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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 Nov 14. 2019

<6화. “족발 대장”>

독박육아 프로젝트 '아내에게 휴가를!'


2019-10-24, 목요일


독박 육아 프로젝트 여섯째 날의 기록입니다.








어젯밤 아이들을 재우고 일기를 업로드하고 나니 12시가 넘었다. 몸이 너무나도 피곤했지만 이대로 자는 게 너무 아쉬웠다. 나를 위한 보상을 주기 위해 게임기를 꺼내 들었는데 십 분도 안돼서 잠들어 버렸다. 예전에는 밤새 게임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체력이 도저히 안된다.  


만약 시간과 체력이 있다고 해도 도저히 생산적인 일을 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을 것 같다. 매일 밤 아내가 왜 그리 피곤해했는지 이해가 된다. 주말에 잠깐 애들을 보는 것과 하루 종일 매일을 같이 있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인 것 같다.





팅팅 부은 아이들.




일어나서 애들 방에 가보니 어제 잠든 그 모습 그대로 자고 있다. 밤새 안 깨고 잘 자서 다행이다. 애들 옆에 누워서 등을 문질러 주면서 천천히 깨웠다. 은우가 먼저 깼는데 잘 자서 피로가 풀렸는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은우 : 아빠! 완전 몸에 힘이 나고 기분이 날아갈 거 같아!


아빠 : 은우가 잘 자서 그런가 보다. 


은우 : 응. 아빠 몬~! 안아주기!!

(주 : 포켓몬스터 놀이)


아빠 : 아빠 아빠~


은우를 껴안고 뒹굴고 있으니 유민이가 눈을 떴다. 유민이도 잘 잔 거 같은데 사이좋은 나와 은우의 모습을 보더니 심통이 났는지 괜히 심술을 부린다. 


유민 : 엄마 보고 싶다고!! ㅡ.ㅡ+


아빠 : 응. 유민이가 엄마 보고 싶구나. 

아빠도 엄마 보고 싶어..

근데 엄마 내일모레면 올 거야! 신나지? ^^


은우 : 아빠 몬~! 맥주 마시기!!


아빠 : 벌컥벌컥~

은우 몬~! 똥 싸기!!


은우 : 뿌직 뿌직.


아빠 : 유민 몬!! 방귀 뀌기!


유민 : 하지 말라고!! ㅡ.ㅡ+


아빠 :.... 알았어..ㅜㅜ


오늘도 5살짜리 딸에게 꼼짝 못 하는 아빠다.





하지 말라고!! ㅡ.ㅡ+






아이들에게 아침으로 뭐 먹겠냐고 물어보니 은우는 우유에 설탕을 타서 달라고 한다. 유민이는 아침 안 먹겠다고 하더니 소파에 다시 드러누웠다. 어제저녁을 많이 먹고 자서 배가 안 고픈가 보다. 우유를 냄비에 데워서 설탕을 타서 은우랑 유민이에게 한잔씩 줬다. 





까칠한 유민이.





오늘은 은우 진료가 있는 날이라 아침에 일찍 병원에 들렀다가 어린이집에 등원하기로 했다. 은우는 오래간만에 어린이집에 갈 생각에 들떴는지 진작에 옷을 갈아입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반면 유민이는 여전히 뒹굴뒹굴. 



오전에 시간이 빡빡해서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었다. 결국 유민이 옷을 꺼내 입혀주고 신발까지 신겨주고 나서야 집을 나올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선방했다 싶었는데 갑자기 현관을 나서던 유민이가 멈춰 선다.


유민 : 아빠! 유민이 아침밥도 안 먹었잖아!


아빠 : 아까 아빠가 우유에 설탕 타서 줬잖아.


유민 : 아니! 그거 말고 아침밥!


아빠 : 아까 유민이 한테 물어봤을 때 안 먹는다고 그래서 아빠는 안 먹을 줄 알았지.


유민 : 아빠는 유민이가 배고팠으면 좋겠어? ㅡ.ㅡ+


아빠 : 에휴.. 유민이 뭐 먹고 싶어?

지금 늦어서 시간이 별로 없는데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거면 해줄게.


유민 : 그럼 초콜릿이라도 줘.


갑자기 왜 이리 성질을 부리나 싶었는데 초콜릿을 타내기 위한 큰 그림이었나 보다. 부엌 찬장을 열어보니 초코볼이 있어서 약병에 10개씩 담아서 나눠줬다. 그제야 마지못해 차에 타는 유민이. 아주 상전이 따로 없다.




오래간만에 하는 등원.




드디어 출발 하나 싶었는데 다시 유민이가 태클을 건다.


유민 : 아빠, 유민이는 왜 빨간색 안 줘? 오빠 꺼에만 빨간색 있잖아.


개수만 맞춰주면 될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보다. 


아빠 : 유민아 그거 색이 달라도 맛은 다 똑같아.


유민 : 그래도 유민이는 빨간색 먹고 싶어. 

유민이도 빨간색 주면 좋겠어.


오늘 내에 출발할 수 있을까. 마음속으로 화를 삭이며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데 은우가 나를 도왔다.


은우 : 아빠, 잠깐만. 내리지 말아 봐.

내가 유민이한테 빨간색 줄게.

유민아, 오빠가 빨간색 줄 테니 오빠한테 노란색 줄래? 바꾸자.


유민 : 응. 


아빠 : 다행이다..

은우야 고마워. ㅜㅜ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출발. 최근 은우가 축농증과 중이염이 심해서 지인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다. 마침 오늘 약도 다 떨어지고 상태도 확인할 겸 병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은우가 묻는다.


은우 : 아빠, 어제 해준 이야기 계속해줄 수 있어?

나 그거 엄청 재밌었는데.


아빠 : 뭐? 삼국지?


은우 : 응. '마을의 평화가 찾아왔다'까지 말해줬어.


아빠 : 그래. 그다음에 어떻게 되었냐면..


운전을 하면서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반동탁 연합군이 사수관 전투에서 화웅에게 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아빠 : 반동탁 연합군의 총대장은 원소였는데 화웅이라는 장군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었어

엄청 싸움을 잘하는 부하들이 다 화웅이랑 싸우다가 져서 죽고 말았거든.


은우 : 그럼 총으로 쏘면 되잖아.


아빠 : 응? 이때는 엄청 옛날이라서 총이 없던 시대였어. 

칼이나 창 같은 무기로 싸우던 시절이었어.


은우 : 아까 총대장이 있었다면서.


아빠 : 아.. 크크크크..

하하하하..


웃음이 빵 터진 나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 은우. 덕분에 크게 웃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를 하고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은우가 책을 읽어 달라며 가져왔다. 옆에 있던 유민이에게 책 같이 보자고 말을 걸었는데 본채도 안 한다. 병원에 있는 TV에 아주 푹 빠져 있는 유민이. 미디어에 대한 내성이 없는 아이들이라 그냥 어른 보는 드라마도 재밌나 보다. 그런데 TV를 보는 폼이 거의 자기 집 안방이다. 오늘도 민망함은 나의 몫이구나.





재밌니??





한참을 기다려 진료를 받았다. CT를 찍어서 확인해보니 다행히 많이 좋아졌다. 꽉 차 있던 부비동이 깨끗해졌다. 약을 4일 분만 더 먹고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정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1층에서 약을 사고 어린이집으로 출발하려는데 새봄이(은우 어린이집 담임교사) 에게서 문자가 왔다. 


‘언제 오시나요?’


시간을 보니 이미 10시가 넘었다. 마음이 급해져서 얼른 답장했다. 


‘은우 오늘 병원 좀 들르느라 늦었어요ㅜ 금방 갈게요..’ 



아이들과 함께 움직일 때는 시간을 맞추는 게 쉽지가 않다. 아무리 넉넉하게 여유를 잡아 두어도 항상 예측 못했던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미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하는 사실이지만 사실 내가 겪어보기 전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전 어린이집에서 매주 공동육아 교육을 받을 때 아이들을 터전에 맡기고 교육을 받으러 오는 부모들이 매번 늦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안 좋게 생각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아이들 때문에 시간이 촉박하면 조금 더 일찍 출발하면 될 텐데..’ 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그때의 내가 부끄러워졌다. 




어린이집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의 대화.


은우 : 아빠, 오늘 점심 먹고 낮잠시간 전에 데리러 오면 안 돼?


아빠 : 동생들 낮잠 잘 때 청어(7세)는 개원 잔치 포스터 붙이러 간다 했는데?


은우 : 그럼 그거 끝나고 바로 데리러 와.


아빠 : 그래. 그럼 은우 할 거 다 하고 새봄한테 가서 아빠한테 데리러 오라고 연락해달라고 해.


유민 : 아빠! 유민이는 점심 먹기 전에 데리러 와~


아빠 : 어? 지금 가면 거의 점심 먹을 시간인데??

그럼 가자마자 집에 가야 해.. ^^;;


유민 : 그래? 그럼 낮잠 자기 전에 데리러 와.


아빠 : 아빠 두 번 왔다 갔다 하면 너무 힘드니깐 

오빠 데리러 갈 때 같이 가자.


유민 : 알았어.





고구마 수확중.





결국 11시가 다 돼서야 보물섬에 도착했다. 텃밭 쪽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아서 뒤쪽으로 돌아갔는데 텃밭에서는 이미 고구마 캐기가 한창이다. 바람이 많이 불고 빗방울도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어서 아이들 겉옷을 입혀주고  차에 타려는데 사탕(어린이집 교사)이 나를 잡는다.


사탕 : 이제 출근하세요?


아빠 : 아.. 이번 주 휴가 냈어요.


사탕 : 그럼 같이 좀 캘까요?

이게 생각보다 많네요.


아빠 : 아... ^^;;

제가 일이 있어서.. 안녕히 계세요~! ;;;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얼른 밀린 집안일을 해치우고 좀 쉴 생각이었는데 막상 차에 타자마자 후회가 되었다. 좀 도와주고 올걸 그랬나. 오래간만에 내 시간을 가질 욕심에 생각 없이 행동했는데 집에 가는 내내 후회가 되었다. 애들이랑 같이 수확도 하고 흙을 만지면서 교감할 좋은 기회였는데.


후회는 되었지만 결국 차를 돌리지는 않았다. 오늘은 마당 잔디를 깎고 화단에 물을 줄 계획이었는데 어차피 비가 와서 못할 것 같다. 저녁거리나 사갈 요량으로 한살림에 들렀다. 오늘 먹을 족발이랑 토요일에 먹을 샤부샤부 재료들, 유민이와 약속했던 자연치즈를 샀다. 생굴이 있길래 굴도 한 통 샀다.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막상 샤부샤부용 소고기를 사지 않았다. 가끔 아내가 이럴 때 옆에서 핀잔을 줬었는데.. 막상 내일이 되니 한없이 너그러워진다. 그래.. 정신이 없으면 실수도 하고 그런 거지. 그래도 당장 먹을 건 아니니깐 다행이네. 


아내에게도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걸.




소고기를 안 사 왔다. 





집에 오니 어느새 12시.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결혼 전 나는 꽤 오랜 시간 자취를 했다. 당시 나는 먹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요리하는 것도 좋아했기에 매 끼니를 독거남 치고는 제법 잘 차려먹었다. 하지만 내 몸하나 건사하면 될 때 와는 다르게 누군가를 케어해야 할 때는 의지력의 소모가 훨씬 심한 것 같다. 점심을 먹어야 하고 배도 고프고 냉장고에 재료도 많은데 이상하게 요리가 하고 싶지가 않다.


결국 라면을 꺼내서 끓여 먹었다. 결혼 후 점심을 대충 때우는 아내에게 잘 좀 차려먹으라고 몇 번 잔소리를 했었는데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정말 매 순간이 깨달음의 연속이다.




점심을 먹고 집 청소를 했다. 나름 휴가이긴 하지만 오래간만에 내 시간이 생기니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이 생겼다. 설거지를 해놓고 2층에 올라가서 운동을 하기로 했다. 오래간만에 인바디를 해보니 다행히 체중은 크게 변화가 없는데 근손실이 좀 있었고 내장비만도가 한 단계 올라갔다. 급 우울해졌다.


애들을 보면서 꾸준히 했던 운동도 못했고 무엇보다 먹는 문제가 컸다. 요리를 하다 보면 애매하게 남아 버리기 아까운 것들을 다 먹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평소보다 먹는 양이 늘었다. 엄마들이 체중조절이 쉽지 않은 이유가 잔반 때문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평소 아내에게 했던 무신경한 말들이 생각났다. 


‘자기야, 남은 건 그냥 버려~ 그걸 왜 다 먹어.. 아깝다고 억지로 먹는 게 오히려 버리는 거보다 더 안 좋아~’ 




운동을 하는데 머리가 지끈거려서 생각해보니 오늘 커피를 한 잔도 못 마셨다. 우리 집은 자동 커피머신을 쓰는데 전원을 켜면 1분 정도 예열시간을 거쳐 사용 가능한 상태가 된다. 이후 아무 조작도 하지 않고 20분가량 두면 저절로 전원이 내려가게 된다. 오늘 아침, 나는 커피를 마시려고 전원을 켜고 머신이 예열되는 사이 아이들을 챙기다 보니 커피를 내리는 걸 깜빡했다. 잠시 뒤에 가보니 전원이 꺼져있어 다시 전원을 켰다가 또 정신없이 바쁜 통에 커피 내리는 것을 깜빡. 이 과정을 세 번 정도 반복하고 나서 최종적으로는 아예 머릿속에서 커피가 사라진 상태로 집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오전에 두 잔 정도는 마셔줘야 되는데.. 카페인 금단증상에 의한 두통 인가보다. 간단히 운동을 마치고 씻고 나와서 커피를 내리려다가 그냥 근처 찻집으로 갔다. ‘애월 맛차’라는 찻집인데 집에서 가깝고 직접 재배하는 찻잎을 사용해서 차도 맛있다. 무엇보다 주인 분들도 친절하셔서 오전 근무만 있는 날에는 아내와 같이 와서 책을 보고 공부를 하는 단골집이다.





집 근처 찻집.





커피를 시켜놓고 책과 아이패드를 꺼내놓고 일기를 썼다. 이번 주 내내 짬이 나면 보려고 책을 들고 다녔는데 아직 한 페이지도 못 읽었다. 한참 집중해서 일기를 쓰는데 새봄한테 전화가 왔다. 은우가 할 일 다 했다고 데리러 오라고 했단다. 자리를 정리하고 짐을 챙겨서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결국 오늘도 책은 한 페이지도 못 봤다.




보물섬.





어린이집에 도착해보니 둘 다 아주 신났다. 그냥 월요일부터 어린이집을 계속 보낼걸 그랬나. 유민이 겉옷이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유민이에게 옷 찾아오라고 했는데 유민이는 노느라 정신이 없다. 


아빠 : 은우야, 미안한데 유민이 잠바 좀 찾아줄 수 있어?


은우 : 응! 내가 검색로봇 만들었어!

자 검색 시작합니다!


은우는 나무젓가락을 이어서 만든 검색로봇을 한 손에 든 채로 유민이의 겉옷을 찾았고 잠시 후 유민이의 옷을 들고 자신만만하게 나타났다.


아빠 : 와. 검색로봇 장난 아니다.

고마워 ^^


은우 : 그렇지? 내 검색로봇이 최고라니까!




검색로봇.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에 붙여놓은 계획표를 보는 아이들. 



은우 : 아빠, 오늘 이날이야? 족발 먹는 날?


아빠 : 응. 이따가 고기 써는 것 좀 도와줘.



애들끼리 놀게 놔두고 요리를 시작했다. 쌀을 씻어서 올려놓고 미리 불려 놓은 미역을 볶아서 멸치육수에 미역국을 끓였다. 낮에 사 온 굴을 씻어서 미역국에 절반을 넣고 나머지는 굴전을 해 먹으려고 했다. 전을 부치려고 준비하고 있는데 얼마 전 아내가 내 일기를 보고는 냉동실에 빵가루 있었다고 연락해준 게 기억이 났다. 냉동실을 한참을 뒤져서 빵가루를 찾아냈다. 덤으로 냉동새우도 찾았다. 애들은 새우튀김 해주고 나는 굴튀김 해서 먹어야지.




새우튀김
굴튀김





한창 요리를 하고 있는데 은우랑 유민이가 또 싸우기 시작한다. 서로 치고받고 아주 난리가 났다. 폭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되는 건가. 아이들끼리의 다툼을 마냥 두고 보면 역효과가 나는 건가. 다시 고민이 되었다. 나중에 둘 다 기분 좋을 때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새우를 튀기고 있자니 고소한 냄새를 맡고 아이들이 달려왔다. 그 짧은 사이에 둘은 화해를 했는지 다시 깨가 쏟아진다. 


은우 : 똘똘이~ ^^

(은우가 부르는 유민이 애칭)


유민 : 응~ 오빠~ ^^


아빠 : 야, 니들 잘 왔다.

온 김에 아빠 좀 도와줘.

식탁에 족발 꺼내 놓은 거 좀 썰어줄래?

각자 먹을 만큼만 썰어서 그릇에 담으면 돼.

뼈 있는 거는 아빠가 미리 잘라놨으니까 먹고 싶은 사람 먹고.


은우 : 나 이거 자른 거 하나 먹어도 돼?


아빠 : 썰면서 먹고 싶으면 먹어.

아빠가 새우튀김 하고 있으니까 튀김 먹을 배는 남겨두고.


아니나 다를까 유민이는 써는 족족 입으로 들어간다. 먹는 거 반, 접시에 담는 거 반이다.





족발 썰기.





새우튀김, 굴튀김, 굴 미역국, 한살림 훈제족발까지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이 메뉴에 술을 안 먹으면 범죄인데.. 이상하게 술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냥 맨 정신에 피곤하지 않은 상태로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좋겠다. 


아이들이랑 지낸 지 아직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자유시간을 갈망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평소 아내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좀 줄걸.. 





요렇게 차려놓고 술을 안먹다니.




새우튀김에 대한 애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아빠 : 새우튀김 아빠는 아직 안 먹어봤는데.

어때? 먹을만해?


은우 : 최고! 식당에서 먹는 거랑 맛이 똑같아.


아빠 : 더 맛있는 건 아니고?


은우 : 음.. 더 맛있어..


뭐가 부끄러운 건지 몸을 배배 꼬며 말하는 은우. 유민이는 튀김보단 족발이 맛있는지 뼈를 뜯느라 정신없다. 




족발 대장.




아빠 : 잘 먹네. ^^

유민이는 무슨 대장이야?


유민 : 족발 대장!


아빠 : 응. 그렇지? ^^;;

아빠도 족발 좋아하긴 하는데 유민이 처럼 완벽하게 발가락 뼈까지 다 발라먹지는 못해. 흐흐.


유민 : 아빠, 유민이가 왜 족발 좋아하는지 알아?


아빠 : 족발 대장이라서?


유민 : 맛있어서.


아빠 : 아... ^^;;


은우 : 나도 족발 대장이거든!


유민이를 칭찬하자(칭찬인가? ^^;;) 질투가 난 은우가 뼈를 잡고 도전을 했다. 하지만 껍질에 붙어있는 하얗게 응고된 돼지기름을 보니 차마 먹지 못하고 포기를 선언했다.


은우 : 아빠.. 이거 하얀 거 뭐야..

난 이거는 못 먹겠어.


아빠 : 아.. 그거 돼지기름이 굳은 거야.

기름이 굳으면 하얗게 되거든.


유민 : 어!! 그거 기름!! 유민이 정말 좋아하는 건데!


은우 : 이거 뼈 아빠 먹어.


아빠 : 아빠는 굴튀김 먹을 건데..


유민 : 그거 유민이 먹을래!!


은우 : 절대 안 돼! 아빠가 먹어. 아니면 그냥 내가 먹을래.


자기가 먹지는 못하면서 유민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 또 못 보겠는 은우. 은우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면 그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괜히 얄밉다.


아빠 : 그래. 그럼 아빠가 먹을게. 고마워.

근데 굴튀김이 진짜 예술적으로 맛있는데..

은우는 굴을 못 먹으니 이 맛을 못 보여주는 게 아쉽다.


아닌 게 아니라 어패류를 싫어하는 은우는 굴 미역국도 못 먹겠다고 했다. 반면 유민이는 미역국에 밥을 말아서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족발도 꽤 많이 먹었다.


아빠 : 유민이가 족발 대장 맞네. ^^;;

근데, 아빠는 무슨 대장이야?


은우 : 커피 대장이지.


아빠 : 근데 아빠 오늘 정신없어서 커피도 못 마셨어.

엄마가 진짜 힘들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라.


유민 : 엄마 보고 싶다ㅠㅠ


아빠 : 아빠도ㅜㅜ

그래도 이제 이틀만 지나면 올 거야, 신나지? ^^


엄마 이야기를 괜히 꺼냈나. 엄마 이야기가 나오자 은우는 급격하게 입맛이 떨어진 것 같다. 입에 넣은 밥을 삼키지도 못하고 애꿎은 밥만 뒤적거리는 은우.


아빠 : 은우야. 아빠가 미안해.

밥이 잘 안 넘어가지?

엄마 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알아.

근데 엄마는 즐겁게 여행 간 거고 우리도 재밌게 지내고 있잖아. 

아빠는 은우가 어제처럼 체할까 봐 걱정이 많이 돼.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자.



같이 있을 때는 하루도 빠짐없이 싸우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엄마 이야기만 나와도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은우다. 결국 밥을 물에 말아서 깍두기를 올려서 먹였다. 시무룩한 은우에게 밥을 먹여주는데 어린 시절 내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거 같아 괜히 짠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제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을 주고는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렸다. 시계를 보니 7시 반. 아이들은 밥을 잘 먹어서 배가 불렀는지 오늘도 아이스크림을 남겼다. 예전에는 배가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간식은 꾸역꾸역 다 먹었는데. 애들도 어느 정도 자기 결정권을 줄 때 스스로 조절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이퍼 모드 발동!!





은우는 아이스크림을 먹고는 다시 기분이 좋아지다 못해 하이퍼 상태에 빠졌다. 쿠션 위에 올라가서 균형을 잡는다고 오두방정을 떨더니 기어고 무릎으로 쿵 소리가 나게 떨어졌다. 아파서 말을 잇지 못하는 은우. 그래도 혼자 다친 거라 그런지 울거나 하지는 않는다. 한참을 아파하던 은우가 툴툴 털고 방으로 들어가면서 하는 혼잣말을 듣고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은우 : 나는 왜 자꾸 이렇게 흥분하는 거지....





애들이 양치를 하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께서 귤을 가지고 오셨다. 요새 매일 같이 오셔서 과일을 주고 가신다. 아이들을 보더니 “엄마는 어디 갔어? 엄마 보고 싶지?” 하고 물어보시는 할머니. 뭔가 이상한 오해를 하고 계신 건 아닌가 모르겠다.. ^^;; 가져오신 바구니에 사과를 몇 개 담아서 드렸다.




쌓여가는 과일들.





잘 준비를 마치고 8시쯤 방에 누웠다.



아빠 : 얘들아, 아빠가 할 말 있어.

아빠가 아까 너희들 싸우는 거 보니깐 폭력이 평소보다 더 심하던데.

폭력을 쓰면 안 되는 건 다들 알잖아. 그렇지?


은우 : 응.


아빠 : 아빠는 너희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거든.

근데 오늘 보니깐 어째 점점 심해지고 참으려는 노력도 없이 폭력부터 쓰는 거 같아서.

아빠가 폭력 쓸 때 혼내거나 해야 되나 싶어.


은우 : 그냥 놔둬.

어차피 우리는 맨날 싸우거든.


아빠 : 싸우는 건 괜찮아.

근데 폭력이 점점 심해지는 게 걱정이야.

아빠도 어릴 때 맨날 싸웠어.

근데 폭력을 쓰거나 하지는 않았어.

지금도 아빠가 아무리 화나도 폭력을 쓰거나 소리 지르거나 하지는 않잖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어.

너희들이 지금 화날 때 폭력 쓰는 게 버릇이 될까 봐 그게 걱정인 거야.


은우 : 어른되서도 막 폭력 쓰고?


아빠 : 응.

반대로 생각하면 화나도 폭력보다는 말로 해결하는 버릇을 들이면 어른이 되어도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우리 폭력 쓰면 작은 벌칙 같은 거라도 받도록 해볼까?

벌칙은 너희들이 생각해봐.


유민 : 놀이방에 못 들어가기.


은우 : 돈 백만 원 주기!


아빠 : 은우야, 아빠가 중요한 이야기 하고 있는 거야. 

장난하지 말고 잘 생각해보자.


은우 : 자기 전에 책 안 읽기?


아빠 : 그것도 괜찮네.

근데 너무 약해. 차라리 폭력 쓴 날은 아빠랑 못 놀기는 어때?


은우 : 그건 절대 안 돼!


아빠 : 왜. 폭력 안 쓰면 되잖아.

은우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아빠가 볼 때 은우는 보통의 7살보다 참는 힘이 말도 안 되게 강한 아이야.

어쩔 때는 어른보다 더 나을 때도 있거든.

은우가 아마 약속을 잊지 않고 항상 염두에 두면 분명 잘할 수 있을 거야. 

아빠는 은우를 믿어. 


은우 :... 알았어.



사실 은우가 먼저 폭력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항상 먼저 주먹이 나가는 건 유민이 이고 은우는 그에 대한 앙갚음을 더 과격한 폭력으로 표현할 뿐이다. 당연히 유민이에게 잔소리를 해야 맞는 거지만 아직 내 안에서 유민이는 그냥 말이 안 통하는 아기라서 어떻게 말해야 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반면 은우는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이자 분신 같은 존재라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없이 은우에게만 더 많은 요구를 하고 짐을 맡기게 된다. 



언제쯤이면 유민이가 말이 통할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부엌에서 갑자기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울렸다. 화재경보 긴가 싶어서 깜짝 놀라 얼른 가보니 냉장고에 붙어있는 요리 타이머가 울리고 있었다. 


유민 : 심한 장난~~!! 크크!!

유민이가~ 심한 장난~ 했지요~~!! 크크!!


유민이가 몰래 타이머를 맞춰놨나 보다. 우리 집 족발 대장은 오늘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인다. 항상 본능과 감정에 충실한 유민이. 진짜 언제쯤 말이 통할 런지 모르겠다. ^^;;





깔끔하게 청소 완료!




8시 반에 재웠다. 선방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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