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여행을 싫어한다는 사람은 만나기 힘들다.
행락철에 어디로 나서기 귀찮아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가 아닐까 한다.
내게 여행의 기억은 멀미로 먼저 시작된다.
비포장 고갯길을 풀풀 날리는 흙먼지를 뿜으며 구불구불 달려가면 종일 기다렸다는 할머니가 마중 나와 있었고, 인사는 잠시 미룬 채 버스에서 차마 다 못하고 남은 구토를 먼저 해결하던 어린 날이었다.
다음 조각은 가족이 함께 갔던 여름휴가들이다.
계곡에 텐트를 치고 밥 해 먹으며 며칠을 머물거나, 해변에 지정된 아버지 회사의 하계휴양소(결국 전세 낸 민박집이다)에서 피부가 홀랑 벗겨지도록 놀았다.
유독 계곡에서 환상적인 맛이던 쌀밥과 된장찌개, 코펠 밥그릇을 그물 삼아 잡으며 놀던 피라미, 계곡 옆 바위에서 늘어지게 잤던 낮잠, 튜브를 타고 있어도 자꾸만 삼키는 바닷물의 찝찌름한 불쾌감, 열기로 온몸을 달구던 모래 등이 아무렇게나 그린 수채화 파편으로 남아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떠난 계곡 야영과 대학 초년생 때 텐트 둘러메고 동해안을 긁으며 내려왔던 긴 여행도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잠 한숨이면 회복하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밤을 새울 수 있는 젊음을 소유했던 시절.
밤잠 내내 등을 쿡쿡 쑤시던 돌부리도 어떻게 할 수 없이 마음대로 운용 가능하던 신체와, 함께하면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따위 삭제해 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군 복무 시절 휴가를 나오면서 스쳐 지나기만 했던 춘천은 20대 내내 나의 로망이었다.
최전방에서 밤새 눈 치우고 얼음 깨다가 휴가를 나왔을 때, 봄꽃이 만발한 춘천의 풍경이 주던 경이로움을 잊지 못했다.
흠뻑 빠져 읽었던 책들의 작가인 이외수 선생이 당시 살던 곳이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자취하던 친구의 집에 들러 함께 모종의 작업을 하다가 푸념처럼 투덜거렸다.
"그런 춘천 여행 한 번을 못 가고 산다, 내가......"
지방의 집으로 돌아갈 차비 달랑 가진 내 형편을 친구는 알았고, 서울 자취하던 친구의 빤한 형편도 내가 알았다.
집을 나서는데 친구가 꾸깃 접은 돈 2만 원인가를 쥐여 주었다.
- 춘천 들렀다 내려가라.
염치도 없지, 어버버 쭈뼛거리며 그 돈을 받아 춘천행 기차를 탔다.
간이역 수준의 남춘천역, 기차를 내려 역 밖으로 나섰을 때 땡땡땡 종을 울리며 지나가던 경춘선 열차의 꽁무니와 철길 위에서 번득거리던 초저녁 햇살을 기억한다.
남은 돈을 다 끄집어내어 그제야 계산을 놓아 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등산용 버너와 코펠을 갖고 다녔다. 대체 뭘 하며 살았던 것인가.
라면이라도 사서 끓여 먹고, 의암호 등 오갈 때 버스 타고, 춘천고속터미널에서 고속버스 타고 내려가면.....
잠 잘 돈이 아슬아슬했다.
여차하면 노숙을 해야 하나, 우선 남춘천역 인근 여인숙을 뒤졌다.
방 있나요?
- 혼자유?
네. 하룻밤에 얼마지요?
- 만 오천 원!
아, 네...... 알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 나오는데, 웃음인지 한숨인지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 총각! 만 이천 원만 내!
어? 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면 두 개에 계란도 하나 넣고, 소주도 한 병 마실 여윳돈이 생겼다. 세상에!
짐을 풀어놓고, 동네 구멍가게로 갔다.
라면, 소주 한 병, 그리고 낱알로 파는 계란에 손을 가져갔다.
작은 흥분 때문이었을까.
계란을 집다가 떨어트리고 말았다.
더 이상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터져 흐르는 노른자를 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는 내가 정말 싫다, 저주를 퍼부으며 깨진 계란을 치우려 했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만류한다.
- 내가 치울게요. 냅둬요.
죄송합니다...... 이 계란까지 해서 얼마 드려요?
- 깨진 계란값은 안 받을 테니까 한 알 가져가.
아니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변상할게요.
- 어허. 됐다니까. 그냥 가져가요.
툭툭 두들겨 주던 손길을 어깨에 얹고 여인숙 방으로 돌아와, 조그만 쪽창을 열고 달빛을 보며 라면을 끓였다.
귀하디 귀한 계란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조심조심 깨어 넣고.
괜히 눈물 같은 소주를 그 옆에 놓고.
내게 여행은 그날의 남춘천역이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는,
누구의 도움이 있고서야 그 낯선 곳을 마시고 삼킬 수 있는,
우연의 힘에 의지해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여행자'인 나의 신분을 알게 하는 일.
주거지에서 반경 몇 킬로미터를 벗어나야 여행일까.
어떤 목적이어야 여행일까.
그 기준은 글을 쓰며 만들어지거나 흐려질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다시 기록해 보려고 하는 건 지구의 인간 문명을 잠시 거쳐갈 여행자로서 젊은 날과는 다른 시야나 시선으로 주변의 우연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계절마다 다른 동네의 풍경을, 별 계획 없이 떠난 후 만나는 이야기들을, 바랜 기억으로 남은 곳을 향해 다시 옮기는 발걸음을, 이곳에 남겨보려 한다.
최근의 여행일 수도, 철 지난 과거의 여행일 수도 있다.
여행에 유용한 정보를 담기보단 시간에 묻어있는 이야기와 감상을 위주로 하게 될 것이다.
여행을 담는다는 것은 어쩌면, 내 안에 고여 있던 감정을 길어 올리는 일이기도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