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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아래 잠든 백제의 시간 위를 걷다 - 공주 무령왕릉

by 책방삼촌


공산성 성벽을 따라 마음을 쉰 다음, 발길은 자연스레 왕들이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언덕으로 향한다. 공주라는 시간 개념에서 가장 고요한 곳,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다.


이곳에 닿자마자 푸르게 솟아오른 봉분들의 나지막한 언덕이 나를 맞는다. 잘 정돈된 잔디와 색색의 꽃잔디가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작은 아쉬움 하나가 그림자처럼 드리운다. 보존을 위해 진짜 왕릉 문이 여전히 굳게 닫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람의 잦은 출입은 거미줄 같은 자연의 범람에 맞서 문명의 테두리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무덤 같은 위태로운 문화재는 발길과 숨결만으로도 무참히 망가질 수가 있다. 물론 왕릉 내부 보존 목적으로 폐쇄된 것은 구조적 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닿을 수 없기에 더 신비롭고, 쉬이 보여주지 않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 비록 복원된 전시관을 통해 그 안을 짐작할 뿐이지만, 완독 하려던 귀한 책의 가장 중요한 장(章)이 영원히 펼쳐지지 않는 것 같은 아쉬움 속에서도, 단서로나마 과거를 만나는 순간은 경이롭다.


손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시간에, 대낮의 적막마저 깨지 않을 복화술로 인사를 건네듯.



날이 좋아서인지, 푸르게 솟아오른 봉분들과 차분히 화려한 산책길은 발길을 멈추고, 또 이어가게 한다.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초록의 곡선이 언덕을 만들고, 그 사이를 걷는 길에는 수백 년, 수천 년의 고요함과 역사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다. 이 한 줌에 들어오는 풍경과 향기가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백제의 전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발아래 돌멩이 하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 한 줄기에도 백제의 시간이 배어 있다.



봉분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다 문득, 이 언덕의 중심이자 왕릉원 언덕이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인 무령왕릉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실 무령왕릉은 발견되기 전까지, 옆에 있는 다른 왕릉들처럼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는 능이었다. 이름표를 잃어버린 채 송산리 고분군 언덕의 이름 없는 봉분들 중 하나로 천 년 이상을 잠들어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1970년대 초, 믿기 힘든 우연이 찾아왔다. 배수로 공사를 하던 삽 끝에 딱딱한 무언가가 걸렸고, 그렇게 드러난 무덤은 도굴 한 번 당하지 않은 채 수백 년 잠들어 있던 백제의 가장 찬란하고 중요한 비밀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무령왕과 왕비의 유해는 물론이고, 국보급 유물 수천 점이 잠에서 깨어났다.



무령왕릉의 문화재적 가치는 발견된 상태 그 자체와 쏟아져 나온 유물들에서 나온다. 벽돌무덤 양식, 백제 특유의 뛰어난 금속 공예 기술, 멀리 중국이나 일본 등 외국과 얼마나 활발하게 교류했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들이 바로 이곳 왕릉 아래 잠들어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왕릉 지석(묘지석)이었다. 그 돌에 '백제 사마왕(무령왕)이 을묘년(525년)에 돌아가셨다'는 내용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이 지석 하나가 우리에게 무령왕이라는 이름을, 525년이라는 시간을 선명하게 알려주었다.



원래 이곳 언덕은 그저 '송산리 고분군'이라 불렸으나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그 가치가 확인되면서, 이제는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무령왕이라는 가장 빛나는 이름 하나가 더해지면서, 그 옆의 다른 왕릉들까지 포함한 이곳 전체의 의미가 다시금 조명된 것이다. 이름 없는 언덕에 이름이 생기고, 장소의 정체성이 더 명확해진 셈이다.


푸르게 솟아오른 봉분들 위를 걸으며 그 아래 잠든 왕들의 시간을 상상한다. 역사는 대체로 지배자들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 역사의 큰 흐름은 낱알갱이 같은 민초들의 서사가 '나'를 넘어 '우리'가 되었을 때 만들어진다. 왕들이 잠든 이곳에서, 문득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를 떠올린다.


비록 내 이름 남지 않더라도, 뭉쳐 아름다웠던 역사였음을 증명하면 그것으로 만족할 만하지 않나. 그걸 절감하는 지금 이 시절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과 함께 보내고 있다.


역사 속 수많은 이야기가 대기를 떠돌고, 육안으로 보는 흔적은 풍화를 피해 대개 땅속에 묻혀 있다. 나는 그 위를 걸으며 발굴되지 못한 무명의 존재들, 땅 아래 잠든 그들의 이야기를 짐작하며 사색해 본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정자 형태의 휴게실 마루에 잠시 누워 절반쯤의 하늘을 시야에 담는다. 땅 아래 묻힌 시간과 하늘에 흐르는 시간 사이 잠시 숨을 고르며, 고요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주는 이곳을 내 마음 또 다른 빛깔의 이야기 조각으로 조용히 얹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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