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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Nov 20. 2016

영화 <타인의 삶>; 누군가를 상상한다는 것

이건 저를 위한 책입니다


'낯선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방어의 대상은 타자성 그 자체이다. 아무런 적대적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은 타자도,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도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 한병철, 피로사회8p


 낯선 것들은 경계의 대상이다. 내 편이 아닌 모든 것, 내가 아닌 모든 존재들은 내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농후한 잠재적 용의자다. 내 몸 어떤 부분을 망쳐놓을지 알 수 없는 병원균을 대하듯, 사람들은 미확인된 모든 것들을 두려워하며 경계한다.


 1984년 동베를린 독재 정부의 작동 방식도 이와 같았다. 동독 정부는 이른바 반동분자를 색출하기 위해 10만 명의 감청 요원과 20만 명의 스파이를 운영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국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시민들을 납치, 감금, 폭행하는 동독 보안부의 모습은 우리 몸에 유입된 외부 균을 격멸하는 백혈구와 닮아있다. 우리와 다른 것은 불온하다. 떳떳지 못한 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폭력은 단순했고, 단순한 만큼 잔인했다.


"저 놈 수상해"

 수십 년간 국가 보안부 수사관으로 일해 온 비즐러는 극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극작가 드라이만을 주목한다. 긴 세월동안 불온한 자들의 냄새를 쫓아온 그의 기민한 후각이 반응한 것이다. 비즐러는 보안부 상관인 그루비츠에게 드라이만을 밀착 감시하겠다고 자원한다.                

     

 비즐러의 요청에 따라 드라이만 밀착 감시 계획, 일명 '라즐로 작전'이 수립된다. 드라이만이 외출했을 때 그의 집에 들이닥친 도청 팀은 거실과 부엌, 현관 등은 물론 침실에까지 도청 장치를 설치한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이 집에서 나누는 모든 대화를 감청하기 시작한다.


 비즐러에게 드라이만은 '불순분자 유력 용의자'로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다. 드라이만이 연인과 사랑을 나누는 소리들마저도 비즐러에겐 '성관계를 맺은 것으로 판단'되는 소음에 불과하다. 충성스러운 사냥개로서 정부의 적들을 물어 죽여 온 비즐러의 정체성은 단 하나, '보안국 수사관 비즐러' 뿐이다. 수사관 사무실을 벗어난 비즐러의 퇴근 후 생활은 공허하다. 비좁고 단조로운 비즐러의 빌라는 그의 빈약한 내면을 상징한다.

 반면 극작가 드라이만의 생활은 제한적일지언정 인간적이다. 진보 예술가, 사랑스러운 연인, 신뢰받는 동료인 드라이만의 삶에는 희로애락이 존재한다. 탄압받을 때는 분노하고, 실패했을 때는 좌절하며, 동료들과 연대하며 다시 일어서는 드라이만의 삶은 비즐러에게 묘한 감상을 일으킨다.


 드라이만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던 비즐러의 시선은 '상상'의 영역으로 옮겨진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의 슬픔과 이상, 희망들을 상상하고 그에 공감하기 시작한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타자를 상상하며 잊고 있던 인간성을 복구해가는 비즐러의 노력은 서툴지만 끈질기다. 드라이만의 미심쩍은 발언이나 행동을 적는 비즐러의 기록장에는 '특이 사항 없음'이란 표현이 늘어간다.

 결국 요주인물이던 드라이만은 비즐러의 묵인으로 목숨을 건지고, 작전의 책임자였던 비즐러는 노역장 인부로 좌천당한다. 타자(드라이만)와의 접촉이 한 사람의 운명까지 영영 뒤바꾼 것이다. 그러나 전단지를 돌리며 생활을 이어가는 비즐러의 표정은 후회나 자책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의 마지막 씬에서, 그는 분명 웃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 간부 아이히만은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을 체포, 처형했다. 그가 발명한 '가스실 열차'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유대인들이 비명횡사했다. 종전 후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그는 자신의 직업에 충실했던 것이 죄가 되느냐고 항변했다. 예루살렘 재판정은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법정공방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에게 '무사유의 죄'를 선고했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상상해보지 않은 것이 그가 저지른 죄였다.


 비즐러는 낯선 타인(드라이만)에 대한 경계심과 이질감을 무릅썼고, 결국 자신이 신봉해 온 신념까지 폐기했다. 만약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삶과 감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더라면, 비즐러는 아이히만과 같은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 한 해 한국 사회는 이성 혐오 범죄들로 홍역을 치렀다. SNS에서 남과 여는 각자의 위치를 고수하며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과 그로 인해 촉발된 남혐, 여혐 갈등의 기저에는 '나와 다른 이에 대한 몰이해'가 흐르고 있다. 서로의 삶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생략된 논쟁은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분열될 대로 분열된 한국 사회를 향해 영화 <타인의 삶>은 무거운 화두를 던진다.


'당신은 타인을 상상하려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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