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그들의 생각 덕분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건 그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애다 - 애덤 스미스
나는 근대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남자의 어록 중 가장 유명한 문장을 떠올렸다. 내 집 바로 옆 빌라의 담벼락을 들이받은 채 늙은 경주마처럼 푸르륵 거리고 있는 낡은 화물 트럭 앞에서.
-
나는 대로에서 날개처럼 옆으로 뻗은 고바위 위 전셋집에 산다. 3년 전, 나를 차에 태운 부동산 중개인은 언덕길을 오를 때 이래도 되나 싶을만큼 과속했는데, 이는 집이 대로변에서 생각보다 가깝다는 인식을 내게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대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집이긴 했다. 하늘에 가닿을 듯 뻗친 언덕의 각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입주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땐 ‘이 동네 주민들은 참 날씬하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주차 시설이 열악한 동네의 특성상 매일 자가용을 운용하기엔 제한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대다수 주민들은 이 높은 언덕을 매일같이 걸어서 오간다는 뜻이 된다. 장이라도 봐오려면 한겨울에 구슬땀을 쏟는대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현실은 달랐다. 고바위 위 주민들이라고 더 날씬하진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곧 깨닫게 되는데, 바로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골목과 골목을 바삐 오가는 각종 택배회사 트럭들 때문이었다. 평지에 사는 주민들은 종종 걸어가서도 보는 장을, 우리 고바위 위 주민들은 온라인 마켓 주문으로 전부 해결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동네 택배기사들의 일거리를 늘리는데 동참하기까진 입주 후 2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 택배들은 사전에 예고된 시간 내에 정확히 문 앞에 놓여 있었고, 덕분에 나는 마트가 천릿길인 이곳에서도 만족스런 저녁식사를 차리는 법을 터득해갔다. 그리고 오늘, 나는 옆집 빌라 담벼락을 들이받은 채 푸르륵 거리는 낡은 택배 트럭과 마주했다.
동네 고바위 중에서도 가장 급경사인 언덕에서 내려온 것으로 보이는 트럭의 앞바퀴는 우리 집이 있는 골목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통화중인 기사의 옆을 왜인지 조심히 지나쳐 집에서 잠시 숨을 돌리니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배송완료] 주문하신 택배 1박스를 문 앞에 배송했습니다”
오늘 내가 받은 택배상자가 꼭 사고차량 기사가 가져다 놓은 것이라곤 장담할 수 없다. 설령 사고차량 기사가 가져다준 게 맞다하더라도 내가 죄책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우리가 바라보는 건 그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애”라는 애덤 스미스의 냉정한 분석에 따르면 말이다. 각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이기심으로 한쪽은 택배를 주문하고, 다른 한쪽은 이를 배송했을 뿐이다. 거래에 ‘미안’, ‘감사’와 같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상가도, 경제학자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고차량 기사님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을 얼마든지 느껴도 된다. 하늘로 뻗친 언덕 위 주민인 나는, 매번 정확한 시간에 문 앞에 놓여있던 택배상자와, 그 안에 든 새송이 버섯과 두부로 끓인 된장찌개의 맛과, 가끔 마주치던 택배기사들의 팔뚝이 땀에 절어 있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바라보는 건 이들의 자기애가 아닌 근면함이다.
출처 : 논객닷컴(http://www.nongae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