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초상
‘잃어버린 나를 찾아 떠나는 인도 배낭여행’
-from. 내일투어 공식 블로그
요즘은 너도 나도 여행을 간다. 물론 여행이라는 게 돈 많고 여유 있는 사람들만의 특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연휴가 3일 이상만 돼도 피곤에 찌든 얼굴로 동남아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 지인들을 보고 있으면, 어쩌면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엇을 찾아 사람들은 제주도로, 캄보디아로, 인도로 그 지난한 여정을 떠나는 걸까? 여행에서 돌아온 이들이 말하듯 ‘경치가 예뻤다’는 느낌을 위해서? 글쎄, 시쳇말로 ‘죽이는’ 풍경을 보러 떠나는 것 또한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기엔 사람들이 여행에 들이는 수고가 너무 크다. 이런저런 풍경에 무심한 편인 나도 무작정 여행을 떠나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이밀 때가 많았으니까.
나의 결론은 ‘사람들은 '나'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조직이라는 거대한 구조 안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톱니바퀴로 전락해 버린 대다수 현대인들에게 '나'란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다. 어제도, 그제도, 한 달 전도 딱히 구분되지 않는 그저 그런 생활의 연쇄 안에서 현대인들은 점차 자신을 잃어간다.
<사진출처= 포토그래퍼 '제임스'>
“그럼 어딜 가려구요?”
“어디로든 가려고 해.”
“거기가 어딘데요?”
“몰라, 그냥 곧장 가보는 거지...”
“그럼 굳이 어디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내의 목소리는 마침내 쇠북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니, 갈 곳이 있지. 그게 어딘지는 몰라. 하지만 가야만 하는거지.”
-본문 184P, 「말발굽 소리를 듣다」 중
“권 선생은 어쩌면 아기 어른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몸만 커다란, 아니면 우리와는 아주 다른 곳에서 살다 온 이방인이었는지도... 그걸 숨기려고 그렇게 애를 썼다는 생각이 들어요“
-본문 129P, 「불귀」 중
<은어낚시통신>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헤매는 자들이다. 그들은 부서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헤매지만, 결국 종착지에는 닿을 수 없다. 애초에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망각해 버린 여행이랄까.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노라’라고 선언했다. <은어낚시통신> 속 등장인물들의 방황은 괴테의 방황과는 다르다. 괴테의 방황이 최선의 나를 찾기 위한 ‘낭만주의적 방황’인 반면 윤대녕의 방황은 삶의 무의미함을 견디기 위한 ‘존재론적 방황’이다. 여기도 내 자리가 아니라는 이질감에 떠밀린 그들은 기약 없는 방황을 계속한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불감증이에요. 사랑이 뭔지, 뭐 그게 자기감정에 속는 일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지만 아무튼 그런 속는 감정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살면서 한 번쯤은 그럴싸하게 부서져봐야 할 텐데요. 독충 같은 여자를 만나서 말이죠. 가끔 처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는 게.”
- 본문 331P, 「그를 만나는 깊은 봄날 저녁」
나는 '진짜 나'를 온전히 인식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곧장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우리는 그저 '나는 ~의 자식이다', '나는 ~~ 에 속한 사람이다'같은 사회적 맥락 속의 자신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여행에서 돌아와 나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여행에서 저마다의 사건과 마주친다. 인용문처럼 '독충 같은 여자'일 수도 있겠고, 여행이 끝난 후에도 이상하게 눈가에 어른거리는 거리의 낙서일 수도 있다. 평탄한 의식의 수면 위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건이 된다. 사건과 조우하는 찰나의 순간, 사람들은 진정한 '나'를 만난다. 남들은 다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트래킹 코스를 고집하는 나, 동료들은 다 웃어넘기고 마는 길거리 낙서 문구를 곱씹게 되는 내 모습을 새삼스러워하며, 사람들은 잊고 있던 자기 자신과 조우한다. 잃어버린 '나'의 퍼즐 조각 하나씩을 가슴에 품은 채, 사람들은 생업의 현장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비단 거주지를 떠나 교통편에 올라타는 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비행기에 타든 타지 않든, 우린 모두 인생이란 여정에 나선 여행자인 셈이니까. 그 누구도 밟아본 적 없는 길을 걸으며, 크고 작은 사건들과 마주치면서, 우리는 여행을 계속한다.
‘신호등은 왜, 희망을 가져다주지도 않으면서 늘 나를 뒤뚱거리게 하는 푸른색이었던가.’
-193P, 「국화 옆에서」 중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내디뎠던 무수한 시도들을 나는 오늘날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이젠 나를 찾는 여정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마다, 희망이란 놈은 관능적인 푸른빛으로 점멸하며 나를 유혹한다. 이 여행만 다녀오면... 이 책 한권만 읽으면... 사랑하는 사람만 생기면... 그러기만 하면... 기어이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걸듯, 속도 없는 나는 또다시 뒤뚱거리며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