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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Jan 30. 2024

인디언 타임(Indian Time)

인도에서 약속 시간

코리안 타임(Korean Time, 예전에 한국에서 약속 시간보다 대략 1시간 정도 늦는 경우를 말함) 보다 훨씬 강도가 심한 인디언 타임(Indian Time, 인도에서 주로 정해진 시간보다 4~5시간 길게는 10시간 정도씩 늦어지는 경우를 말함)은 성격이 느긋한 편인 나조차도 적응하는데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숨넘어가는 인디언 타임은 수년을 살아도 여전히 감내하기 어려운 넘어야 할 엄청나게 큰 과제 중의 하나였다.     


나도 사실 약속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하기보다는 거의 제시간에 맞춰서 움직이는 편이다 보니 중간에 변수라도 생길라치면 늦을 때도 종종 있다. 내 속에는 쓸데없는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왠지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미리 나가 있으면 내 시간을 도둑맞는 느낌이 있어서 딱 시간에 맞춰 움직이는 나쁜 습관이 있다. 그러다 보니 도리어 내가 약속 시간에 늦어서 다른 사람의 시간을 도둑질할 때도 많다. 


누군가와 약속을 잡고 시간을 정하는 건 사소한 것들까지도 모두 소중하다. 기한 내에 서류를 내는 것도, 회의나 수업 시간, 식사나 모임의 약속은 어느 것 하나 제외할 것 없이 중요하다. 그래서 나도 한번 정한 약속은 뒤집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며, 부득이하게 약속을 변경해야 할 경우는 상대방도 이해가 되며 동의가 되는 상황에서만 양해를 구하곤 한다. 가끔 설레며 기다리던 약속이 일방적으로 취소되거나 뒤집힐 때는 자신이 부인되거나 작아지는 듯한 썩 좋지 않은 불쾌한 감정까지 들 때도 있는 게 사실이기에 그렇다.  어쩌면 상대방에게 나 자신이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득이하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도 분명히 있기는 하다.      


인도에 살면서 이러한 시간과 약속에 대한 괴로움 때문에 불안하고 불편하며,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순간들과 마주할 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한 번은 한국에서 가져간 냉장고가 고장이 난 적이 있다. 냉장고 없이 델리에서 여름을 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한국에서 한여름에 느끼는 폭염과는 비할 수도 없을 만큼 훨씬 뜨겁고, 무더우며, 찌는 듯한 델리의 날씨 때문에 냉장고가 고장 나면 음식이나 채소가 금방 상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다 우리 집 냉동실에는 한국에서 가져간 비상식량을 얼려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계속 냉장고가 고장 나면 낭패를 볼 게 뻔했다. 한시라도 빨리 냉장고를 고쳐야만 했다. 시간과의 싸움은 생존의 치열한 전쟁과도 같았다. 마음이 급했다.      


인도에 있는 현지 삼성 서비스 센터에 연락했다. 다행히 인도 수리 기사가 집에 방문했다. 물론 엔지니어가 우리 집에 오기까지 여러 차례 약속을 번복하며 기다리다 체념하기를 반복하면서 이를 악물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는 냉장고를 살펴보더니 부품을 갈아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인도에는 우리에게 맞는 부품이 없어서 고칠 수가 없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부품을 한국에 주문해서 직접 가져와야 한다며. 그러더니 내게 살짝 집 근처 동네 전기제품 수리점에 연락을 해보라며 귀띔했다. 내심 그에게 고마웠다.     


그때부터 냉장고 수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고통의 시간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은 센추럴 마켓에 있는 냉장고 수리 전문센터에 연락했더니 사장인 듯한 사람이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자세히 살펴보더니 고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만 해도 인도에는 양문형 냉장고를 쉽게 볼 수 없었기에 그들에게 결코 만만한 임무가 아니었을 법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꽤 비싼 수리비를 요구했다. 우리는 그저 제대로 고쳐주기만 해 달라며 그에게 수리를 맡기기로 했다. 장비를 챙기고 부품을 사 와야 한다며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런데 도무지 올 생각을 안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수리 기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에게 전화를 걸면 오후에 오겠다. 다시 내일 오겠다. 또다시 오후에 오겠다. 또 다음날 오겠다. 


그렇게 약속은 뒤로 자꾸 미루어지기만 했다. 하염없이. 며칠을 기다리다가 그가 오지 않은 이유는 부품을 찾지 못했거나, 아니면 양문형 냉장고를 수리할 자신이 없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냥 못하겠다고 내게 솔직하게 말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야속하기만 했다. 울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냉장고에 반찬이나 채소를 넣어둘 수 없어 모두 꺼내어 밖에 두었다. 냉장고 안의 냉기가 거의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수리 센터를 찾아 다시 전화를 걸었고, 사람이 왔다. 역시 부품을 사서 다시 오겠다고 했다.  나는 또 기다렸다. 약속했던 시간이 지나도 수리 기사는 등장하지 않았다. 나는 오기로 그에게 또다시 전화를 걸었다. 2시에 온다고 했다. 어쩌면 2시에 그가 안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예측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그를 기다렸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러나 역시 2시가 훨씬 넘어서도 아무도 내게 오지 않았다. 무슨 믿음이 있어서인지 나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에게 전화해서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일 아침에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결국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며 혼자 중얼거렸다.      

'차라리 못 온다고 했으면 그토록 기다리지 않았을 텐데, 왜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며, 꼭 오겠다는 약속을 했을까?'     

무더위 속에서 냉장고 없이 일주일을 버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동네 LG 전자제품 대리점에 가서 저렴한 세일 품목이라도 급한 대로 구해야만 했다. 인도 현지 공장에서 생산되는 열쇠가 달린(인도에서 생산되는 모든 냉장고 문에는 열쇠가 달려있다. 보통 인도의 가정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일꾼들이 냉장고를 열지 못하도록 고안해 낸 불편한 인도의 현실 속 결과물이다) 작은 빨간색 소형 냉장고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인터넷으로 냉장고 수리점을 검색하며 연락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작은 새 냉장고에 반찬과 채소를 넣어 사용하던 어느 날, 감사하게도 동네에서 뜻하지 않은 기술 좋은 인도인 수리 기사가 우리 집을 방문했고, 그는 뚝딱뚝딱 마술처럼 부품을 교체하더니 냉장고를 고쳤다. 비록 수리비가 약간 부담되긴 했으나 한국에서 싣고 간 가족 같은 큐빅 박힌 냉장고를 사용할 수 있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냉장고에서 다시 ‘윙~’ 하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나던 그 순간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렇게 냉장고 고장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마무리되었다. 마침내 고통의 시간이 막을 내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도에서 결혼식이나 저녁 식사에 초대받으면 기본적으로 두세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시작한다. 서너 시간쯤 지나서야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내며 식사나 예식을 시작할 분위기가 조금씩 보이는데, 이미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우리는 예식이 시작됨과 동시에 주인공의 얼굴만 보고 집으로 돌아올 때가 허다했다. 그 뒤로는 일부러 초대장에 적혀있는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을 늦게 가서 참석한 적도 있었는데, 그때마저도 1시간 이상을 기다려서 주인공을 만나 겨우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인도의 파티나 예식은 대체로 한밤중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처음 인도 친구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을 때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다. 식사 시간에 맞춰 바로 저녁 먹을 준비를 하고 갔는데, 접시에 달콤한 짜이와 비스킷만 주고는 소파에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야 부엌에서 식탁에 차릴 음식을 요리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처음에는 그런 인도의 문화를 모른 채 뱃속에서 들려오는 꼬르륵 소리가 부끄러워 부지런히 비스킷을 주워 먹으며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어서 맛있는 음식이 준비되기를 기다리면서. 심지어 인도의 저녁 식사 시간은 10시에서 11시 정도가 되다 보니 초대받은 외국인 손님인 우리를 위해서만 식사 음식을 준비했다. 본인들은 나중에 먹겠다고 하며 옆에서 식사하는 우리를 바라보기만 할 때도 있었다. 우리는 그때마다 주인인 관객 앞에서 음식을 먹는 것만 같은 그 이상하고 묘한 기분을 느꼈다. 살면서 이렇듯 독특하고 재미난 경험을 할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인도의 시간관념은 그저 단순하게 쉽게 판단할 만한 것이 아니라 힌두교의 역사와 정신, 힌두 문화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물론 내 생각에는 무더운 기후와도 상관이 있어 보인다. 아무튼 인도에서 누군가와 시간 약속을 하고 나면 의심병이 도지곤 했다.       

'과연 약속을 지킬 것인가?'

'과연 시간을 지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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