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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 Nov 02. 2019

<2화. "개미와 베짱이">

독박육아 프로젝트 '아내에게 휴가를!'


2019-10-20, 일요일


독박 육아 프로젝트 둘째 날의 기록입니다.





어젯밤 곤히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나름 가사와 육아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생각이었다. 불과 반나절이었지만 독박 육아는 생각보다 힘들었다. 역시 사람은 입장 바꿔서 겪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다. 가장 놀랐던 사실은 생각보다 개인적인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잠든 뒤 집을 정리하고 빨래를 돌리고 나니 10시가 넘었다. 부랴부랴 일기를 쓰고 업로드를 하고 나니 진이 다 빠진다. 아직 잘 때까지 시간이 약간 남아있기는 했지만 지쳐서 도저히 아무것도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편하게 일하고 공부하면서 온전한 내 시간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에 시간을 쪼개서 책을 보고 영어공부를 하는 아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테크 공부를 시작한 뒤 한 번씩 아내에게 책을 같이 보자며 은근히 압박을 넣었던 것이 맘에 걸린다.




간밤에 유민이는 생각보다 잘 잤다. 새벽 1시쯤 일어나서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아침인 줄 알았는지 아침밥을 달라는 유민이. 아직 새벽이니 조금 더 자고 일어나서 먹자고 했다. 유민이는 그럼 물이라도 달라고 하더니 그대로 다시 잠들었다. 자나보다 싶어서 옆에 누워서 자려고 했는데 한 오분 정도 있다가 유민이가 갑자기 일어나서 버럭 화를 낸다.


유민 : 아빠! 유민이가 물 가져 다 달라고 했지!

ㅡ.ㅡ+


아주 상전이 따로 없다. 따뜻한 물을 한잔 떠다 주고 재워놓고 방으로 와서 나도 잠을 청했다.




기온이 많이 떨어졌는지 아침에 일어나니 추웠다. 목도 안 좋고 몸도 으슬으슬. 애들 방에 가서 은우랑 유민이 사이에 끼여 있으니 참 따뜻하고 좋았다. 잠깐 잠이 들었나, 유민이가 나를 깨웠다.


유민 : 아빠, 아침밥 줘.



아직 7시밖에 안됐는데.. 어제저녁이 좀 부족했나.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니 미숫가루를 달라는 유민이. 냉장고를 한참을 뒤져서 겨우 미숫가루를 찾아 우유에 타 줬다. 유민이는 미숫가루를 먹으며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유민 : 아빠, 유민이 아까 잘 때 꿈꿨는데 아빠가 나왔어.

아빠가 유민이 사랑해하고 안아주고 그랬어.


아빠 : 응. 유민이 좋았겠네 ^^




미숫가루




미숫가루를 몇 숟가락 먹더니 유민이는 갑자기 배가 아프다며 드러누웠다.


아빠 : 유민아, 배 아파? 화장실 갔다 올까?


유민 : 아빠! 그게 아니고! 배가! 아프다고!

ㅡ.ㅡ+



하트를 뿅뿅 쏘아대던 눈빛은 어디 가고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버럭 화를 낸다. 유민이의 감정 변화는 도통 종잡을 수 없다.


아빠 : 아, 유민이가 배가 아팠구나?

(먹기 싫다는 말이구나..)

그럼 그만 먹고 소파에 좀 누워있을래?



우리 집에는 하귀 하나로마트에서만 파는 유민이 전용 미숫가루가 따로 있는데 내가 타 준 미숫가루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어제 사온 망고라도 썰어주려고 망고를 꺼냈다.


망고 썰기



제법 먹을만하다.




귀신같이 망고 소리를 듣고 방문을 열고 나오는 은우.


은우 : 아빠, 잘 잤어?

나도 망고 먹을래!!! 망고 망고! 예~!



신나서 오두방정을 떠는 은우. 망고는 썰어놓고 보니 양이 제법 된다. 당도도 좋고 전반적으로 2만 원의 값어치는 하는 것 같다. 은우는 어제 먹다 남긴 미쯔를 우유에 타 먹고는 망고도 한 사발 배불리 먹었다.




은우의 아침밥.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아이들과 하루 스케줄에 대해 약속한 것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침을 먹고 간단한 체조를 한 뒤 빨래를 개고 청소까지 마치고 하루 활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여러 번 이야기를 했던 것이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아이들. 요즘 은우랑 유민이 사이에서 핫한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곡에 맞춰서 신나게 춤을 추며 놀았다.




치키치키 차카차카 초코초코 촉!




노래 가사에 나오는 ‘손오공’에 대해서 물어보는 은우. 같이 수건을 개면서 ‘서유기’ 이야기를 해줬다. 흥미진진하게 듣는 아이들이다. 생각보다 애들이 재밌어해서 애니메이션이 나온 게 있으면 같이 보면 좋을 거 같아 찾아보니 볼만한 극장판 만화 영화가 있었다. 나중에 구해서 캠핑 갔을 때 보기로 했다.




개미와 베짱이 1




한참 이야기에 집중하며 빨래를 개다 보니 은우는 열심히 수건을 개는데 유민이는 소파에 누워서 농땡이를 부리고 있다.



아빠 : 유민아~ 오빠 좀 도와줄까?


유민 : 아니 그게 아니고~ 유민이 배 아프다니깐!


아빠 : 아 맞다! 미안~

(아까는 노래 틀어주니 잘만 뛰어 댕기더니.. ㅡ.ㅡ;)



우리 집에는 개미와 베짱이가 산다. 은우 개미와 유민 베짱이.




개미와 베짱이 2




빨래를 다 개어 놓고는 청소를 시작했다. 유민이가 자는 방, 은우가 노는 방, 나머지는 내가 맡아서 청소를 하기로 했다. 정리 박사 은우는 걸래까지 빨아서 깨끗하게 방을 닦는데 유민이는 거실에 누워서 뒹굴거린다. 한결같은 베짱이 유민이.



홍시




열심히 일을 했더니 당이 떨어졌는지 홍시가 먹고 싶다는 은우. 하나를 나눠서 은우랑 유민이에게 나눠주었다.



아빠 : 유민아, 혹시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라는 말 알아?


유민 : 아빠! 유민이 배 아프다고!

ㅡ.ㅡ+


아빠 : 그래.. (말을 말자..)




단 걸 먹어서 다시 기운을 차린 아이들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한 주간 밀려있던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기로 했다. 태풍으로 망가진 뒤, 한 달간 흉물스럽게 방치돼있던 야외 풀장도 겸사겸사 해체해서 버리기로 했다. 은우에게 풀장 해체를 부탁하고 다용도실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꺼냈다. 쓰레기를 차에 싣고 한참 뒤에 가보니 철과 플라스틱을 분리해서 가지런히 모아놓은 은우. 은우는 정말 일을 똑소리 나게 잘한다. 그리고 옆에 앉아서 블록으로 장난하고 있는 유민이. 어쩜 이렇게 한결같니.




개미와 베짱이 3



아빠 : 은우야! 대박!

너 진짜 일 잘한다!


나의 칭찬에 유민이도 질세라 말한다.


유민 : 아빠! 이거 봐 봐.

유민이가 몰펀(블록)으로 만든 마을이야~~


아빠 : 응.. 그래.. 잘 만들었네.

유민아 근데 오빠 좀 도와줄까?


유민 : 아빠! 유민이 배가 아프다니깐!

ㅡ.ㅡ+

아빠, 근데 모기들이 자꾸 유민이 한테 와서..

유민이 차에 있고 싶어..


아빠 : 그래. 차라리 그게 낫겠다 유민아... ^^;;




차에 쓰레기들을 차곡차곡 싣고 재활용 센터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이들과 나눈 대화.



아빠 : 얘들아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알지?

아빠는 너희들 보면 개미와 베짱이가 생각나.


은우 : 누가 개미야?


아빠 : 누가 개미 같아? ^^;;


유민 : 베짱이는 뭐야?


아빠 : 개미는 열심히 일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고, 베짱이는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 아이야.


은우 : 나는 개미네.


유민 : 유민이는... 개미야.

(양심은 있는지 머뭇거리는 유민이 ^^;;)


아빠 : 아빠가 볼 땐 아빠가 개미고 너희들이 베짱이 같은데?


유민 : 아빠! 그렇게 말하면 유민이가 기분이 안 좋아! ㅡ.ㅡ+


아빠 : 그래? 미안해.

그럼 우리 셋다 개미인 걸로 하자.

근데 아빠는 베짱이처럼 노래하고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센터에 도착해서는 은우가 도와줘서 수월하게 쓰레기를 버릴 수 있었다. 센터에 있는 분리수거 도우미 분이 은우가 분리수거를 하는 모습을 보며 칭찬을 하니 갑자기 유민이도 불이 붙어서 의욕적으로 분리수거를 했다. 아이들에게는 아빠의 칭찬보다 첨 보는 사람의 칭찬이 더 강력한 것 같다.




분리수거.




분리수거를 마치고 오는 길에 하나로마트에 들러서 미니 핫도그를 만들 핫케익 가루와 식용유를 샀다. 애들이 자두가 먹고 싶다고 해서 자두를 몇 개 집었는데 생각보다 비쌌다. 집에 와서 은우랑 유민이에게 놀고 있으라고 하고는 핫도그를 만들기 시작했다.



은우 : 아빠, 그 가게에 파는 것처럼 겉에 모래 같은 가루 있게 만들어줘~


아빠 : 응, 안 그래도 그렇게 만들려고 했어.

바삭바삭 맛있겠다. 그렇지? ^^



집에 빵가루가 있는 줄 알고 핫케익 가루만 사 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빵가루가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 빵가루를 찾던 중 집에 핫케익 가루가 있는 걸 발견했다. (설상가상 한살림 핫케익 가루다.) 으아...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한 게 저 멀리 바다 건너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자기야~ 한살림 밀가루랑 핫케익 가루랑 싱크대 아래에 있다고 했잖아. 왜 또 사 왔어~ ㅡ.ㅡ+’ (이 일기만 아니었으면 부지런히 먹어서 증거인멸을 했을 텐데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결국 빵가루는 찾지 못했다. 다시 마트에 가기도 귀찮아서 그냥 은우에게 양해를 구하고 폭신한 일반 핫도그로 만들기로 했다. 핫도그가 기름에 튀겨지면서 고소한 냄새가 풍기자 놀고 있던 은우와 유민이가 와서는 구경한다. 둘 다 연신 ‘와! 진짜 맛있겠다!’를 연발한다. 핫도그 더미에서 하나씩 집어서 줬다.



아빠 : 먹으면서 구경해.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은우 : 아빠! 진짜 맛있어!

이건.. 상상도 못 하는 맛이야!


(이런 말은 어디서 배우는 걸까...)



미니핫도그





반죽이 좀 남았는데 버리기 아까워서 길게 늘어뜨려서 튀겼다. 구불구불한 모양을 보니 유민이가 말한다.



유민 : 아빠, 이거 핫도그 내장이야?


아빠 : 응.. 하하하.. ^^




뒤틀린 황천의 핫도그 내장 튀김



핫도그도 차곡차곡 담아서..



도시락통에 핫도그와 자두를 담아서 가방에 넣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

오늘의 미션은  ‘가고 싶은 곳’은 꿈 바당 도서관, ‘먹고 싶은 것’은 미역국과 케이크다.



오늘도 유민이의 패션은 한여름이다. 오늘 유민이의 코디는 은우였다. 사실 말이 좋아 코티지 옷 꺼내기 귀찮아서 옷도 안 갈아 입고 바닥에서 뒹구는 유민이를 보고 얼른 나가고 싶어 답답한 은우가 옷을 손수 꺼내 입혔다. 그래,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는 거지.




도서관까지 가는데 유민이가 연신 하품을 한다. 확실히 요즘 잠이 부족하다. 낮잠을 좀 자긴 해야 되는데..


은우 : 아빠, 유민이가 자꾸 하품해.


아빠 : 응, 유민이가 피곤한가 봐.


유민 : 아니야, 좁은 차에 세명이 있어서 공기가 부족해서 하품이 나오는 거야.


얼마 전에 읽은 책에 하품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애들은 참 기억력이 좋은 것 같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도서관에 가는 길. 흥에 겨워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필에 꽂혀 급 열창을 시작했다. 아내 없이 아이들과 차를 타고 갈 때면 한 번씩 목청껏 열창을 하는데 이걸 아이들이 참 재밌어한다. 특히 은우는 동요를 락버전으로 부르는 걸 좋아해서 몇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하기도 한다. 오늘은 노래를 부르다 보니 ‘유리의 성’이라는 옛날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 가만히 듣던 은우가 관심을 보인다.


은우 : 아빠, 지금 부른 거 무슨 노래야?


아빠 : 아.. 이거? 왜? 좋아? ^^;;

유리의 성인가? 옛날에 인기 있었던 노래야.


은우 : 한번 들어보고 싶어. 찾아서 틀어줄 수 있어?



은우랑은 노래 취향도 비슷한 것 같다. 마침 도서관에 도착한 참이라 나중에 집에 갈 때 듣기로 하고 내렸다. (이때는 이 노래가 나중에 큰 싸움의 불씨가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도착!




날씨는 화창했지만 꿈 바당 도서관 쪽은 그늘이 많아 약간 쌀쌀했다. 아이들 겉옷과 유민이 긴바지를 챙겨가길 잘했다. 은우는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조밤을 주으러 다녔다. 유민이는 놀이터에서 좀 놀더니 누가 베짱이 아니랄까 봐 벤치에 드러눕는다. 저 멀리서 은우가 열심히 조밤을 줍는 모습을 보며 벤치에 앉아서 유민이랑 조밤을 까먹었다. 조밤은 은우가 참 좋아하는 간식인데 나는 오늘 처음 먹어봤다. 생각보다 달달하니 맛있었다. 우리 애들은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와는 달리 자연 속에서 자라는 것 같아 흐뭇했다.




꿈바당 도서관




개미와 베짱이 4



조밤. 달달하니 맛있다.




한참 뒤에 돌아온 은우는 주머니 한가득 조밤을 주워왔다. 자랑스럽게 주머니를 흔드는 은우. 유민이는 은우가 다람쥐 같다며 좋아했다. 아빠가 볼 땐 개미 같은데 ^^;;



점심시간이 되어서 싸온 도시락을 꺼내서 먹었다. 은우는 엄청 먹어댔는데 유민이는 노는데 집중하느라 생각보다 적게 먹었다. ‘핫도그 내장’도 의외로 인기가 많았다.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나서는 도서관 안에 들어가서 책을 읽었다. 목 상태가 어제보다 더 안 좋은 상태라 가는 길에 미리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빠 : 얘들아, 아빠가 목이 많이 안 좋아서 오늘은 책을 많이 못 읽어 줄 거 같아.

자꾸 기침도 나오고 목이 너무 아파.


유민 : 아빠, 목 괜찮아? 막 피 나올 거 같아?


은우 : 아빠, 근데 짧은 책은 읽어줄 수 있지? ^^


(이게 바로 아들과 딸의 차이다.)




한글은 모르지만 책 보는 걸 좋아하는 유민이.




책을 한참 보다가 집에 갈 시간이 되어서 도서관에서 나왔다. 유민이는 많이 졸리고 피곤했는지 배가 아프다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민이를 안아서 가려고 하는데 은우가 왜 유민이만 안아주냐며 항의를 한다. 순간 '동생이 지금 아프다는데 오빠가 돼서 그거 하나 이해 못해주니?'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고쳐 먹었다. 이런 상황을 잘 풀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은우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고 은우의 특징을 이해해야 한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하고 지친 은우의 입장에서는 유민이만 안아주면 불공평하게 느낄만하다. 그리고 은우는 남자아이의 성격적 특성상 공감능력이 약한 거지 나쁜 의도가 있어서 유민이가 아픈 걸 무시하는 게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화가 났던 마음이 가다듬어졌다.



아빠 : 그래. 유민이만 안아서 차까지 데려다주면 은우가 섭섭하겠지?

근데 아빠가 지금 짐이 많아서 둘을 동시에 안아줄 수는 없어.

그리고 유민이를 먼저 차에 데려다주고 와서 은우를 안고 가면 중간에 은우랑 유민이가 혼자 있어야 되잖아.


은우 : 그래서 유민이만 안아준다고?


아빠 : 아니, 아빠는 은우가 섭섭하다고 느끼는데 양보를 억지로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은우 : 그럼 어떻게 할 건데?


아빠 : 같이 생각해보자.

아빠 생각에는 유민이가 힘들어도 차가 바로 저 앞에 있으니까 충분히 걸을 수 있는 거리거든.

유민이를 잘 설득해서 같이 걸어가면 좋을 거 같아.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갑자기 유민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차까지 달려가기 시작한다. 언제 아팠냐는 듯 훨훨 나는 유민이. 차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몇 번을 왕복해서 달린다.


유민 : 아빠! 유민이 엄청 빠르지!


(유민이는 진짜 알다가도 모를 아이다 ^^;;)




지쳤는지 잠들었다.



차에 타자마자 ‘유리의 성’을 틀어달라는 은우. 노래를 들으면서 가고 있는데 룸미러로 보니 유민이가 눈이 풀린 게 곧 잠이 들 것 같다. 낮잠을 재울 절호의 기회다. 드라이브라도 하면서 차에서 좀 재워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유민이가 잠결에 노래가 시끄럽다며 짜증을 낸다. 나는 유민이를 재울 생각에 반사적으로 볼륨을 낮췄다. 근데 이 행동이 은우의 질투심을 자극할 줄이야.



은우 : 왜 유민이 말만 들어줘?

나는 노랫소리가 작아서 안들 린단 말이야.


아빠 : 유민이가 많이 피곤해서 좀 재워야 될 거 같아.

유민이 잠들면 조금 크게 해서 듣자.


은우 : 흥. 아빠 미워.



은우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에서는 그게 아닌가 보다. 사실 은우도 요새 중이염 때문에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었고 오늘 피로가 누적되어 많이 예민한 상태이다. 뾰로통해 있는 은우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빠 : 아빠가 유민이 낮잠 재울 생각에 머리가 꽉 차서 은우 생각을 못한 거 같아.

생각해보니 소리 줄이기 전에 은우한테 먼저 물어봤어야 되는데. 미안해.


은우 : 말하지 마.


아빠 : 응?


은우 :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말하라고.



좋게 좋게 대화로 풀어가려 했는데 은우가 저렇게 나오니 순간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운전대를 꽉 잡고 심호흡을 했다. ‘그래, 은우가 지금 사춘기라고 생각하자. 나중에 진짜 사춘기가 왔을 때 단절되지 않으려면 지금 잘해야 해.’



아빠 : 그래.. 은우야.

아빠도 명상하면서 조용히 운전할 테니 은우가 나중에 기분이 좀 풀리면 말해줘.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은우 :.... (무시)



한참을 가는데 은우가 말을 꺼낸다.


은우 :...... 케이크 사러 가고 싶어.


아빠 : 응? 은우야, 아빠 못 들었어. 뭐라고 했어?


은우 : 아, 진짜... 케이크 사러 가고 싶다고!

ㅡ.ㅡ+


아빠 : 은우가 아직 기분이 안 좋은 거 같네?

아빠가 근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은우한테 도움이 될만한 말이 생각이 났어.

아빠는 요새 엄마 입장을 겪어보니 느끼는 게 많거든..

그리고 은우가 잘 모르겠지만 아빠는 항상 은우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해.

은우도 한번 아빠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떨까?


은우 :........


아빠 : 한번 은우가 아빠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는 거야.

그러면 아빠가 은우 마음을 알아주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예상치도 못하게 저 한마디로 은우의 기분이 마법처럼 풀렸다. 결국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은우에게는 이해와 존중이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키워드였다.


은우가 평소 자신의 감정이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관심을 가져주고 존중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은우의 마음이 열린 것이다. 



때마침 그 순간 자다가 깬 유민이가 벨트가 불편하다며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다.


유민 : 벨트~!! 벨트 불편하다고!! 엉엉엉.. ㅜ.ㅜ


순간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은우가 먼저 반응했다.


은우 : 유민아~ 조금만 참아, 이제 거의 다 왔어~

우리 저기 가서 케이크 사서 먹자~ 알았지?



은우가 유민이의 짜증에 똑같이 짜증으로 대응할 줄 알았는데.. 은우는 존중을 받자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도 알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은우에게 엄지손가락을 척! 하고 내밀었다.


누구도 완전히 입장을 바꿔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100% 이해할 수 없다. 은우를 이해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은우에게 엄지를 내밀며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뭔가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은우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으려나.




우여곡절 끝에 케이크를 사러 빵집에 왔다. 울고불고 떼를 쓰던 유민이는 빵집에 가더니 기분이 금방 좋아졌다. 낮잠의 효과겠지. 약속대로 조각 케이크를 하나씩 사서 가려고 하는데 은우가 자꾸 미키마우스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한다. 나는 은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아빠 : 이게 참 먹고 싶게 생기긴 했다, 은우야.

근데 약속한 것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케이크가 너무 비싸.

조각 케이크를 10개 넘게 살 수 있는 가격이고 심지어 내일 우도 갈 때 차를 가지고 들어가는 배값보다 비싸.


은우 : 진짜? 알았어.


아빠 : 혹시 다른 거 먹고 싶은 빵 있으면 하나 사서 아침으로 먹자.


은우 : 응. 괜찮아. 케이크 사서 집에 가자.


유민 : 그럼 유민이는 이거!


정작 은우는 더 안 사도 된다고 하는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시지빵을 고르는 유민이. 언제나 한결같은 유민이다.




평소에는 못 먹는 프랜차이즈 빵.




집에 와서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놓고 셋이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목욕을 했더니 피로가 좀 풀리는 것 같다. 애들도 덩달아 컨디션이 좋아졌다. 탄력을 받아 바로 저녁 준비에 돌입했다.



목욕으로 회복!



은우가 주워온 조밤.




저녁에는 미역국을 끓이는 법을 가르쳐 줬다. 서로 하겠다고 싸울까 봐 애초에 냄비를 두 개를 놓고 각자 먹을 건 각자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소고기를 볶던 유민이는 5분도 안돼서 흥미를 잃고 주저앉았다.



아빠 : 유민아~ 다했어?

조금 더 익히면 좋을 거 같은데?


유민 : 아니, 유민이 다리 아프고 배 아파서 못 서있겠어..


아빠 : 그래.. 그럼 오빠한테 잠깐 도와달라고 하자.



결국 유민이 냄비까지 맡아서 요리를 하는 은우. 그리고 세상 편한 자세로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유민이. '유민아.. 나중에 꼭 너희 오빠 같은 사람 만나라. 꼭.'




미역국 끓이기.



한참을 요리하던 은우가 말한다.


은우 : 아빠, 근데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


아빠 : 응? 갑자기 왜?

(유민이 같은 여자 만나서 힘들게 일하면서 살까 봐?)


은우 : 아이를 낳고 싶지 않고 그냥 아빠랑 계속 살고 싶어.


아빠 : 음.. 은우가 결혼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꼭 해야 하는 건 아니야.

근데 아빠랑 계속 같이 살지는 못해.

은우가 어른 되면 아빠는 엄마랑 둘만 살고 싶어.


은우 : 나도 알아.

그냥 결혼하면 부끄부끄 하다고..


(뭔 소리냐...^^;;)




맛있었다.




대충 끓여도 오래 끓이면 맛있는 게 미역국이다. 한참을 팔팔 끓였더니 제법 맛이 괜찮다. 아이들도 만족했는지 엄지 척!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면서 아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유민 : 배가 아팠다가~ 안 아팠다가~


은우 : 유민아 잠깐 누워봐.

여기 누르면 아파? 여기는?


유민 : 어? 근데 방귀 뀌었는데 왜 팬티가 젖었지?


은우 : 어? 봐봐?

아빠!! 유민이 음식 같은 똥이 나왔어!!



유민이가 하루 종일 배가 아프다고 하더니 진짜 설사를 조금 했다. 이럴 수가, 배가 아픈 게 진짜였나 보다. 미안해.. 유민아..


일단 열도 없고 변을 보고 나서는 배 아픈 게 없어졌다고 해서 좀 두고 보기로 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더니.. 애들이 아프다고 하면 좀 신경을 써서 봐야겠다.



오늘은 엄마의 생일이다. 유민이가 다시 컨디션이 좋아졌기에 아이들과 ‘엄마 없는 엄마 생일파티’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근처에 낚시하러 왔다가 고기를 좀 잡았는데 가져다준다는 연락이었다. 집 앞에 가서 생선 좀 받아오겠다고 했더니 기어코 같이 가자는 아이들. 산책도 할 겸 해서 같이 나왔다.




내복 군단 출동!




집 근처 큰 길가 도로에서 길가에 핀 꽃 들을 따서 꿀을 빨아먹고 귀걸이를 만들며 노는 아이들. 나무에 거미줄을 치고 있던 다리가 하나 없는 거미가 거미줄에서 연신 미끄러지니 유민이는 힘내라며 응원을 시작했다. 큰 길가에서 내복만 입은 두 아이가 노는 모습을 지나가던 버스의 승객들이 흐뭇하게 바라보며 웃었다.




자연과 함께 노는 아이들.




기다림 끝에 지인분이 도착했다. 조황이 안 좋았다는 말과는 다르게 지인이 가져다준 생선은 엄청났다. 비닐봉지에 담아서 집까지 들고 가는데 팔이 아플 정도였다. 손질하는 게 보통일이 아닐듯하다. 일단 만사 제쳐두고 하려던 파티부터 하기로 했다.


케이크를 준비하고 막상 파티를 하려는데 집에 케이크 초가 없다. 결국 양초를 하나씩 앞에 두고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생일 축하합니다~”


촛불을 끄고 엄마에게 보내는 영상편지를 촬영했다. 장난으로 은우에게 “은우야~ 울어?” 했는데 평소 같았으면 배시시 웃을 녀석이 아무런 대꾸가 없다. 정말 울음이 나오려나 보다. 덩달아 유민이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누가 보면 한 십 년 떨어져 있는 줄 알겠다, 얘들아.. ^^;; 그나저나 머나먼 이국땅에서 미역국이나 챙겨 먹었는지 모르겠다. 아내 몫까지 열심히 먹어야지.




엄마 없는 엄마생일파티.





영상편지.





생일파티를 마치고 부엌으로 가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생선 손질을 시작했다. 비늘 벗기고 내장 따는걸 옆에서 꼭 보겠다는 유민이.


아빠 : 유민아, 아빠는 이거 하는 거 유민이가 안 봤으면 좋겠어.

유민이 물고기 좋아하는데 물고기 죽이는 거 보면 기분이 안 좋을까 봐 걱정돼.

그리고 혹시라도 안 좋은 영향을 줄까 봐.


은우 : 어떤 거?


아빠 : 아니, 왜 영화도 어른들만 보는 영화가 따로 있잖아. 잔인하거나 그런 거.

애들이 보면 마음에 나쁜 영향을 줘서 못 보게 하는 거잖아.


유민 : 아니야, 유민이는 보고 나서 눈을 이렇게 씻으면 괜찮아.


아빠 : 그래.... 눈을 씻으면 괜찮구나.. ^^;;

하긴.. 어떻게 보면 이것도 음식재료 손질하는 건데 뭐..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엄청크다..




은우는 안 보겠다며 저쪽으로 가버렸고 유민이는 머리를 들이밀고 뚫어져라 관찰한다. 한배에서 나왔지만 어쩜 이렇게 다른 둘이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유민이가 계속 보고 있자 은우도 궁금했는지 옆으로 왔지만 차마 제대로 보지는 못하고 먼산 보는 초첨 풀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생선을 다 손질해서 냉동실에 넣어놓고 이제 잘 시간이 왔다. 내일은 우도에 가기로 한날. 컨디션이 중요한데 둘 다 영 잘 생각이 없다. 그래, 아침에 늦게까지 자면 되지 뭐. 졸리면 이야기해달라고 하고 나는 일기를 쓰고 은우는 종이접기, 유민이는 그림을 그렸다. 셋이서 각자 할 일을 하니 나름 괜찮다. 한 시간가량을 그렇게 있다가 결국 둘 다 졸리다고 해서 방에 들어갔다.  매일 같이 자기 싫다는 아이들과 전쟁을 하는 게 일인데 그래도 자기 전에 각자 시간을 주니 재우는 게 한결 수월하다.




취침전 개인 정비.




은우도 유민이도 그리고 나도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라서 내일 일정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기대가 많이 된다. 여행 가는 기분을 한껏 맛보게 해 줘야지. 가능하면 애들이 원하는 대로 1박 하고 와도 좋겠다.


“그러려면 푹 자야 되는 거 알지? 잘 자라 개미와 베짱이~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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