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주 Nov 02. 2019

<0화. "프롤로그">

독박육아 프로젝트 '아내에게 휴가를!'


나는 두 아이의 아빠이자 지방의료원에 근무하는 의사다. 내가 일하는 병원은 입원환자들이 있는 병원이라 주 1~2회 정도 병원에서 당직근무를 해야 한다. 내가 병원에서 당직을 하는 날이면 아내는 집에서 독박 육아를 하게 된다. 육아에 지친 부모가 우스갯소리로 "차라리 일을 하겠어요"라고 한다지만 가만히 보면 병원 당직과 육아는 비슷한 점이 많다.




육아와 당직의 가장 비슷한 점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돌발 상황'들이 하루를 아주 알뜰살뜰하게 채우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그러한 돌발상황은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참 이상하게도 이런 '돌발상황'들은 무언가에 이제 막 집중했을 때, 씻고 있을 때, 불면증에 시달리다 겨우 단잠에 빠져들었을 때 더 많은 빈도로 발생한다. 결국 육아와 당직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생한 일이 상시로 나를 힘들게 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종류의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부모라면 누구나 육아에 지쳐 아이의 사소한 요구에 짜증스럽게 반응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평화롭게 자는 아이의 얼굴을 보며 죄책감을 느꼈던 경험 또한 있을 것이다. 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종종 벌어진다. 며칠 동안 이어진 당직으로 피곤에 찌든 의사 또한 보호자의 무리한 요구에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다가도 막상 환자 옆에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면 연민을 느끼게 된다.




물론 안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육아도 당직도 나름의 사명감이 없이는 제대로 해내기 힘든 일이며 아이들의 미소에 그리고 환자들의 감사에 뿌듯한 성취감을 느낄 때가 더 많다.






서론이 길었지만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일도 육아도 똑같이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우리 부부는 어느 정도 서로의 고생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아내만큼 순수하게 공감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른 날보다 응급상황이 많아 힘든 당직을 하고 온 어느 날의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고생 많았다고 이야기하는 아내. 그 얼굴 한편에 느껴지는 고생과 피로, 그리고 말끔한 집과 따뜻한 음식들을 보며 고맙다고 말하기보다 전날 힘들었던 일을 털어놓기 바빴다. 나는 말로는 항상 '고생이 많네.. 많이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해..'라고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나도 힘들게 일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의 이기심은 표현하지는 않을 뿐, 보통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상적인 것이라고 애써 자위했다.








그리고 2019년 여름의 어느 날, 나는 책을 읽다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주 : 애덤 그랜트 저 '기브 앤 테이크') 그 책에는 책임 편향(responsibility bias)에 대한 글이 있었다. 책임 편향이란 '어떤 일의 성공은 자신의 덕, 실패는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이야기한다.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여러 부부를 대상으로 부부생활이 유지되는데 자신이 기여하는 바를 %로 적으라고 했을 때 부부의 대답을 합쳐보면 대부분 100%가 훨씬 넘었다고 한다. 부부 둘 다 가정이 유지되는데 자신이 기여하는 바가 50%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자기 편향이 사람의 이기심이나 자만으로만 생각할게 아니고 명백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실행한 일이 힘들게 느껴지고 상대적으로 타인이 하는 일은 체험하지 않는 이상 잘 모를 수밖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하는 일의 목록은 평균 11개를 작성했지만 배우자가 하는 일의 목록은 평균 8개밖에 적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이 글을 읽고 하나의 힌트를 얻었다. '상대방의 일을 직접 겪어보면 어떨까?' 








육아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많이 도와주고 관심을 가지려고 늘 노력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사실 한 번도 온전하게 나만의 책임으로 육아를 해본 적은 없다. 육아에 있어서는 늘 월급쟁이였지 한 번도 CEO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월급쟁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남이 시킨 일을 할 뿐 주체적으로 판단해서 일을 하지 않는다.




아이에 대한 주체적 판단은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내 잘못으로 우리 아이가 잘못되면 어떡하지?'라는 자기 불안을 야기하기에 육아에 있어 큰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그리고 사실 이 땅의 많은 아빠라는 이름의 '육아 조무사'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얼마 전 즐겨보던 웹툰에서 비슷한 일화가 있었다. (주 : 순두부 작 '나는 엄마다' -194화 정확하게 반, 육아 편) 작가 본인이 주인공인 주부와 그 남편이 육아를 반씩 나누어서 하기로 했다. 하지만 남편은 매사에 작가의 컨펌을 받아서 행동하는 수동적인 태도를 보여서 매 순간 작가를 힘들게 한다.




아무리 안아줘도 우는 아이를 아내에게 넘기는 남편. 그리고 아내가 아이를 달래자 남편은 "역시 엄마라 다르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작가는 '내 품이라서가 아니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안아주었기 때문이다. 엄마라 특별한 게 아니다. 인내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걸 왜 모를까, 왜.'라며 독백한다. 또한 '너만 처음이 아니고 나도 처음이고 나도 모르는 게 많은데 왜 나한테만 물어보냐'며 눈물을 삼킨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육아를 모두 맡겼던 것, 어쩌다 한번 도와주더라도 아내의 우산 아래서 편하게 애들을 보면서 생색만 냈던 것들이 미안해졌다.






그래서 어느 날 큰 결심을 했다. '아내에게 휴가를 주자. 나도 한번 온전하게 모든 것을 책임지는 독박 육아를 해보자.'








사실 이러한 결심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결혼과 출산으로 갑작스럽게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삶에 매몰되는 것 같은 아내를 보며 항상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정체성의 회복에 있어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배움, 그리고 여행만큼 좋은 게 또 있을까.




결혼 전부터 여행을 좋아했던 아내에게 전에도 몇 번 혼자서라도 여행을 다녀오라고 권유했지만 아내는 고마워하면서도 거절했다. 금전적인 이유나 육아에 대한 걱정도 있었겠지만 아마 나에게 미안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로 접근했다. "나 혼자 독박 육아라는 걸 좀 경험해 보고 싶으니 자기가 좀 도와줘. 국내 말고 가까운데라도 여행을 좀 다녀오면 좋을 거 같아."




그리고 아내는 흔쾌히 허락했다. 나는 이 순간의 아내의 기쁜 표정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다만 아이들의 입장은 약간 달랐다. 엄마가 없으면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싫다는 유민이와 엄마 혼자 놀러 간다는 사실에 섭섭해하는 은우.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서 아이들을 앉혀놓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아이들은 나름 엄마에게도 휴가가 필요하다고 느꼈는지 쉽게 수긍을 하였다.




사실 엄마 혼자 놀러 가서 섭섭하다는 은우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래서 원래는 휴가기간 동안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도 출근을 할까 했는데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럼 우리도 일주일 동안 휴가 가자! 은우랑 유민이 평소 가고 싶었던 곳 하고 먹고 싶었던 것들 이야기해봐!"




A4용지를 하나 가져와서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100% 아이들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스케줄표를 보고 있자니 엄청 빡빡하다. 과연 소화가 가능한 스케줄일까 싶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어찌어찌 될 거 같기는 하다.





하드 한 스케줄. 한글을 모르는 유민이를 위해 그림도 그렸다ㅋㅋ








프로젝트 기간 동안 몇 가지 목표를 세웠다.




1. 아이들과 지내는 동안 정서적 안정상태 유지하기.


- 분노나 조급함 같은 부정적 감정이 생겨나지는 않았는지 순간순간 나의 감정을 파악하고 아이들에게 부정적 영향 주지 않기.




2. 조종하는 육아를 하지 않기.


- 협박이나 회유, 죄책감 유발 같은 방법을 사용해서 아이를 내 사정에 맡게 움직이려 하지 말고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하고 대화하면서 서로 이해해가는 시간을 갖기.




3.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


- 스케줄에 야외활동이 많아 안전에 특히 유의하기.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기.  




4. 방 청소, 빨래 개기, 간단한 요리 같은 가사를 매일 경험하게 하기.


- 엄마가 평소에 어떤 일을 하고 어떤 부분이 힘든지를 직접 경험하게 하기. 평소에 몰랐던 엄마의 노고를 알고 고마운 마음 갖기.




5. 그날의 활동을 육아일기와 블로그에 기록하기.


- 나중에 아이들이 크고 나서도 한 번씩 꺼내볼 수 있는 좋은 추억의 기록 만들기. 매일매일의 기록을 포스팅 함으로써 여행 중 아이들을 걱정하는 아내에게도 잘 지내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기.


(아내도 여행기를 작성해서 나중에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책으로 독립 출판을 해도 좋겠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번 프로젝트가 나에게는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아빠를 온전히 독점하는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자기 같은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라며 나를 추켜세워주고 힘을 주는 아내에게 큰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등장인물>


은우


이름 : 은우

나이 : 7세

태명 : 욕심이


유전적 특성 :

아빠 - 집중력, 끈기, 손재주, 집착

엄마 - 운동신경, 순발력, 근력


좋아하는 것 : 보드게임, 종이접기, 단순노동, 나물반찬

싫어하는 것 : 잠자기


주요 스킬 :

똥 싸기 (쿨타임 24시간) - 광역기, 집 내부에 밀폐되지 않은 모든 공간의 대기를 오염시킨다. (‘대기오염’은 엄마에게 2배의 효과.)

"똘똘이~" - 유민이 대상 한정 스킬. 유민이를 ‘순종’ 상태로 만든다. (‘분노’ 상태에서는 효과가 없다.)

"아빠 놀자!" (패시브) - 아빠와 놀고 있는 상태에서도 상시 발동되는 스킬. (놀고 있는데 “아빠 놀자”하는 말을 들으면 참 황당하다.)

오두방정 (버프) - 순간적으로 이동력과 체력을 향상하는 버프. (엄마에게는 디버프 '짜증'이 걸린다.)


우리 집의 장남. 또래보다 키, 몸무게는 왜소한 편이지만 생각의 깊고 마음이 넓다.

아빠에게서 손재주와 집중력을 물려받아 앉아서 하는 만들기나 보드게임을 좋아한다.

특히 콩 까기, 마늘 까기 같은 단순노동에 특화되어 있다.

엄마에게서는 운동신경과 순발력을 물려받아 각종 신체활동에서도 비범한 능력을 보여준다.

나물반찬과 과일을 좋아하고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는 걸 즐겨서 가끔 애늙은이 같은 모습도 있다.

동생 유민이에게 질투가 많아 싸울 때도 있지만 한 번씩 무심한 듯 챙겨주는 츤데레 오빠다.

주특기는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는 '오두방정'.




유민이


이름 : 유민

나이 : 5세

태명 : 오름이


유전적 특성:

아빠 - 외모, 식성

엄마 - 예술적 센스, 흥


좋아하는 것 : 미역국과 육류(소시지, 갈비, 족발 등등..). 동물(새, 뱀), 그림 그리기, 그림책 보기, 드러눕기

싫어하는 것 : 야채, 잡곡밥, 콩, 파. 걷기. 경쟁.


주요 스킬 :

"‘미안해’해!" - 대상에게 사과를 강제한다. (아빠에게 효과 2배, 은우에게 무효)

드러눕기 -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앙와위를 취하여 체력을 회복한다. (야외에서도 유효)

족발 대장 (패시브) - 족발의 해부학적 구조를 파악하여 완벽 발골한다.

튼튼한 몸 (패시브) - 상태 이상 ‘잔병’의 지속시간을 단축시킨다.


우리 집의 막내. 막내지만 실질적 실세이자 독불장군이다.

아빠에게서 식성과 외모를, 엄마에게서 예술적 감각과 흥을 물려받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성격은 어디서 온 건지 잘 모르겠다.)

일하는 것과 귀찮은 일을 싫어하고 마냥 드러누워서 노는 걸 좋아하는 우리 집의 공식 베짱이.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고 떼를 쓸 때가 많지만 한 번씩 특유의 공감력으로 훈훈함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