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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집

부조금이란 무엇인가

by 시언

부조(扶助) : 잔칫집이나 상가 따위에 돈이나 물건을 보내어 도와줌. 또는 그 돈이나 물건


친구들의 청첩장에 어느덧 익숙해졌다. 동성인 남자친구들은 예비 아내가 심혈을 기울여 골랐다면서도 왜인지 면구스럽다는 듯 청첩장을 건네는 경우가 잦다. 이는 이미 여러 장의 청첩장을 받아온 본인 자신들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일단 청첩장을 받아들면 ‘부조는 얼마를 해야 되나?’하는 생각부터 든다. 결혼 당사자들이야 하나같이 “편하게 와서 맛있는 거 먹고 가~”라고 하지만, 이런 말을 문자 그대로 믿는 이가 ‘알잘딱깔센’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순탄한 사회생활을 하기란 그야말로 난망할 것이다. 청첩장은 하나의 질문이다. 알아서·잘·딱·깔끔하게·센스 있으면서도 나의 이번 달 가계에 심대한 타격을 주지 않는 액수란 대체 얼마인가.


그러고보면 결혼식을 기점으로 인간관계가 정리됐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당장 어제와 지난달과 작년에 전해들은 사연들만 해도 그렇다. 이쪽 분야 고전 레파토리의 주된 갈등 요소는 ‘결혼식 불참’ 또는 ‘알아서 잘 깔끔하지 못한 부조 액수’인데, 나는 언뜻 별개인 듯 보이는 이 두 가지 갈등 요소간의 인과관계가 성립한다고 생각한다.


결혼식을 기점으로 인간관계가 정리되는 가장 큰 이유는 오늘날 부조금이 우정의 환산값으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양가 부모가 앞서 ‘뿌린’ 것을 거두는 성격의 부조를 제외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 값으로 환산할 수도, 환산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되는 종류의 것을 환산한 결과로서 오늘도 여러 친구 및 지인들이 정리 당했을 것이다. 부조 문화만 간소화 됐더라도 많은 이들이 결혼식 이후에도 친구로 남지 않았을까. 부조로 간신히 밥값만 냈던 친구가 어느 날 돌연 전화를 걸어 “얼굴 한 번 보자. 내가 한잔 살게” 멋쩍게 웃으며 소주잔을 부딪칠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어제와 지난달과 작년에도 나는 종종 아쉬웠다.


부조의 원래 취지는 달랐을 것이다. 아마 매년 보릿고개를 넘기는 와중에도 자식들 시집·장가는 보내야했던 우리 조상들이 같은 처지끼리 십시일반 돈과 음식을 모으던 게 시초이지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멀기만한 나랏님들 대신 돈과 밥으로 마을 주민들간의 연결감을 재확인하는 따스한 연대의 세레모니이기도 했겠다.


이쪽이 도운만큼 저쪽의 도움을 기대했으리라는 점에서 과거도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다 반박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날 결혼식장을 잡고, 스·드·메를 예약해, 청첩장을 돌리는 이들은 최소한 밥을 굶고 있지 않다. 어려운 와중에 큰일을 치르는 이웃을 돕는다는 의미가 풍화된 자리엔 얘가 몇년만에 연락한 건지, 집들이 때 뭘 해줬었는지, 이번 달 여유 자금과 가야할 결혼식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해야만 하는 현대인들이 있다. 이렇듯 의미를 상실한 채 형식만 앙상히 남은 전통은 대개 여러 사람을 고달프게 만든다.


청첩장 모임 후 귀가길에 켠 유튜브에선 재테크 전문가라는 아무개가 시드머니 1억원을 모을 때까진 함부로 먹지도, 자지도 말라 설교 중이다. 작년쯤 ‘이 채널을 더 이상 추천하지 않음’ 버튼을 눌렀던 것 같은데, 아마 또 다른 전문가인 모양이다. 시드머니 1억원을 향한 비장한 대장정에 결혼식 부조는 예외인건지, 예외라면 지난주보다 1700원 오른 계란값은 어떻게 하면 좋은지, 괜히 따지듯 묻고 싶어지는 요즘이다.


출처 : 논객닷컴(http://www.nongae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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