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자와 함께 무한 가득 한 접시 가득 담을 수 있는 샐러드를 높이 쌓고, 콜라를 피쳐로 주문해서 같이 마셨으며,
자판기의 밀크 커피와 율무차를 즐겨 마셨다.
거기에 하나 더하면,
세계선교를 위해 일어나 헌신을 다짐했던 뜨거운 가슴을 품은 수많은 젊은이들도 있었다.
그 시절이 갑자기 그립다.
그렇게 나름 앞서 가던 우리는 어느새,
낀 세대가 되었다.
괜히 억울한 마음도 불쑥 고개를 내미는 순간도 얼마나 많던지...
자칫 잘못하면 '라테'와 '꼰대' 취급을 받을 수 있느니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난 이런 낀 세대로 사는 게 힘들 때가 많았다.
울 남편도 요즘 신세대처럼 집안 일도 함께 하며,
부부가 좀 더 동등한 위치에 서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고 싶은 욕망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울컥 올라오곤 했다.
(남편도 많이 노력하려 애쓰는 걸 안다. 애쓰는 마음이 고맙다.)
올 추석은 조용하게 조촐히 모일 수밖에 없기에,
오히려 자연스레 시어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고부간의 간격을 좁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감사하게도 마음으로 더 가까워졌다.
어머님과 말씀을 나누다 보니 낀 세대라고 그리 슬퍼하거나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댁의 명절상
우리 시댁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결혼을 하면서 남편을 따라 서울시 성동구 응봉동이 나의 본적이 되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왕 같으신 분이셨고, 할머니를 비롯한 다른 여자들은 하녀와 같았다고 한다.
둘째 며느리로 들어오신 어머니는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교육하시는 할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혹독하게 하셨단다.
남편에게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어머니를 통해 할머니와 할아버님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되니 더 확실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내게는 남편을 더 깊이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우리 시부모님은 3남 1녀를 두셨다.
장남인 우리 남편은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늘 어머니께서 자랑스러워하시며 내게 말씀하셨다.
시동생은 학력고사 시험에서 전국 60만 명 중에 200 등 안에 들어 의대에 장학생으로 수석 합격했다. 지금은 병원 원장이 되어 인품과 겸손까지 겸비했다. 거기에다 신앙까지 좋다. 남편이 고등학교 때 시동생을 전도해서 지금까지 서로 동역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세상에 둘도 없는 진정한 동역자이다.
아가씨는 내가 봐도 미인이다. 고모부도 의사이고, 조카들은 공부까지 잘한다. 둘째 조카는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고, 첫째 조카는 이번에 조기 졸업하고 카이스트 시험을 앞두고 있다.
막내 서방님은 나이 터울이 좀 많이 난다. 어머니께서 늦게 막내를 두셨다.
지방에 있는 회사의 사원 아파트에서 오손도손 잘 지내는 거 같다. 보은 쪽이라 철마다 막내동서가 대추와 딸기까지 챙겨서 택배로 보내줘 모든 형제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우리 시부모님은 복이 참 많으신 거 같다.
나는 큰며느리지만, 바로 아래 둘째 동서와 동갑이다.
그리고 손 아래 시누이 아가씨는 우리보다 한 살이 더 많다. 늦게 들어온 막내 동서는 우리랑 띠동갑이라서 우리 세 며느리의 띠가 같다.
우리 세 며느리의 이름도 신기하다. 막내 동서의 이름은 내 이름의 '경'과 둘째 동서의 '미'가 합쳐진 '미경'이다. 하늘이 내린 운명일까?
따지고 보면 시누이 아가씨가 제일 언니이다. 우리에게 꼬박꼬박 언니라 불러주고, 언니 대접을 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나이는 못 속인다고 역시 시누이는 우리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나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시댁에서 쉬다가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부탁했다
"커피 좀 타 주세요."
"응.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편을 어머니께서 따라가시며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커피를 타니? 집에서도 그러니?"
나는 세상 불편한 분위기를 보고는 얼른 일어나 내가 가서 커피를 타 마셨다.
지난 추석 때 시댁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때 나는 이 일로 마음이 많이 안 좋았었다.
아니, 어쩌면 실망스러웠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거 같다.
또 하나의 시댁 명절상
이번 명절에는 남편이 한 술 더 뜬다.
아침, 점심, 저녁 계속 식탁을 차리고 설거지하는 게 미안했던지 점심을 먹고 숟가락을 놓더니 남편이,
"내가 설거지할게요."
갑자기 분위기가 얼음이 되었다. 얼른 내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내가 할게요. 집에서 좀 해주시죠."
남편이 민망한지 다시 말한다.
"아니, 배가 불러서.."
어머님이 그제야 말씀하셨다.
"배부르면, 휘익 한 바퀴 돌고 와."
점심을 먹고 난 후 어머니와 식탁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남편에 대한 바람들을 투정 부리며 말씀드렸다.
"시골에 사니까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도와달라고 하면, 잘 안 해요. 어머니."
"그러게 말이야, 내가 공부만 하라고 하고 아무것도 안 시켜서 일하는 게 몸에 안 익어서 그럴 게야. 공부만 시키면 잘하는 줄 알고 그렇게 키웠는데, 그게 아닌가 봐. 내가 그렇게 키워서 그래. 내 잘못이지 뭐니."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뭉클했다.
그리고 오랜 묵은 이야기들을 꺼내 놓으셨다.
"내가 지금 와서 이야기하는데, 네가 처음 시집와서 남편한테 '이것 좀 해주세요!' 하는데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어머니께서 속에 있던 말씀을 건네 오셨다.
"아, 그러세요? 저는 같이 서로 도와서 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 나는 그렇게 안 살아와서 쟤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하나 싶었어."
"그렇게 생각하시었는지 몰랐어요. 죄송해요."
"아니야, 세상이 많이 변했어. 텔레비전도 보고 듣고 많이 배워야 해. 요즘 사람들이 어디 우리같이 하겠니."
어머니도 많이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며,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한편으로 죄송한 마음까지 생겼다.
나도 내 속에 담아 둔 마음속 이야기들을 꺼내 놓고,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살고 있는 거리만큼이나 멀어진 마음의 간격이 좁혀지는 거 같아 감사했다.
외국에 살면서 더 가까이 나누지 못하고, 때로는 오해하고 짐작만 하며 서운하게 여겼던 것들까지 다 녹아지는 것 같았다.
9년 만에 명절을 한국에서 보내며 온 가족이 다 함께 모일 수 없어서 아쉬웠던 터였다. 하지만, 찐하게 시부모님과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된 거 같다.
'전화위복'이라 하면 어떨까?
'뭐 이런 명절이 다 있을까? 정말 너무한다.'며 투덜투덜했는데, 오히려 감사한 설날이 되었다.
나 또한 시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은 더 마음으로 이해하고 알 수 있게 되어 좋다.
남편에 대해서도 이제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된 거 같다. 그래도 아직 그리 늦은 건 아니다.
오는 길에 어머니께서 화분에 가꿔 놓으신 줄기를 떼어 주셨다. 내 화분에 옮겨 심어 예쁘게 키워야겠다. 어머니는 나하고 취미가 비슷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