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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 Nov 15. 2019

<7화. “저녁 마실”>

독박육아 프로젝트 '아내에게 휴가를!'


2019-10-25, 금요일


독박 육아 프로젝트 일곱째 날의 기록입니다.








새벽에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일어나 보니 은우가 내 옆에서 자고 있다. 대체 언제 온 거지. 은우가 평소에 잠잘 때 만지면서 자는 ‘소매’(엄마 긴팔 옷)를 어제 빨았는데 그게 없어서 안정이 안된 거 같다. 반면 유민이는 밤새 별일 없이 잘 잤다. 평소에는 유민이가 새벽에 자주 깨는 편인데 이상하게 유민이는 요새 잘잔다. 잠들 때 옆에 있어줘서 기분 좋게 잠들어서 그런 것 같다. 은우는 혼자서도 잘 잠드는데 유민이는 잠드는 순간의 안정감이 숙면에 중요한 역할을 하나보다. 유민이 말마따나 “유민이는 옆에 있어줘야 잘 수 있어.”라는 말이 맞다.



커튼을 열고 잤더니 아침 햇살에 자연스럽게 깰 수 있었다. 은우는 푹 잘 잤는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서 내 얼굴을 쓰다듬고 난리다. 나는 아직 잠이 덜 깨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아빠 : 은우야, 아빠 좀 가만 내버려 둬..


은우 : 아빠~ 잘 잤어~? 

아빠~ 아빠~ 


아빠 : 은우야.. 아빠 너무 피곤해.

잠깐만 그냥 두면 안 될까.


은우 : 그럼 등 밟아 줄까?


아빠 : 응. 그럼 고맙지..




은근히 시원하다.





아주 효자가 따로 없다. 은우가 열심히 등을 밟아주고 있는데 유민이가 깨서 방으로 왔다. 유민이도 잘 자서 기분이 좋은지 침대 위로 올라와서 은우에게 달라붙는다.


유민 : 오빠~오빠~


은우 : 유민아!

오빠 지금 아빠 밟아주고 있잖아. 하지 마.


은우가 뭐라 하든 계속 은우에게 달라붙는 유민이와 밀어내는 은우. 둘은 티격태격하더니 결국 또 싸움이 나버렸다. 아.. 평화로운 아침은 이렇게 물 건너가는 건가.





잘자서 컨디션이 좋다.





아빠 : 얘들아, 그만하고 아침이나 먹자.

뭐 먹고 싶어?


은우 : 뭐 있어?


아빠 : 밥은 있는데.. 김에 싸서 먹을래?


은우 : 응.


유민 : 유민이는 족발!


아빠 : 아침부터? ^^;;

그래 어제 남은 거 줄게 밥이랑 먹어.


유민 : 유민이는 근데 족발이 있으면 밥을 못 먹어.

왠 줄 알아? 족발 껍질이 너무 맛있어서.

뼈 있는 족발도 너무 맛있어서 밥을 못 먹어.

아빠! 아빠! 근데 새우튀김이 엄청 맛있었어!


아빠 : 그래? 새우튀김도 남은 거 있는데 줄까?


유민 : 유민이는 그냥 족발만 먹을래.


은우 : 아빠, 나 오늘 보물섬 안 가고 아빠랑 집에 있으면 안 돼?

집에서 삼국지 이야기 듣고 아빠랑 놀고 싶어.


아빠 : 아빠도 은우랑 놀러 가고 싶어. 

우리 계획 세워 놓은 것도 있고.

근데 오늘 보물섬에서 개원 잔치 마지막 연습한다고 꼭 오라 그랬거든.

저녁에는 승은이네 마실도 갈 거고.


유민 : 유민이는 보물섬 갈 거야!


아빠 : 응, 얼른 아침 먹고 가자.


아이들은 부엌에 오자마자 계획표를 보고 묻는다. 


은우 : 아빠, 오늘은 박물관 갔다가 샤부샤부 먹어?


아빠 : 아니.. 오늘 보물섬 가야 돼서 박물관은 못 가고. 

저녁도 승은이네 마실이라..

샤부샤부는 내일 먹자. 재료는 다 사놨어.



일방적인 계획 변경이었지만 아이들은 고맙게도 별다른 불만 없이 식탁에 앉았다. 




등짝 맞기 딱 좋은 아침 밥상.





어제 먹다가 남은 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놓고 찬장을 열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김이 안 보인다. 


아빠 : 은우야, 보니깐 김이 없네?

그냥 물 말아서 먹을까? 

족발이랑 깍두기 잘라서 올려줄게.


은우 : 족발만.


아빠 : 그래. 

아. 맞다. 유민아, 어제 아빠가 유민이가 사다 달라고 한 치즈도 사 왔어~


유민 : 먹을래!


아빠 : 그래. 잘라서 줄게.



유민이에게만 치즈를 준 게 싫었던 걸까. 아침을 먹는 은우의 표정이 영 안 좋다. 아니나 다를까 자꾸 유민이를 자극해서 싸움을 거는 은우. 그러던 중 기어코 사건이 터졌다. 물에 말아놓은 밥이 은우가 먹기에 양이 많기도 했고 은우가 먹는 게 영 시원치 않아서 유민이에게 한입을 떠서 먹여줬는데 은우가 난리가 난 것이다.


은우 : 야! 좌유민! 오빠 밥 왜 먹어!


유민 : 왜! 유민이도 먹고 싶네!

그리고 좌유민이라고 하지 마! 유민이라고 해야지!


은우 : 남에서 막 뺏어먹고. 그럼 도둑이지.


아빠 : 은우야, 아빠가 떠서 준거잖아.

은우가 안 먹길래 남길 거 같아서 준거야.

은우한테 안 물어보고 줘서 기분 나빴어?


은우 : 난 유민이가 먹는 게 싫어.

유민이 나빠.


유민 : 유민이 안나 빠!! 엉엉엉 ㅜㅜ


은우의 가시 돋친 말에 대성통곡을 하는 유민이. 얼른 챙겨서 늦지 않게 나가야 되는데 아침식사가 지지부진해서 안 그래도 마음이 조급한 데 갈 준비는 하나도 안 한 상태로 싸우고 있는 걸 보니 가만히 보고 있기 힘들었다. 


평소에 출근을 하고 나면 가끔 아내에게 '오늘은 어린이집 보내는 게 정말 힘들었어.'라는 연락이 올 때가 있는데 오늘이 딱 그런 상황이 아닐까. 시간은 없고 할 일은 많으니 속이 밴댕이 소갈딱지처럼 작아진다. 지친다.


아빠 : 은우야, 아빠가 유민이 한테 준 거니 유민이가 나쁜 게 아니고 아빠가 나쁜 거야.


은우 : 응. 아빠가 내 밥 뺏어갔으니까 아빠가 나빠.


아빠 : 그렇다고 도둑은 심한 거 아니야?

사랑하는 가족끼리 나눠먹을 수도 있는 거 아니?

아빠가 도둑이면 경찰서에 잡혀갔으면 좋겠어?


은우 : 응. 


아빠 : 그래, 아빠 그럼 경찰서에 갈게.


화가 나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유민이는 가지 말라고 울고불고 난리가 났고 은우는 씩씩대며 방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 감정을 발산하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답답하다. 갑자기 후회가 되었다. 아침부터 이럴게 아니었는데.


아빠 : 에휴.. 내가 왜 그랬을까..

유민아, 아빠 잠깐만 나갔다 올게.


밖에 나가서 머리를 식히고 나니 좀 정신이 든다. 안 그래도 질투가 심한 은우인데 내가 오늘따라 유민이 편만 들어준다고 느꼈던 것 같다. 족발에, 치즈에, 유민이가 달라는 건 다해주고 그나마 은우가 먹던 밥까지 물어보지도 않고 유민이 한테 주었고 거기다가 둘이 싸울 때 유민이 편을 들기까지 했으니. 



다시 집으로 들어가자 은우는 방문을 열고 나왔다. 


아빠 : 은우야, 이야기 좀 하자.

아빠가 어제 어린이집에 늦어서 새봄이 한 테 미안하고 마음이 좀 불편했거든. 

그래서 오늘은 늦지 않게 서두르려고 하다 보니 마음의 그릇이 너무 작아졌어.

은우가 먹던 밥을 아빠가 안 물어보고 유민이 한테 준거는 미안해.

근데 은우가 먹었던 밥은 아빠가 점심에 먹으려고 놔둔 거였거든.

은우한테는 당연히 양이 많다고 생각해서 유민이를 나눠준 거야.

근데 은우가 막 도둑이라고 하니까 아빠도 속상하더라고.



변명에 불과한 사과 같지 않은 사과의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그렇게 한참 말을 이어가는데 불현듯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 집에 늦어서 마음이 불편한 것도, 밥을 남길까 봐 초조했던 것도, 모두 아이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순전히 ‘나’의 사정이다. 상대방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내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하는데 말이 통할 리가 있나.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내 잘못이다. 


아빠 : 아니다. 

은우야. 아빠가 미안해.

은우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기분이 나빴을 거 같아.

나눠먹고 양보하는 건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냉장고에 밥이 더 있긴 해. 더 먹고 싶으면 데워줄게.


은우 : 더 먹을래.


은우는 기어코 밥 한 공기를 데워서 물에 말아먹고 나서야 기분이 풀렸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은우에게 이야기했다. 


아빠 : 은우야, 아빠가 생각해보니까 서로 입장을 바꿔보는 게 참 중요한 거 같아.

오늘 아침에 은우랑 유민이랑 왜 싸우게 된 거야?


은우 : 아니, 유민이가 내가 싫다는데 자꾸 귀찮게 하잖아.


아빠 : 그렇지. 그래서 은우가 짜증이 났던 거지.

근데 솔직히 아빠도 아침에 잠이 덜 깼는데 은우가 자꾸 얼굴 만지니깐 기분이 별로 안 좋았거든.

은우가 싫은 게 아니고 그 행동이 귀찮고 싫었어.

은우는 아빠가 싫다고 하는데도 왜 자꾸 얼굴을 만졌어?


은우 : 아빠가 좋으니깐 그랬지.


아빠 : 응. 아마 아침에 유민이도 은우랑 같은 마음이었을 거 같아.

유민이는 은우가 좋아서 막 껴안고 했는데 은우는 불편했잖아.

은우가 아빠 좋아서 얼굴을 만질 때 아빠가 불편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그런데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느낀 마음을 생각해보면 조금은 쉬운 거 같아. 그렇지?


은우 :.....


아빠 : 아빠가 지금 은우한테 잘못했다고 하는 게 아니야.

아빠도 많이 부족해서 연습이 필요해.

은우도 아빠랑 같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상해보는 연습을 해보면 좋겠다는 거야.


은우 : 알았어.



남자는 여자보다 공감하는 능력이 약하다고 한다. 그냥 무심한 것 과는 다르게 남자는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아픔 같은 것을 내 것처럼 느끼는 일종의 상상력이 부족한 것 같다. 특히 나는 남자라는 점을 감안하고도 공감력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물론 나를 빼다 박은 은우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겠지. 우리 부자에게 ‘공감’은 평생을 거쳐 노력해야 할 일종의 숙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등원하기 참 힘들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어린이집으로 출발했다. 둘 다 우유를 남겼길래 약병에 담아서 손에 들려주고 차에 태우는데 생각해보니 은우 아침 약을 안 먹였다. 아침에 아이들 등원을 챙기는 건 진짜 정신이 없고 힘든 일이구나. 이 전쟁을 매일 치르는 아내가 존경스럽다.



다시 집에 들어가서 약을 챙겨 와 은우에게 먹이고 드디어 출발했다. 어린이집까지 가는 차 안에서 만화 주제곡 노래들을 듣는데 반가운 노래가 나와서 따라 불렀더니 은우가 묻는다.


은우 : 아빠, 이거 무슨 노래야?


아빠 : 이 노래 신나지? 

아빠 어릴 때 보던 ‘그랜다이져’라는 만화 노래야.


은우 : 재밌어?


아빠 : 응. 어떤 별의 왕자였나? 어떤 사람이 UFO로봇을 타고 싸우는 이야기야.

아빠가 7살 때는 비디오 가게가 있었거든.

옛날에 할머니랑 같이 가서 이거 비디오 빌려다 본 기억이나.


은우 : 어린이들 보는 거야?


아빠 : 음.. 잘 모르겠어. 

근데 그때는 그런 게 별로 없었어.

그래서 애들이 어른들 보는 것도 막 보고 그랬었거든.


유민 : 그럼 어떡해?


아빠 : 그니깐. 어른들 보는 거에는 막 싸우고 다치고 전쟁하고 그런 것들이 있잖아.

그런 장면들이 애들한테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못 보게 하는 거거든.


은우 : 근데 어른들 영화에는 왜 꼭 그런 게 들어가야 해?


아빠 : 꼭 들어가야 되는 건 아니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실은 착하고 이쁜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전쟁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고 그렇거든.

어른들 영화는 우리 사는 세상 이야기가 많으니 그런 게 나올 수밖에 없는 거고.

그런 것들을 아직 아이들한테는 알려주고 싶지 않으니 아이들 영화가 따로 있는 거지.


유민 : 근데 아빠는 저번에 알라딘 볼 때 아이들 영화인데 같이 봤잖아.


은우 : 아이들 영화는 당연히 어른들도 봐도 되지.


아빠 : 맞아. 그래서 ‘아이들 영화’가 아니고 ‘전체 관람가’라고 해.

전체가 뭐지?


유민 : 우리 모두 다!


아빠 : 응. 어른 아이 다 볼 수 있다는 뜻이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려는데 유민이가 내 목을 잡더니 갑자기 애정표현을 한다.


유민 : 아빠 냄새난다. 

유민이는 아빠 냄새가 좋아.


아빠 : 응? 진짜? 

엄마는 맨날 땀냄새난다고 그러던데. ^^;;

아빠 냄새는 땀냄새 아니야?


유민 : 응. 유민이는 아빠 땀냄새가 좋아.


은우 : 응. 아빠 땀냄새를 얼굴에 비비면 샤워하는 것처럼 내 몸을 씻겨줘~~


아빠 : 그게 뭐야.. 크크..


아빠라면 땀냄새까지 좋다는 아이들. 오늘도 아이들의 과분한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아이들을 보내 놓고 집에 와보니 아침 등원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난 흔적들로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집이 지저분하니 마음이 심란해서 얼른 대청소를 했다. 청소하는 김에 나와서 마당 정리도 하고 세차도 하고 잔디도 깎고 정원에 물도 주고 애들 운동화도 빨았다. 





마당일로 기분전환.





할 일을 모두 마치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역시 나는 집안일이 잘 맞는 것 같다. 어제 먹다 남은 튀김을 반찬삼아 점심식사를 해결하고 집 근처 카페에 갔다. 카페에 앉아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의외로 주부의 하루가 짧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침 일찍 애들을 보내면 애들을 데리러 갈 때까지 충분한 자유시간이 생길 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잡다한 집안일을 하고 밥을 챙겨 먹고 저녁장을 보고 하다 보면 어느새 애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다. 내년에 은우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더 일찍 끝날 텐데. 당분간 아내의 개인적인 시간은 확보할 방법이 요원하다. 주말에 잠깐이라도 한 번씩 충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제와 똑같은 광경.




은우와 유민이가 다니는 보물섬 어린이집은 공동육아 어린이 집이다. 공동육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부모의 육아참여가 필수가 된다. 특히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꽃이라 불리는 날적이 문화와 마실 문화가 특징적이다. 



‘날적이’는 부모와 교사의 일종의 교환일기이다. 교사도 부모도 형식적으로 쓰는 게 아니기에 날적이를 보고 있으면 어린이집에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몰랐던 아이들의 모습들도 알게 된다. 특히 부모도 같이 공들여 작성하는 기록이라 그 자체로 아이의 성장 기록이 되고 부모와 교사 간의 심도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장이 되기도 한다. 


(사실 아이들이 처음 어린이집에 다닐 때에는 의욕에 불타서 이 날적이를 심혈을 기울여 공들여 썼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숙제처럼 느껴져서 날적이를 쓰는 걸 피하게 되었고 특히 작년 말부터는 육아일기를 쓰다 보니 같은 내용을 두 번 써야 되는 거 같아 더 안 쓰게 됐다. 얼마 안 남았지만 지금부터라도 다시 잘 써봐야겠다.)



또 하나의 특징적인 문화는 마실 문화이다. '마실'은 친구들을 내가 사는 동네로 초대하는 걸 이야기하는데 특히 ‘저녁 마실’이 핵심 콘텐츠이다. 저녁 마실을 하는 날이면 오후에 어린이집 차량으로 같은 반 아이들이 전부 초대한 아이의 집으로 가서 동네 구경도 하고 집에서 놀기도 한다. 그리고 부모들도 퇴근 후 그 집에 모여서 같이 저녁을 먹고 술도 한 잔 하면서 서로 친분을 쌓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어린이집 행사에 나름 참여를 한다고는 했지만 생각해보면 당직을 핑계로 많이 빠진 것도 사실이다. 거기다가 낯가림과 내성적인 성격까지 더해져서 어린이집의 다른 부모들과의 친분이 두텁지 못하다. 은우가 있는 청어반은 그래도 2년을 보고 지냈으니 어느 정도는 친하지만 유민이가 있는 남생이 방은 거의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유민이는 아직 2년을 더 다닐 거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앞으로는 좀 노력해서 친해져 봐야겠다.



오늘은 은우가 있는 청어반의 승은이가 저녁 마실을 초대한 날이다. 사실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서귀포라 멀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직도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편하지 않다. 부모들도 아이들도 나에게는 아직 낯설고 어렵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많지만 다른 아이들은 솔직히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모르겠다. 부모들과도 같이 술자리도 자주 하고 하면 친해졌을 텐데 너무 참여가 저조했더니 아직 서먹서먹한 게 있다. 그래도 은우한테는 마지막 마실이 될 거 같아서 가기로 결심했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나는 ‘공동육아’에는 그다지 잘 맞는 성격의 아빠는 아닌 것 같다.)




은우는 이미 어린이집 차로 승은이네 집에 가 있었고 나는 유민이를 픽업하러 어린이집에 갔다. 유민이는 뭐가 그리 신났는지 방방 뛰어다닌다. 승은이 언니네 마실 갈 거라고 했더니 더 신나서 뛰다 못해 날아다닌다.


유민 : 아빠! 우리 걸어서 가자!


아빠 : 잉? 유민아. 거기 서귀포야.

걸어서 가면.. 승은이네 도착하면 유민이 6살 되어 있을걸?





평소와 다르게 신속한 귀가.






유민이를 차에 태우고 서귀포로 출발했다. 오래간만에 유민이랑 둘이 보내는 시간. 유민이는 평소에 못했던 이야기를 다 쏟아낼 생각인지 승은이네 도착할 때까지 약 한 시간을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유민 : 아빠, 근데 공민율 형아가 김치 15개 모아서 한꺼번에 먹었거든?

근데 하나도 안 매웠대!


아빠 : 그래? 안 매운 김치였어?


유민 : 아니~~! 엄청 매운 거였는데도 안 매웠대.

아빠 아빠! 그리고 저번에 우리 차 유리 깨졌었잖아.


아빠 : 응. 근데?


유민 : 별이가 차 고장 나서 차병원 갔다 왔대.

우리도 차병원 가서 고쳤잖아. 

차병원이 뭔지 알아?


아빠 : 차 고치는 곳?


유민 : 응. 거기서 고쳤대.

그리고 산이네도 차 고장 나서 차병원 갔대.


아빠 : 그랬구나. 요새 차들이 많이 고장 나네.


유민 : 아빠! 그리고 지난번 월정사에 갔는데,

그 똥냄새나는 열매 뭐였지?


아빠 : 은행?


유민 : 어, 그거 껍질 벗겨서 구워 먹는대. 엄청 맛있대.

나중에 월정사 가면 은행나무한테 ‘하나만 빌려줘~’하고 따서 먹자.


아빠 : 그래. 맛있겠다.


유민 : 아빠!! 유민이 오늘 보물섬에서 연습한 거 있는데 그거 파티할 때 할 거거든.

보면 정말 잘한다고 생각할걸?


아빠 : 그래? 기대된다 유민아.





끝없이 이어지는 유민이의 수다.





정신없이 떠들다 보니 어느새 승은이네 집에 도착했다. 승은이네 집은 아파트였는데 도착해보니 이미 집은 '혼돈의 카오스' 상태였다. 다행히 아래층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층간소음에 대해 너그럽다고 하신다. 은근슬쩍 집 구경을 했는데 승은이네 집은 책이 참 많았다. 그냥 많은 게 아니고 작은 도서관 규모는 될 정도로 엄청나게 책이 많았다. 특히 한쪽에는 육아와 교육에 대한 책들이 꽂혀있었다. 책들을 훑어보면서 육아에 관심이 많은 부모들이 모이게 된다는 점도 공동육아 어린이집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돈의 카오스






은우는 내가 왔는데도 본체만체 체스에 빠져있다. 옆에서 가만히 보니 은우에게 여러 명이 도전하는데 아직은 적수가 없는 것 같다. 자신감이 한껏 붙은 은우가 오랜만에 아빠랑 한번 해보겠다고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처참히 깨졌다. 시무룩해서 말없이 다른 상대를 찾는 은우. 좀 봐줄걸 그랬나..;



아이들과 놀면서 뻘쭘하게 있다 보니 다른 집 사람들도 하나둘씩 도착했다. 사람들이 하나씩 가져온 음식으로 김밥, 족발, 치킨, 김치찌개, 오징어 숙회 등 다양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호스트인 승은이네가 준비한 음식은 김치찌개와 오징어 숙회였다. 김치찌개가 얼큰하니 맛있길래 승은이 엄마에게 찌개가 정말 맛있다고 칭찬했는데 승은이 엄마는 “아.. 사 온 거예요..^^;;” 하고 대답해서 민망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오징어 숙회가 맛있다고 할걸. 음식들이 어째 다 술안주라 소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집에 돌아갈걸 생각해서 참았다. 



아이들도 어른들 밥 먹을 때 같이 먹으면 좋으련만 은우는 노느라 정신이 없어서 거의 먹지를 않았다. 반면 노는 와중에도 오며 가며 치킨을 열심히 먹어대는 유민이. 그래도 과일이랑 롤케이크, 마른안주 같은 먹을게 끊임없이 나와서 은우도 나중에는 원래 먹는 양만큼은 채웠다.




씬 스틸러 철봉 소녀.





저녁을 먹고 은우 약을 먹여야 돼서 약을 타서 먹이려는데 평소 같으면 그냥 받아먹었을 은우가 갑자기 입을 안 벌리고 장난을 친다. 주위 아빠들의 시선이 모아져서 갑자기 긴장했나 보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가 그냥 은우한테 먹으라고 약 병을 줬다. 


옆에 있던 다른 아빠들이 은우가 약을 먹기 힘들어하는 줄 알고 격려와 칭찬을 해주면서 관심을 가졌는데 이게 오히려 역효과였다. 관심을 받고 더 긴장도가 올라간 은우는 괜히 오버액션을 하기 시작했다. 약을 세게 빨아먹는다고 힘줘서 먹다가 결국 약을 뿜어버려서 대부분을 흘리고 만 은우. 당황해서 나를 바라보길래 괜찮다고 해줬다. 이런 소 심한 면은 좀 안 닮아도 되는데. 




엄마들은 엄마들끼리 수다를 떨고 아빠들은 먹고 마시고 아이들은 신나게 놀고.. 모두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보니 10시가 넘었다. 결국 아랫집 할머니가 올라오고 나서야 오늘의 마실은 마무리가 되었다. 대충이라도 정리를 해줘야 되는데 무엇을 어디서부터 해야 될지 감도 안 잡힌다. 특히 안방에 매트리스에 롤케이크 가루와 크림이 듬뿍 묻어 있는 걸 보고는 참 심란했다. 애써 못 본척하고 돌아서면서 갑자기 걱정이 되었다. 우리 집도 마실을 하긴 해야 하는데.. 감당할 수 있을까. 공동육아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참 이기적인 아빠다.




애들을 차에 태우고 집에 갈 시간. 가는 길에 잠들면 씻지도 못하고 도착할 때쯤 애매하게 깰 우려가 있어서 미리 집에서 나올 때부터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애들에게 들려줄 동화와 카페인 함량 200mg짜리 고 카페인 커피까지 장착하고 장거리 야간 운전을 시작했다. 다행히 11시경에 무사히 집에 도착할 수 있었고 애들도 잠들지 않은 상태여서 씻기고 재울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먼저 은우를 씻기는데 피곤해서 컨디션이 안 좋아진 은우가 괜히 짜증을 부린다.


아빠 : 은우야, 피곤하지? 

얼른 씻고 자자. 발은 아빠가 씻겨줄게.

내일은 드디어 엄마가 오네. 좋지?

엄마가 많이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아빠랑 재밌게 보냈지?


은우 : 응.


아빠 : 내년에도 엄마 또 다녀오라 할까?


은우 : 아니.


아빠 : 왜~ 엄마 휴가 보내주고 아빠랑 놀러 다니자. 

엄마 보고 싶어서 그래?

아니면 엄마랑 은우랑 여행 갈래?


은우 : 지난번에 아빠랑 유민이랑 놀았으니까 이번에는 아빠랑 나랑 갈 차례잖아.

짜증 나게 좀 하지 좀 마!


아빠 : 응?


은우 : 자꾸 짜증 나게 하지 말라고.


아빠 :.........



피곤하고 정신없는 건 알겠는데 이럴 때면 참 섭섭하고 화가 난다. 나도 많이 피곤하고 지친 터라 생각 없이 입을 열었다간 의미 없는 싸움이 될 거 같아 묵묵히 씻겨줬다. 은우를 침대에 눕히고 유민이를 씻기는데 원래 은우보다 더 까칠해야 정상인 유민이가 오히려 더 얌전하다. 아닌 게 아니라 내 표정이 안 좋아 눈치를 살피는 것 같다.



유민 : 아빠, 기분이 안 좋아?


아빠 : 그냥 좀 오빠랑 싸워서..

오빠랑 아빠랑 둘 다 피곤해서 그래.


유민이를 씻기고 눕히는데 옆에서 은우가 말한다. 


은우 : 옷 입혀줘.


아빠 : 은우야, 아빠한테 할 말 없니?


은우 : 옷 입혀달라고.


아빠 : 은우야, 은우가 피곤하고 졸려서 짜증이 난 건 아빠도 알아.

왜냐면 아빠도 은우처럼 지금 피곤하고 졸리거든.

근데 은우가 그렇게 할 때면 아빠는 두 가지 생각이 들어.


은우 : 무슨 생각?


아빠 :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가 오늘 늦은 시간까지 신나고 재밌게 놀았잖아.

그럼 피곤해도 ‘아~ 좀 피곤하지만 오늘 정말 재밌는 하루였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면 참 좋을 텐데,

늦게까지 놀 때마다 항상 짜증내고 싸우고 기분이 안 좋게 잠드니 즐거운 기억이 안 좋게 바뀌잖아.

아빠는 그게 너무 아까워. 


은우 : 그리고 또?


아빠 : 아빠도 오늘 피곤하고 멀리 운전하고 와서 지치거든.

하지만 은우랑 유민이 한테 막 짜증내고 그러고 싶지는 않아.

아빠한테 너희들은 소중하니깐.

그래서 은우가 이럴 때마다 아빠는 은우가 아빠를 소중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느껴져서 섭섭해.

아빠니깐 짜증도 받아주고 해야 맞는데, 솔직히 섭섭해.

아빠는 은우한테 소중한 사람이지?


은우 : 응.. 맞아.. 

미안해..


아빠 : 아빠도 다 못 받아줘서 미안해.

늦었으니까 얼른 자자.

아빠 씻고 와서 재워줄 테니깐 조금만 누워있어.



그리고 샤워를 하고 와보니 둘 다 자고 있었다. 마무리가 썩 개운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하루 종일 즐겁게 놀았으니 만족한다. 




계획 대로군.





오늘 마실에서 다른 아빠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거의 듣는 쪽이었지만 대화를 하면서 느낀 점이 많았다. 오늘 모인 사람들 모두 육아에 관심이 많고 저마다의 육아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단편적으로 보이는 모습들만 보고 사람을 판단한 감이 없잖아 있다. 특히 좋은 점보다는 단점들에 많이 집중했었다. 


나 스스로 육아 철학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다른 아이들이나 부모들의 단편적인 행동을 보고 부정적으로 해석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거나 때로는 우월감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공동육아를 통해 육아는 경쟁이 아니고 협력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그리고 오늘 마실을 통해 다른 아빠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나보다 더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육아 동료라는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면서 그래도 많이 편해진 것 같다. 앞으로는 행사에도 많이 참석하고 더 친분을 쌓아가야겠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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