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샨띠정 Feb 05. 2024

노인과 북카페

한 사람의 인생이 책이 되어 오는 곳

거의 매일 오시다시피 하는 노인 어르신이 계시다. 오른손으로 반질반질 윤기가 흘러내리는 고동색 짧은 지팡이를 들고, 머리엔 오실 때마다 다른 빛깔의 모자를 쓰고, 콤비 재킷을 입은 모습은 멋쟁이라고 스스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 북카페에는 인도에서 가져온 8인용 커다란 원목 테이블과 책꽂이 앞으로 하얀색 동그란 탁자가 두 개 있으며, 바깥 정원과 하늘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다. 그 옆으로 쿠션과 함께 긴 소파가 창가에 자리하여,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으라고 손짓한다.

북카페의 샨띠 책방

그리고 북카페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 '샨띠 책방'에 진열된 판매용 도서를 마주하며, 넷이서 앉을 수 있는 검은색 소파 세트가 놓여있다. 어르신은 항상 이 검은색 소파에 앉아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드신다. 그리고 나 아니면 남편이 튼튼한 원목 다리가 지탱하는 소파에 마주 앉아 어릴 적 할머니의 속주머니에서 줄줄이 끌려 나오는 달콤하고도 고소한 간식거리라도 되는 양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담소를 나눈다. 마치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처럼.


"오늘이 벌써 네 번째로 오는 거여. 계속 문이 닫혀있어."

지난 신정 때 시댁 식구들 모임과 화용일 정기 휴일로 3 일을 내리쉬고, 수요일에 문을 열었던 날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어르신의 얼굴에 반가움을 이내 감추지 못해 화색이 환하게 돌았다.


"아, 어떡해요. 삼 일을 계속 오셨나 봐요. 저희가 신정이라 가족 모임이 있었어요. 죄송해요."

"아니 뭐가 죄송해. 모르고 온 우리가 잘못이지. 알 게 뭐야. 그냥 왔더니 문이 닫혔지 뭐여. 화요일에 쉰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왔지 뭐여. 늙으니까 기억을 잘 못해."


마음이 울컥했다. 뱃속에서 뜨겁고 말랑말랑한 기운이 가슴으로 솟구쳐 올랐다. 눈물이 핑 돌았다. 붉게 충혈된 거 같은 눈을 들키지 않도록 더 환하게 웃으며, 큰 소리로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눴다. 이곳을 기억하시고, 찾아오셨다가 운전대를 돌려서 다시 돌아가셨을 어르신을 생각하니 마음이 찡했다.


그렇게 우리 북카페의 문턱이 닳도록 찾아오시는 노인 손님들은 어느새 나의 찐 단골손님이 되셨다.

북카페는 왠지 젊은 사람들에게 더 매력적인 곳이 될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내게 신선한 도전을 던져 내 굳어진 사고의 틀을 단번에 깨트려 확장시켜주고 계신다.


매일매일 조금씩 더 어르신에 대해 알아갈수록 책을 펴 들고 줄거리를 따라 읽어나가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하루하루 내게 남겨주시는 에피소드는 더없이 즐거운 이야깃거리로, 때로는 노인의 값진 훈계와 교훈으로, 거기에 따스한 위로를 더해 사랑과 감동의 속삭임처럼 북카페를 베스트셀러 도서로 완성시켜주고 있다. 북카페를 운영하는 일이 때론 힘에 버겁고 무거워 고민이 될 때가 어찌 없겠는가? 그러할 때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는 북카페의 손님들이 있으니, 바로 이러한 분들이시다.

북카페에 입고된 신간 도서들

어르신의 살아오신 역사를 들어보면, 하나도 허투르게 지나칠 것이 없어 보인다. 좋아하시는 바닐라 라떼를 드시면서 들려주시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고민하고, 꿈꾸며 살아왔던 그런 삶을 어르신도 똑같이 지나오셨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된다. 지금도 매일 일기를 쓰신다는 노인. 지성인으로 한때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셨던 어르신, 언젠가 책을 쓰고 싶었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틀려먹었다며 한탄하시는 노인의 목소리에 얇은 떨림이 있어 더 애처롭다. 그래도 얼마나 열심히 멋지게 살아오셨던 삶인지, 그러한 삶을 따라가는 것조차도 못하지 싶어 진다.


그러면서도 어르신은 아직 그놈의 담배를 끊지 못한다며, 의지가 약한 자신을 한탄하시는 모습이 소년처럼 맑아 보인다. 입맛에 맞는 담배를 바꾸기가 어려운데 5,000원에서 4,500원짜리 담배로 바꿔 피우며, 남은 500원씩 모아서 이웃 성금에 보내신다는 어르신은 결코 의지가 약하시다 할 수 없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보면, 딱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이 담배를 피우던 친구 세 분이 얼마 전에 대단한 결심을 하시고는 금연을 실천하시게 되었단다. 이제 본인 혼자만 남게 되었다며, 한숨짓는 모습이 철새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멀찍이 날아가는 새처럼 애처롭기도 하고 고독한 얼굴이 슬프게도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처음 어르신들이 네 분이서 오셨을 때만 해도 커피를 주문해 놓으시고는 정원 밖으로 나가 나무 벤치에 앉으셔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시곤 하셨는데, 이젠 소파에 앉아 일어나지 않으신다. 이유가 금연에 있었다. 어르신도 친구분의 도움으로 처인구 보건소에 가서 금연교육을 받으셨단다. 금연패치라고 팔에 붙이면 담배 냄새가 지독하고 싫어져서 담배를 못 피우게 하는 것을 받아왔는데, 아직 미루고 미루시느라 붙이지 못하고 계신다. 설 전에는 꼭 담배를 끊어서 자식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하시겠다고, 다짐을 여러 차례를 반복하고 계신다. 그런데 어쩌랴, 오늘도 붙이지 못하셨단다. 그나저나 내일모레가 설날인데, 어르신은 금연에 과연 성공하실지 내심 걱정이 된다.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깜짝 놀랄 새로운 사실을 마주하며 땅속에서 보물을 캐내듯, 소풍 가서 보물 찾기에 성공하듯, 오랫동안 꽂혀있는 책 속에서 잊고 있던 쪽지를 발견한다든지 아니면 현금을 찾아내기라도 하는 듯한 즐거움의 비명을 지르게 된다.


"나도 성경을 읽어. 2016년에 샀으니까 벌써 7년이네. 큰 글씨로 되어 있어서 잘 보여 다행이야. 티브이에서 가끔 설교를 들을 때도 있는데, 항상 메모지를 옆에 놓고 있다가 성경 구절을 받아 적어. 그리고 나중에 한 번씩 찾아서 읽어보곤 하지. 나도 모태신앙이야. 우리 어머니가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으니까. 나도 옛날에는 교회에 다녔었지. 지금은 아니지만."


깜짝 놀랐다. 곧 팔순을 앞두고 계신 어르신이 모태신앙이라면, 그 신앙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인지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신앙생활을 하셨다면, 정말 아주 오래전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 교회를 다니셨겠어요."

"그렇지."


왜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지 여러 생각을 나눠주셨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부끄럽기도 하고.

어르신이 정리한 책

어느 날은 한자를 다 잊어버려서 속상하시다고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져 오셨다. 어떤 분이 한자를 메시지에 보내와서 무슨 뜻인지 알려달라고 했는데, 글쎄 모르는 게 있다고, 잊어버렸다고, 이제 늙어서 생각이 안 나신다며, 당신이 한심하다 말씀하시는 모습에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뭐라 위로를 드려야 할지 고민하다가 어서 책을 하나 빨리 내시라고 졸랐다. 그동안 써오신 일기를 모아서 책을 한 권 꼭 내시면 좋겠다고 용기를 드리고 있는 내게 대뜸 한 말씀하셨다.


"나도 사실 책을 내긴 했어. 하나. 뭐 사자성어를 해석해서 정리한 거지만."

보고 싶다고, 다음에 오실 때 꼭 가져다주시라 부탁드렸다. 다음 날 다시 오셨는데, 빈손으로 들어오셔서 잊으셨나 보다 했다. 책에 대해 묻는 내게 책을 가져왔다면서 자동차 열쇠를 건네셨다. 차 안에 있으니 정 필요하면 가져오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에 쑥스러움과 터프함이 같이 녹아있었다.

어르신의 증강현문

책은 보통 잡지책보다도 두꺼웠다. 무거워서 한 손으로 들기조차 어려운 책을 두 권이나 차에 싣고 오신 게 아닌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거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북카페에 가져다주려고 책꽂이에서 두텁고 무거운 책을 꺼내서 자동차 뒷좌석에 올려놓고 운전석에 앉아 달려오셨을 어르신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알 것만 같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싶었다.


알고 보니, 향교 교장이셨던 어르신은 사자성어, 증광 현문, 채근담에 능하신 한학자 셨다. 그 많은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하셔서 책으로 엮어 놓으신 것이다. 성균관에서도 오랫동안 교육을 받으셨다고 하신다. 결혼식 주례를 많이 서셨다는 말씀을 들었었는데, 이제야 앞뒤가 연결이 되어 단추가 꿰어지는 듯했다.

어르신이 주신 책의 뒷표지

북카페에는 꽤 다양한 손님들이 다녀가신다. 북카페에 책들이 빼꼭하게 책꽂이에 꽂혀있어서 신간부터 고전까지 다양한 장르의 책들이 있지만, 내게는 오시는 손님들이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처럼 오묘하고 신비롭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권의 책이 되어 우리 북카페를 찾아온다.


아직 나는 어르신의 연락처도 묻지 않고, 댁이 어딘지도 여쭈어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 그저 오후 두세 가 되면 어르신이 오시지 않을까 하여 북카페 자동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마침내 멋쟁이 노인께서 자리에 앉으시면, 나는 주문할 필요 없이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연하게 준비해서, 특히 우유 거품을 내어 그 위에 계핏가루를 올려서 어르신 앞에 놓아 드린다. 한참 대화가 끝나면 언제나 그렇듯 현금으로 커피값을 내시는 어르신은 일부러 현금을 준비해 오신다며, 따듯한 배려의 마음을 보여주신다.


어제는 노란 예쁜 봉투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시면서, 여동생이 용돈을 주셨다며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동생분이 용돈도 주세요?"

"그럼, 동생이 용돈도 주지. 명절이라고 미리 보러 왔다가 주고 갔어."

노인들의 형제 우애가 더없이 따듯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어느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늘은 밤부터 시작된 비가 계속 내렸다. 비가 와서 안 오실 줄 알았는데, 어르신이 혼자 들어오셨다.

어르신이 바닐라 라떼를 놓고 남편과 함께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비가 흰 눈으로 바뀌어 흩날리고 있었다. 돌아가시는 길이 걱정되어 눈길이 미끄러워질 수 있으니 어서 눈이 쌓이기 전에 가시라고 했다. 재워줄 방이 없느냐고 농담까지 건네시다가 서둘러 가시는 바람에 그만 지팡이를 놓고 가셔 버렸다. 침착하지 못한 내 탓이다. 아니 어쩌면 지팡이라고 북카페에 머물게 하시는 어르신의 마음을 남겨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르신들께 사랑받는 북카페가 되어 감사하다.

노인과 북카페. 북카페 꿈꾸는 정원이 노인들에게도 꿈을 주는 곳이 되면 좋겠다.

이전 06화 이곳은 젊은 시골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