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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문집

내 허름한 안식처의 추억

강들이 모여드는 곳

by 시언


누구나 자기만의 안식처를 하나쯤 갖고 있기 마련이다. 커피 향기와 재즈 음악이 흐르는 집 앞 카페일 수도 있고, 나만 아는 동네 야산 중턱의 벤치일 수도 있다. 지친 나의 영혼을 돌아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안식처가 될 수 있다. 나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세상이 버거울 때 찾게 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안식처는 우리 모두의 '믿는 구석'이기도 하겠다.


서울을 떠난 지 11,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난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돌아왔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어디든 나만의 산책로가 펼쳐지던 시골과 달리, 서울은 언제 길에든 실내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혼잣말하며 걷는 산책 습관에 제약이 있긴 했지만, 소설 속에 등장할 법한 운명적 만남에 대한 기대로 나는 한껏 고무되었다. 20. 사랑을 위해서라면 세상 그 무엇을 버려도 아깝지 않던 나이였다.


그러나 젊은 날의 꿈이 그러하듯, 나의 꿈 역시 고장 난 지퍼처럼 덜거덕 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대학 동기들은 당시 100kg에 육박했던 나를 비웃었고, 내가 통보받지 못한 동기 단합회가 늘어갔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날이면 어김없이 친하지도 않은 동기가 다가와 엄지를 치켜세우며 '오늘 스타일 죽인다'며 이죽거렸다. 모두가 나를 비웃는 듯 한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지금은 그들 역시 철이 없었을 뿐이라 생각한다. 허나 긴 시간 앞에서도 아물지 않는 상처가 있음을 나는 그때 알아 버렸다.


결국 나는 여름방학이 시작됨과 함께 학교와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동기들을 만나는 대신 매일같이 운동을 했다. 트레이너를 고용할 돈이 없었으므로 구청에서 빌려주는 무료 자전거를 3시간씩 탔고, 기숙사로 돌아온 후에는 헬스장으로 가 역기를 들었다.


팔 굽혀 펴기 10개도 못하는 체력으로 하루 5시간씩 운동을 했으니 몸이 성할 리 없었다. 러닝머신 위에서 다리가 풀려 발목을 삐기도 했고, 밤마다 비명을 질러대는 근육들 때뭉에 불면증은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건 그림자처럼 징그럽게 따라붙던 외로움이었다.


한강 공원에서 뻑뻑하게 뭉친 두 다리로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으면 사람들이 보였다. 서로에게 기댄 채 천천히 걷는 연인들부터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박장대소하는 친구들까지. 그들을 보고 있으면 가슴 언저리가 시큰거렸다. 왜 나는 저들 사이에 있을 수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의 연쇄를 멈추기 위해 더욱 세차게 페달을 밟아봤지만, 시선은 끈질기게 사람들을 쫓았다.


외로움이 나를 삼킬 때, 내가 찾은 안식처는 학교 앞 코인 노래방이었다. 성인 세 명이 들어가면 가득 차는 작은 공간에서 나는 목이 터져라 노래했다. 한없이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던 날이면 임재범의 <비상>, 너무나도 지쳐 꿈도 희망도 포기하고 싶을 때면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을 불렀다. 가슴속 설움이 다 삭혀질 때까지, 몇 번이고.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앞에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시간은 위대한 의사라 했던가. 살이 빠지고 내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으면서 무너졌던 내 자신감도 서서히 회복되었다. 힘든 시기가 지나가면 일기를 쓰는 날이 줄어들듯이, 내가 노래방을 찾는 날도 점차 줄어들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을 만나느라 노래방의 존재 자체를 잊은 날도 많았다.


그때의 내게 코인 노래방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쉽게 미혹되고 쉽게 상처받던 그 시절, 코인 노래방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내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그곳에서만큼은 난 누구의 시선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온전한 나일 수 있었다. 그곳을 알게 된 건 내가 누린 몇 안 되는 행운이었다.


수십 번의 계절이 지나가고, 나는 공휴일이면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드는 보통의 현대인이 되었다. 내 시간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옮겨지는 온갖 희의 시간들을 보며 난 어안이 벙벙했다. 난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인 사람이라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내 생일이라는 이유로 다음 날 등교도 잊은 채 우리 집 앞 술집에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들을 보며 문득 울컥하곤 했다.


빈틈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지하 특유의 탁한 공기와 칠 벗겨진 마이크마저도 정겹던 그곳에서, 언젠가 누에고치를 벗고 비상할 날을 노래하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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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찾은 나의 안식처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소박한 꿈을 두 손 가득 부여잡은 채 노래하던 20살의 나를 기억한 채로. 보르헤스의 소설처럼 우연히 그때의 나와 마주치는 날이면, 오랫동안 전하고 싶던 한 마디를 건네고 싶다.


'그래, 잘 견뎌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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