무 부족한 거 같아. 특히 은우.

그래서 낮잠을 좀 자자. 30분 만이라도 자는 게 좋을 거 같아.

자고 일어나서 공룡랜드를 가던지 영화관을 가던지 하자.


은우 : 애들 보는 영화는 오늘 안 한다면서?


아빠 : 하귀 영화관 가면 되지!


은우 : 거기가 어딘데?


아빠 : 우리 집 2층. ^^;; 

(TV가 없는 우리 집이지만 2층 게스트 룸에는 손님용 TV가 있다.)



아이들을 눕혀 놓고 가운데 누워서 등을 쓸어줬다. 은우만이라도 잠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유민이가 먼저 잠들었다. 평소 낮잠 자는 시간이랑 딱 맞았나 보다. 은우는 잠이 안 온다며 그냥 눈만 감고 30분 있으면 안 되냐고 하더니 십 분도 안돼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성공!





아이들이 잠든 뒤 몰래 빠져나와 일기를 쓰고 아이들이랑 같이 볼 영화를 찾았다. 얼마 전 아이들이 흥미를 가졌던 '서유기'를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이 있어서 다운을 받아놓고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나니 한 시간 반 정도가 지났다. 슬슬 아이들을 깨워야 할 시간. 방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깨우는데 통 잠을 깨지 못한다. 그냥 뒀으면 아침까지도 잤을듯하다. 아이들이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말을 꺼냈다.


아빠 : 잘 잤어? 지금 4시야.

근데 밖에 바람이 엄청 세고 날씨가 좀 춥네.

오늘 너희 컨디션이 안 좋고 날씨도 추운데 공룡랜드는 다음에 가면 어떨까?


유민 : 유민이는 공룡랜드~


아빠 : 어제 휴림에 갈 때 그쪽에 공사하고 있었지?

사실 오늘 거기도 공사하나 봐. 아마 가도 못 볼 거야.



공룡랜드에 가도 됐겠지만 이동시간을 생각하면 비싼 돈 주고 입장해서는 30분 만에 나와야 될 판이다. 거기다가 날씨도 쌀쌀해서 지금 컨디션에는 야외 활동을 하기가 어렵다고 판단이 되었다. 애들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면 됐을 텐데 돈 이야기를 꺼내기가 꺼려져서 결국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이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충분히 설득이 가능했을 텐데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은우 : 그럼 우리 영화 봐?


아빠 : 응. 하귀 영화관 가자.

아빠가 지난번에 말한 영화 구해놨어! 

사실 이거 아빠도 보고 싶었거든.

이거 보고 바로 밥 먹으러 가자. 

오늘 고깃집 가기로 한 날인 거 알지?


유민 : 응. 유민이 배고파.


아빠 : 지금은 저녁 먹기에는 시간이 좀 이른 시간이라..

영화 보고 얼른 가서 먹자. 알았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름 영화관 가는 느낌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하귀영화관 갑시다.





영화는 생각보다 재밌어서 나도 빠져들어서 같이 봤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가려는데 은우는 여전히 뾰로통해 있다. 영화 볼 때 유민이가 자꾸 다리로 건드려서 화가 났다는데 내가 볼 땐 은우가 아직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한 것 같다. 


아빠 : 은우야, 이왕 밥 먹으러 가는 거 즐겁게 가자.

어떻게 하면 기분이 좋아질까?


은우 : 몰라.


아빠 : 밥 먹고 아이스크림 사갈까?


은우 : 응^^



언제나 통하는 마법의 단어. 아이스크림. 이러면 안 되는데 결국 간식을 미끼로 타협을 했다. 오늘의 나는 참 육아력이 형편없는 아빠다. 수면 부족과 피로 누적으로 마음의 그릇이 평소 반도 안 되는 것 같다. 육아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아이스크림으로 텐션 업!




출발하기 전에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은우가 물어본다.


은우 : 아빠 얼굴은 왜 안 나와?


아빠 : 아빠? 아빠 못생기게 나와서 그냥 너희만 찍을라고.


유민 : 아니야! 아빠 잘생겼어!!


아빠 : 진짜? 고마워 ^^

은우도 그렇게 생각해?


은우 :........


절대 맘에 없는 소리는 안 하는 매정한 녀석. 그래도 유민이 덕에 나도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런 게 아들과 딸의 차이인가. 


아빠 :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이고.

일단 가는 길에는 아빠가 재밌는 이야기 해줄게.

은우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라서 듣다 보면 은우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아까 본 영화는 ‘서유기’라는 중국의 유명한 이야기인데 그 보다 더 유명한 ‘삼국지’라는 이야기가 있거든.



안 그래도 은우가 삼국지를 참 좋아할 거 같아서 지난번 도서관에 갔을 때 유아용 삼국지가 있나 싶어서 찾아봤었다. 유아용은 없었고 초등학생용이 있긴 했는데 글밥이 너무 많아서 읽어주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차라리 내가 이야기 형식으로 들려주는 게 낫겠다 싶었다.



아빠 : 이게 진짜 유명하고 재밌는 이야기거든.

전에 도서관 갔을 때 초등학생용 밖에 없어서 그냥 아빠가 이야기로 해줄게.

이야기가 많이 길고 나오는 사람도 많아서 복잡할 수 도 있어. 

그래도 재미있을 거야.



아이들이 등장인물 들을 기억 못 할까 봐 나름 외모에 대한 묘사와 대사까지 곁들여 이야기를 해주니 아이들이 꽤 빠져서 이야기를 들었다. 유비, 관우, 장비가 의용군을 이끌고 황건적과의 첫 싸움에서 승리한 대목에서 식당에 도착했다.


아빠 :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아빠한테 ‘황건적을 물리치고 마을이 평화로워졌다’까지 했다고 말해줘.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우리 가족은 외식을 자주 하지 않는다. 아내가 유기농 식재료와 건강한 요리법에 확고한 의지가 있기에 대부분의 식사를 집에서 해결한다. 외식을 하게 돼도 주로 건강한 재료를 사용하는 식당을 찾아서 가는 편인데 그런 우리 가족이 한 번씩 가는 갈빗집이 있다. 양념갈비를 좋아하는 은우가 시도 때도 없이 가자고 하는 태백산 숯불갈비. 재료가 건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집에서 멀지 않고 가본 고깃집 중에 그나마 깔끔하고 서비스도 괜찮은 편이다. 고깃집에서 아이 둘을 끼고 고기를 구워 먹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식당에 들어갔다.  




얼른 가자~





식당에 들어서니 오늘은 평소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자리를 안내받았는데 우리 테이블이랑 붙어있는 옆 테이블에서 한 가족이 식사 중이었다. 음식점에 들어가기 전부터 ‘자리 가지고 싸우지 않기’는 단단히 못을 박아놓은 상태여서 별다른 마찰 없이 아이들을 앉히고 음식을 주문했다. 



그런데 내 느낌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원분들도 전에는 애들이랑 가면 친절하게 말도 걸고 고기도 구워주고 했었는데 오늘따라 뭔가 대접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자꾸 힐끔힐끔 쳐다보는데 눈빛들이 어째 동정의 눈빛이다. 아차 싶었다. 내 입장에서야 ‘아이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는 아빠’의 모습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사연이 있는 가족’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더욱이 아이들의 행색을 보니 영락없이 엄마 없는 티가 난다. 어쩐지.. 그래서 민박집 사장님도, 캠핑장 직원분도 엄마의 이야기를 묻지 않았구나. 




꿋꿋하게 먹는 유민이.





사람이 간사한 게 한번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자꾸 신경이 쓰인다. 설상가상 은우가 갑자기 몸을 배배 꼬며 애기소리를 내면서 퇴행 행동을 보인다. 사람이 많고 시끄러운 곳에 갑자기 오게 돼서 긴장한 것 같은데 옆 테이블이랑도 너무 가깝고 엄마도 없어서 안정감을 못 느끼는 것 같다. 긴장한 표정으로 자꾸 주위를 둘러보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안쓰럽다. 은우의 상태를 보니 얼른 먹고 가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밥을 시키고 된장국을 떠주고 고기를 구워서 잘라줬다. 


은우와는 달리 유민이는 꿋꿋하게 잘도 먹는다. 된장국을 보더니 “어! 이거 유민이가 좋아하는 건데!” 하고는 밥을 한술 뜨고 고기를 올려서는 된장국에 적셔서 깨알같이 먹는다. 배가 고팠는지 한 그릇을 뚝딱 먹고 고기도 많이 먹었다.


유민 : 아빠, 근데 유민이 이거 말고 전에 서울 할아버지 왔을 때 먹은 갈비 먹고 싶어.


아빠 : 이거 갈비 맞는데. 그때 먹었던 것도 이거야.


유민 : 아니 이거 아니야. 갈비 말이야.


아빠 : 아.. 뼈 있는 거?


유민 : 응.


아빠 : 오늘은 뼈가 없네. 이모가 애들이랑 와서 뼈를 안 줬나 봐.

아이들이 뼈를 뜯어먹을 거라고 생각을 못했나 보네.


유민 : 그럼 주문하면 되잖아.


아빠 : 고기 지금 있는 것도 많아서 더 시키긴 어려워.

아빠가 고기 크게 잘라줄 테니깐 뼈 있다고 생각하고 손으로 들고 뜯어먹어.

그럼 되겠지?


유민 : 응. 알았어.





고기는 뜯어야 제 맛.





유민이는 낮잠을 자고 나서는 완전히 회복했는지 밥도 잘 먹고 표정도 밝다. 하지만 은우는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평소 갈비를 먹으러 오면 공깃밥 한 그릇은 기본으로 먹고 고기도 거의 1인분을 먹는데 오늘은 밥도 먹다 말다 하고 고기는 아예 삼키지도 못한다. 섬세하고 예민한 은우는 컨디션도 컨디션이지만 아내의 빈자리와 낯선 환경이 큰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왔나 보다. 은우와 유민이는 정말 많이 다르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은우를 조용히 옆자리로 불렀다. 


아빠 : 은우야. 지금 많이 힘들고 정신없지?

근데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 은우에게 별로 관심이 없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저 사람들이 은우를 쳐다보거나 관심 갖거나 하지 않아. 

당연히 은우를 공격하지도 않고.

아빠가 옆에서 지켜줄 테니까 얼른 먹고 가자.



된장국에 밥을 말아서 겨우겨우 먹이고 서둘러 식당에서 나왔다. 식당에서 나와서 차로 향하는데 뭔가 마음이 안 좋았다. 은우한테는 좀 더 세심한 배려가 필요했는데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은우는 차에 타자마자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린다.



아빠 : 은우가 지금 컨디션도 안 좋은데 아빠가 생각을 못했네.

아까 많이 정신없고 힘들었지?

은우가 엄마가 없어서 안정이 안되고 긴장했을 거 같아.

긴장하면 교감신경이라는 게 작용하면서 장도 안 움직이고 침도 잘 안 나와서 밥 먹기 힘들거든. 

그럴 때 억지로 먹으면 체하기도 하고. 

지금 은우가 그런 상태인 거 같아.

아빠 생각에는 엄마 없이 외식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


은우 : 왜? 내가 잘 안 먹어서?


아빠 : 그래서가 아니고..

사실 아빠가 방금 느낀 건데 사람들이 우리를 불쌍하게 볼 수도 있을 거 같더라고.


은우 : 엄마가 없어서?


아빠 : 응. 엄마는 여행 간 거고 우리도 지금 너무 즐겁고 좋은데..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엄마가 없는 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사실 우리만 좋으면 되는 거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상관없긴 한데..

아빠는 그냥.. 맨날 엄마랑 같이 가던 곳인데 우리끼리 가니깐 엄마 생각이 더 나서 그런 거 같아.


은우 : 응. 나도 그랬어.


유민 : 아빠 근데 지금 아이스크림 사러 가는 거야?


아빠 : 응.. 그래 ^^;;

(유민아. 깜빡이 좀 켜고 들어와..)



오는 길에 외도에 있는 배스킨라빈스를 들러서 예전에 선물로 받은 쿠폰을 아이스크림으로 교환해 왔다. 아이스크림을 보자 다시 텐션이 올라간 아이들. 시간이 늦었으니 아이스크림은 조금씩만 먹으라고 말을 하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나중에 씻고 나와보니 알아서 적당히 먹고 뚜껑을 덮고 양치까지 하고 잘 준비를 마친 아이들. 참 착하다.





아이스크림은 항상 옳다.





내일은 아침 일찍 병원에 갔다가 어린이집에 가야 하기에 일찍 자야 하는데 은우가 영 상태가 안 좋다. 계속 토할 것 같다고 말하는 은우. 아까 식당에서 급하게 먹은 게 결국 체한 거 같다.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고생하다가 결국 먹은 것 일부를 토해내고서야 겨우 편해졌다며 웃는다. 마음이 안 좋았다. 내 잘못이다. 은우야 미안해.. ㅜㅜ




우여곡절 끝에 자려고 누웠는데 은우도 유민이도 계속 장난만 치고 잘 생각이 없다. 낮잠을 자긴 했지만 수면시간이 부족해서 피곤할 텐데. 일찍 재워야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마음이 조급해지니 다시 속에서는 감정의 파도가 일렁인다.


아빠 : 얘들아. 아빠가 오늘은 좀 힘들다.

진짜 엄마가 평소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무 잘 알 것 같아.

앞으로는 엄마한테 화내지 말라는 말도 못 하겠어.

내일 일찍 일어나야 돼서 오늘 너희들이 좀 일찍 잤으면 좋겠는데 계속 못 자니까 마음이 참 불편해.

우도도 가고 캠핑도 가고 하는 건 좋았는데 결국 평소 자는 시간이랑 너무 달라져서 리듬이 깨진 거잖아.

아빠 때문에 너희들의 수면 패턴이 망가진 거 같아서 아빠가 잘못한 거 같고 미안한 마음이 생겨.


유민 : 아빠... 아니야...

유민이가 자기 싫어서 그런 거지 아빠가 잘못 아니야..

그리고 유민이 이제 잘 거야..



이래서 딸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건가. 유민이 덕에 상황은 쉽게 흘러갔지만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육아력이 바닥을 친 오늘의 나는 결국 마지막에 아이들의 죄책감을 이용하고야 말았다. 육아는 정말 쉽지 않구나. 요 며칠의 나를 돌아보면 평정을 유지하고 애들을 케어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는 산책, 독서와 글쓰기, 신문보기, 운동, 식이조절 등등.. 근 1년간 규칙적으로 지켜왔던 나의 습관이자 루틴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기 관리를 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자기를 관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 땅의 모든 엄마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지는 하루였다. 






제발 좀 자자.ㅜ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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