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여행의 두 번째 발걸음은 삼례였다. 완주에서 가볼 만한 곳으로 종종 등장하는 삼례는 요즘 시류에 맞춰 먹거리든 볼거리든 사진 찍기에 좋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작년(2024년 봄)에 이곳을 찾은 이유는 예술과 책이라는 테마 때문이다. 삼례역 앞에 삼례문화예술촌과 삼례책마을이 조용히 모여 있었다.
문화예술과 책. 소위 있어 보이면서도 예쁜 곳이라면 얼마나 매력적인가. 도로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삼례문화예술촌으로 들어가는 길.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활성화가 덜 된 듯한 아쉬움도 맴돈다.
삼례문화예술촌의 넓은 마당에는 무대도 보인다. 건물의 형태를 보면 예전 농산물을 수매하고 보관, 처분하던 조합 시설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게 된다. 어쩌면 그 이전에는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픈 역사를 지녔던 현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공간의 리뉴얼은 아주 섬세한 터치가 동반되지 않으면 지역의 역사가 '대우'받기보다 '취급'받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목적이 어디에 있었고, 그 과정에 누가 참여했는가가 '대우'와 '취급'을 결정 지을 것이다.
몇 동의 건물이 각각 다른 테마의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눈앞에 보이는 전시관으로 들어서자 고흐의 작품들이 프린트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된 모습에 깜짝 놀랐다. 미술에 문외한이라는 점은 아쉬웠지만, 새로운 시선으로 작품을 접하는 경험이었다.
야외로 다시 나오니 이 공간을 위해 신경 쓴 조형과 조경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파라솔처럼 크게 만들어도 막상 앉았을 때 햇빛을 제대로 가려주지 못하는 조형물들을 보며 평소 희한하다고 생각했던 점을 떠올렸다. 태양의 위치를 감안해 기울이는 방법은 없는 걸까. 그럴듯해 보이는 것도, 의도도 좋지만 더 중요한 건 본질적인 기능이다. 문화예술촌 바로 옆으로는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너른 평지에 충분한 크기로 자리 잡은 삼례성당이 보인다. 좋은 곳에 자리 잡았으니, 잘 가꿔진다면 종교 문화적 의미와 예술적 체험, 휴식 모두를 만족시키는 공간으로 더욱 발돋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의도가 개입되지 않고 목적 지향적으로 운영해 가길 바란다.
길 건너 삼례책마을의 모습은 홈페이지에 드러난 조성 스토리와 전북 대표 여행지로 발돋움하겠다는 비전처럼, 역사와 추억, 지식과 교양을 나눌 수 있는 곳이기를 기대하게 했다. 책박물관, 헌책방, 갤러리와 카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대체로 실망스러웠다. 특히 헌책방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게 했다.
안서 김억과 소월 김정식의 책과 자필 편지 등이 전시된 책박물관과 헌책방에는 오래 묵은 책들이 판매되고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판매 가치나 소장 가치를 찾기 어려웠다. 물론 나의 모자란 소양이나 방향을 잘못 잡은 기대 탓일 수도 있겠지만, 고서로서 가치가 있거나, 불후의 명작이거나, 사람의 사연이 묻어 있거나 하는 어떤 맥락도 찾지 못한 채 그저 시각적으로만 '폼은 나는' 공간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애매해서 폐기해야 할 낡은 책들을 모아다 꽂아 둔 것에 불과한 건 아닌지, 붙어있는 몇 천 원 정도의 가격표조차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평소 서점, 특히 동네책방이나 중고책방 들르는 것을 좋아하는 나 때문에 이곳을 여행지로 잡은 사실이 머쓱 할 정도였다.
한쪽에는 단기 4295년, 그러니까 1962년의 교과서를 새로 구현하여 판매하고 있었는데, 견본을 넘겨보다 재미난 것을 발견했다. '되박아 펴낸이' 국정교과서 주식회사. '되박아 펴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인쇄 발행인 정도를 뜻하는 말이겠지만, 순수 우리말로는 저렇게 표현되었나 보다. 지금과 사뭇 다른 맞춤법도 흥미롭다. 이처럼 흥미로운 발견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삼례는 책이다!"라는 이곳의 메인 카피를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해 보였다.
문화예술촌과 책마을을 정성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고요함과는 별개로 생동감이 부족했다. 안내와 판매의 접점에 있는 사람들 중 친절하고 따뜻한 관심을 보이는 분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익숙함 속에 숨겨진 낯선 아름다움과, 기대와 다른 현실을 통해 삶의 본질과 예술의 의미, 그리고 공간의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길'이었다. 지방 정부마다 넘쳐나는 예산을 잡아먹는 무의미한 자산이 되기보다, 제대로 지원받고 목적대로 집행하여 그 이름처럼 역사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안고 다음 행선지로 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