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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계선을 걷다 - 공산성 여행과 백제의 시간

by 책방삼촌


십여 년 시간의 강을 건너 다시 닿은 공주는 부여와 함께 묶어 백제의 이야기로 여행하면 더 좋은 곳이다. 이번엔 짧은 일정으로 공주에만 하룻밤 머물렀다.


그 밤, 숙소에서 금강 너머 바로 보이는 공산성. 옅게 남은 백제의 열망 같은 불빛이 길게 성벽 따라 밤을 지킨다.


전막 별빛 휴 테마거리라고 하는 숙박촌인데, 이 구역에 머물면 강 건너 공산성을 마주할 수 있다. 주로 모텔들이지만 밤에 산책 삼아 돌아보니 몇 군데 쾌적하게 잘 만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나지막한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공주. 금강과 공주시를 내려다보는 공산성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까. 공주 여행 필수 코스인 이유를 찾아본다.


정문의 북적이는 주차장은 나를 허락하지 않았다. 쫓겨나듯 벗어나 다른 곳을 뒤지다 우연히 진남루로 오르는 입구를 찾았다. 관광객의 분주함 대신, 공산성 남쪽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먼저 인사를 건네온다.


평탄하고 편안한 길은 아니지만, 발아래 흙과 돌계단의 감촉이 주는 운치는 여느 산책길 못지않다.


진남루 안쪽은 백제의 속살을 드러내는 발굴 작업이 여전히 한창이다. 천년의 이야기들은 햇빛 볼 날을 기다리고 있을까.



진남루에서 금서루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걷는 길은 관광객이 주로 다니진 않는 걸로 보인다. 사람이 많이 몰리면 위험할 수도 있는 낭떠러지 길이다. 안전장치 대신 가끔 나타나는 '추락주의' 푯말이 우릴 지켜주진 못할 것 아닌가.


그러나 성벽을 따라 걷는 것은 시간의 경계선 위를 지나는 일이다. 백제의 시간은 절멸의 날, 이 성벽에 천 년이 넘도록 멈춰 있다.


성벽에서 잠시 벗어나 입이 떡 벌어지는 고목들 틈에 숨은 쌍수정을 만났다. 조선 인조에 얽힌 이야기가 고목의 나이테처럼 남아있다.



성벽길을 더 걸어가면 주 출입구에 해당하는 금서루와 금강을 내려다보는 공산정이 나타난다.


금서루 뒤편 성 안쪽은 비교적 평탄한 길이 잘 가꾸어져 있어 방문객들이 주로 산책하며 사진을 찍는다.


공산정 앞 성벽 위에 서면 금강과 공주 시내가 넓게 내려다보인다.



공산성의 공산정은 금강을 떠나보내는 동시에 맞이하며, 매 순간 그리워한다. 이곳의 그리움은 어느 지점에 머물지 못하고 선을 따라 끝없이 흐른다.


미분의 공식을 적용하면 최소한의 어느 점으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까. 어느 수포자의 수학적 사유는 고작해야 여기까지이고, 이것조차 확실한 오류일 것이다.



가파르게 강을 따라 내려가는 계단은 공북루로 이어지며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짙게 푸른 금강은 누군가의 소망과 원망을 담으며 흘러왔고, 산성은 그들이 딛고 선 자리를 기억한다.


내가 다 읽어낼 수 없을 뿐, 공산성은 낡은 이야기들이 빼곡히 꽂힌 서가처럼 백제의 호흡을 담고 있을 것이다.



큼직한 DSLR에 삼각대까지 연결하고 이곳저곳 천천히 둘러보는 멋진 젊은이를 본다. 나의 낡아가는 핸드폰 렌즈와는 그 성능뿐 아니라 담아내는 풍경도 사뭇 다를 것이다.


손에 든 장비의 격차보다 망막과 시신경을 거쳐 뇌에 이르는 기능적, 구조적 차이점이 다른 시야를 낳겠지. 지금 이 숲의 연둣빛 같은 시간을 지나는 그녀가 일면 부럽고, 그 풍경을 여전히 바라보는 나로서는 또 그게 마냥 부럽지만도 않다.



서로 다른 시간과 시선들이 공산성 성벽 위에서 겹겹이 포개진다. 백제의 숨결을 느끼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성벽처럼, 어떤 이야기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그곳에서 담아 온 것은, 낡은 돌멩이 하나에 깃든 시간의 무게, 그리고 그 위로 여전히 흐르는 덧없는 바람의 소리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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