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산과 숲은 안식의 상징이었다. 퇴계 이황이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제자들과 산행을 즐긴 일은 이미 유명한 일화다. 삶에 탈진한 이들은 뿌리내린 자리에서 양분을 끌어올려 숲을 일구는 나무들의 평화로운 일생을 동경한다. 세상 쓴맛단맛 다 본 우리네 아버지들의 메신저 프로필이 십중팔구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의 삶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평화에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평화에 집착하고 숲을 평화로운 곳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삶이 치열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 『신갈나무 투쟁기』, 90p
『신갈나무 투쟁기』는 나무들의 '소박한 일생'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이 "집착"이라고 선을 긋는다. 치열한 인간사에 넌덜머리가 난 나머지 사람들은 나무들에게서 보고 싶은 것만을 본 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오롯이 신갈나무(참나뭇과의 교목)의 관점에서 서술된 투쟁기라는 점에서 이 책은 신갈나무에게 바쳐진 평전이다.
신갈나무의 투쟁은 어미에게서 분리되어 땅으로 추락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숲속 동물들과 곤충들에게 신갈나무 열매는 훌륭한 영양 공급원이다. 대다수의 열매들이 삶의 시작과 함께 천적들에게 먹혀 사라진다. 흙이 없는 바위 위나 물웅덩이에 떨어진 열매들의 운명 역시 대다수 형제들과 다르지 않다. 간신히 살아남아 싹을 틔우는 신갈나무의 일생은 청설모의 입속으로 사라지거나 고인 물웅덩이에서 썩어가는 형제의 얼굴을 직시하는 것과 함께 시작된다.
"신갈나무는 여분의 잎을 만들기로 한다. 아주 은근히 지속적으로 말이다. 막말로, 죽느냐 남느냐 두 길에서, 죽어도 그만이요 남으면 말 그대로 남는 장사다. (중략) 다섯에 하나는 아예 먹힐 각오로 만들어 낸 여분의 잎이다"
-『신갈나무 투쟁기』 239p
신갈나무는 매년 생장에 필수적인 잎 이외에 20%의 잎을 추가로 틔워낸다. 시도때도 없이 자신을 갉아먹는 벌레와 쥐들에게 내주는 제물이다. 벌레가 없는 쾌적한 땅으로 떠날 수 없는 자신의 신세가 한스럽지만 별 수 없다. 발이 없는 나무에게 뿌리내린 자리는 운명이다.
열매를 생산하는 일도 고되긴 마찬가지다. 신갈나무는 단단한 외피로 도토리들을 정성껏 감싼다. 정성껏 기른 자식들을 천적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함이다. 도토리의 안쪽이 마르지 않도록 부드러운 안감을 대는 일도 잊지 않는다. 자식들이 자신의 품을 떠나는 날부터 신갈나무는 한 해 동안 도토리 생산을 멈추고 몸살을 앓는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자식들에게 여비를 챙겨주느라 모든 기력을 소진한 까닭이다. 밑동이 썩어 거꾸러지는 날까지, 신갈나무는 이 고된 생의 사이클을 묵묵히 반복한다.
"신갈나무에게 진정한 휴식은 이제부터이다. 어미 몸에서 떨어져 나온 순간부터 한순간도 생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중략) 살고 있는 동안은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을 부여받는 순간 지켜야하는 의무였다"
-『신갈나무 투쟁기』 294p
지난했던 신갈나무 한 그루의 생명이 다함과 동시에 『신갈나무 투쟁기』는 끝이 난다. 대지에 긴 몸을 누인 신갈나무의 모습은 죽음보단 휴식에 더 가까워 보인다. 매순간 '투쟁'이라는 생명의 본질에 충실했던 존재에게 죽음은 곧 안식이다.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라면 마땅히 있는 힘껏 한 생을 살아내야 한다. 극복할 수 없다면 이를 악물고 끝까지 엉버티기라도 해볼 일이다. 탄생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안식에 든 신갈나무의 잔해는 우리에게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