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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집

당신에게 잠시 신이었던

단편소설 1

by 시언

“당신이 드러나고 있다 나는 당신을 듣는다 얼마나 가까이 다가왔는지”

시인 유희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中


1.

어떤 인생이건 신이 곁에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당신의 경우엔 10여년 전 여름, 고시원 건물 앞 인도에서다.


2.

그해 폭염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다만 그해 여름이 기상학적으로도 ‘기록적’인 폭염이었는지는 당신으로선 확신할 수 없다. 그때 당신의 집은 1평을 간신히 넘긴 월세 15만원짜리 고시원이었던 까닭이다. 햇볕과 눈보라는 만인에게 평등하되 더위와 추위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23살의 애어른인 당신은 일찍 배운다.


방과 방 사이가 시멘트여서 방음만은 철저하다는 고시원 총무의 호들갑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았다. 하지만 옆방 사람이 몇 번째 손가락으로 등을 긁는지 추측할 수 있을 거라곤 당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다. 중앙통제식 냉방은 새벽 6~9시까지만 가동됐는데, 왜 하필 그때였는지 당신은 지금도 종종 궁금해한다.


잠귀까지 밝은 당신, 에어컨이 켜지길 기다리며 자격증 공부에 박차를 가한다. 굉음과 함께 공급되는 냉풍에 잠시 눈을 붙였다 떼면 솥밥집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시간이다. 에어컨 리모컨을 독점한 총무가 여름 휴가를 떠난 며칠 동안 당신은 싸구려 보드카의 힘을 빌린다. 그때 당신이 기울인 노력은 강박적이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누적되면 가장 약하게 타고난 곳부터 탈이 난다고 했다. 당신의 경우엔 공황장애다. 이 병의 여러 특징 중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자신이 당장 죽거나 미쳐가고 있다는 급박한 공포와, 그 공포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환자 자신만은 또렷이 인식한다는데서 발생하는 괴리감이다. 누가봐도 미친 사람이나 할 법한 생각을 하루종일 반복 중이란 사실을, 자기 자신만은 명징한 정신으로 인지한다. 당신은 당신이 차근차근 미쳐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성실한 당신, 병마와 싸울 때조차 근면하다. 날뛰는 불안이 잦아들 때까지 걸은 날엔 양 발바닥에 피물집이 맺혔다. 요즘 별 일 없냐 묻는 부모님에겐 더할 나위 없다고 생긋 웃어보인다. 건물 어딘가에서 들리는 기계음이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모두가 잠든 새벽에 공용 세탁실문을 박차고 들어간 적도 있다. 세탁기는 아주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때 당신은 이제 다 멈추고 싶어진다.


3.


“학생, 왜 그래요? 괜찮아요?”

“아니 그...그...저기...전봇대에서...소리가요”


살다보면 신이 곁에 머물다 가는 순간이 있다고 했다. 그날 당신 앞에 나타난 신은 벼룩시장 신문을 둥글게 말아 손에 쥔 초라한 노인의 행색이다. 전신주 공사 중 발생한 ‘삐-’ 소리를 환청으로 착각해 파자마 차림으로 대낮의 거리에 뛰쳐나온 당신,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가늠하지 못한다. 귀와 전봇대를 몇 번 번갈아 가리키자 노인은 용케 알아듣는다.


“아~ 저기서 나는 소리가 학생한테만 들리는 걸까봐 무서웠다고요? 괜찮아요. 괜찮아. 나도 들려요. 학생이 이상한 거 아니야”


노인은 30분쯤 공사중인 전봇대 밑에서 파자마 차림인 당신을 안고 토닥인다. 당신이 안정을 되찾자 그는 색이 바랜 잔스포츠 가방에서 포카리스웨트를 꺼내 건넨다. 당신이 다급하게 음료를 마시는 동안 노인은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조용히 등을 돌려 사라진다. 뒤늦게 숨을 고른 당신, 감사인사를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쫓아가지만 신은 건너편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그해 겨울 당신은 공황장애와 작별한다. 이듬해 자취방으로 옮길 짐을 꾸리던 당신, 문득 신이 포카리 스웨트와 함께 남긴 마지막 말을 환청처럼 다시 듣는다.


“학생은 잘해왔어. 내 나이쯤 되면 다 보이거든. 그러니까 앞으론 마음을 좀 편히 먹어요. 그럼 괜찮을거야. 날 믿어봐요”


* 이 글은 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실화를 종합해 쓰여진 단편소설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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