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이른 봄 전북 여행은 그간 자주 발걸음 하던 전주보다는 완주에 중점을 두었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 전북 완주가 여행지로 주목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최근 들어서야 조금씩 그 이름이 언급되는 정도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이제 이정표로 주어진 화려한 요소들에만 매몰되지 않고, 스치는 작은 것들에 잠시 멈춰 깊은 시선을 두는 것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완주군의 맨 위쪽에 자리한 대둔산으로 향했다. 서쪽으로는 논산, 동쪽으로는 금산에 걸쳐 있는 웅장한 산세는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적이다. 대둔산 케이블카에 몸을 싣자,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다. 구름다리 아래 전망 좋은 곳에 우리를 내려준다는 안내에 기대가 부풀었다. 대인 기준 왕복 15,000원, 20분 간격으로 출발점과 도착점에서 두 대가 동시에 엇갈려 운행하는 효율적인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케이블카 내부 장식물에 시선을 두며 잠시 고소공포증을 잊어본다. 올라가며 보는 경치가 좋다고들 하지만, 나이 먹을수록 더해지는 고소공포증은 눈앞을 자꾸 가려 창밖을 내다보긴커녕 사진도 제대로 찍기가 힘들다. 높이가 좀 있는 대부분의 산이 그렇듯, 대둔산도 오를수록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바위산의 모습을 웅장하게 드러낸다.
구름다리나 삼선계단 같은 아찔한 코스들은 7부 능선 위부터 꽤 힘든 등반 코스일 거라는 짐작을 하게 한다. 케이블카가 도착하면 구름다리나 정상까지 걸어 올라가거나, 도착점에 있는 카페 전망대에서 차를 마시며 머무르는 방법 중 선택하게 되는데, 나는 남은 여행을 위한 체력 보존을 택했다. 예상 가능하듯 전망 카페의 찻값은 비쌌지만, 쌍화차의 내용물은 그래도 나쁘지 않아 위안이 되었다.
이날은 흐린 날이 아니었고 먼지 농도도 높지 않았지만, 쨍한 하늘을 볼 수는 없었다. 빛의 산란이 어떤 조건이었는지 하늘이 희뿌연 느낌이어서 아쉬웠다. 과학적 지식은 가진 게 없어 현상에 대한 추정도 불가능하지만, 맑은 날에도 완벽하지 않은 자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잠시 카페 테라스에 앉아 붐비지 않을 때 손바닥에 잣 조각을 올려두고 기다리니, 조그만 산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카페 주인장 말로는 직접 먹지 않고 가족에게만 물어다 주는 '사랑꾼'이라고 한다. 그 작은 생명에게서도 삶의 당연한(?), 또는 따뜻한 본질을 배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오니 같은 가지에 다른 꽃이 핀 생경한 나무들이 눈에 띈다. 나무의 한 몸에서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기생과 공생 또한 그 경계가 어디인지, 무엇이 먼저인지 알 수 없이 인간의 관념에 무감한 자연의 섭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때마침 벚꽃잎은 바람 따라 휘날리며 산발하고 있었다. 힘없이 내려앉은 꽃잎들이 유독 내 눈에 들어오는 건, 생장뿐 아니라 소멸 또한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대둔산에서 만난 자연의 웅장함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작은 생명들의 이야기는, 여행의 깊이가 비단 유명한 이정표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산의 높이가 주는 경외감만큼이나,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과 손바닥 위 새 한 마리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