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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Aug 10. 2017

영화 <핵소 고지>: '살려야 한다'는 말

이 영화는 실화다

출처 = 한계례


2014년 4월 16일. 전날 인천 연안 여객터미널을 출발한 세월호가 진도 앞 바다에서 침몰했다. 탑승 학생의 구조 요청에 목포 해경은 "위도와 경도가 어디냐"고 반문했다. 좌표 확인 장치가 없었던 학생은 답할 수 없었다.  선장은 "현 위치에서 대기하라"는 안내 방송을 남긴 채 탈출했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이국종 아주대 외상의학과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수대의 구조 헬기가 현장에 있었으나, 기동하지 않았다. 총 476명의 탑승자 중 생존자는 172명이었다. 


1년 후인 2015년 5월 20일. 바레인에서 입국한 60대 남성이 메르스(중동호흡기 증후군) 확진 판정을 받았다. 2003년 아시아 전역을 떨게했던 전염병 '사스'보다 치사율이 6배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나라는 카오스에 빠졌다. 온라인에서는 최초 확진자에 대한 증오가 들끓었고, 일선 학교들은 휴교에 들어갔다. 보건 당국은 "낙타 고기나 낙타유 섭취를 피하라"는 공문을 내려 보냈다. 청와대는 대통령이 일선 의료진과의 화상 통화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노란색 민방위복 차림의 대통령 옆 벽면에는 '살려야 한다'고 인쇄된 종이가 게재되었다.



출처 = 영화 <핵소 고지> 캡처

데스몬드 도스 이등병은 문제아다. 병영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가 총기 소지를 거부하는 ‘제 7일 재림교’ 신자이기 때문이다. 의무병으로서 전우들의 목숨을 살리겠다는 도스의 신념은 비릿한 경멸로 돌아온다. 그들은 소총이 없는 전우를 믿지 않는다. 미 의회법은 집총을 거부하는 병사가 의무병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 도스를 합법적으로 퇴출시키는 방법은 없다. 남은 방법은 하나, 그가 제 발로 걸어 나가도록 만드는 것 뿐이다.


폭언과 폭행, 악의적인 따돌림 속에서도 도스는 묵묵히 훈련에 임한다. 그는 ‘살려내겠다’는 단순한 신념을 관철하는 중이다. 병기가 없는 병사가 적군과 조우했을 때의 사망확률은 병기를 지닌 병사의 경우보다 비약적으로 높다. 그의 손이 적에게 닿기도 전에 그의 심장은 관통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그가 믿는 교리는 생명은 존귀한 것이라 가르쳤고, 그는 그 가르침을 수행할 따름이다. 신념이란 힘써 지켜낼 때 비로소 빛난다고 그는 믿는 듯 보인다.


출처 = 영화 <핵소 고지> 캡처

전장에서 고지는 언제나 중요하다. 정보력이 곧 승리로 이어지는 전장에서 주변을 관망할 수 있는 고지들은 점령 우선순위 최상위다. 신병들이 투입된 전장의 이름은 핵소 고지. 오키나와 주변 일대를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전략 요충지다. 일본군은 6차례에 이르는 급습을 전부 막아냈고 도스를 비롯한 신병 부대는 7번째 기습을 감행할 것이다. 결과는 전멸에 가까운 인명 사상이었다. 부대는 100여명에 가까운 중상자들도 수습하지 못한 채 고지에서 후퇴했다.


벙커에서 나온 일본군은 미군 부상병에게 총을 쏘며 확인사살 한다. 팔다리가 잘리고 비집어 나온 내장을 쥔 채 전우들은 숨을 거둘 것이다. 절대적인 무력감과 절망. 비부상자로는 홀로 고지에 남은 도스는 하늘을 보며 울부짖는다. “주여,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이다”. 기도를 끝낸 순간, 도스는 강하고 명확한 음성을 듣는다.


출처 = 영화 <핵소 고지> 캡처
“의무병! 의무병! 도와줘!”


그것은 신의 목소리였을까, 부상당한 전우의 목소리였을까.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짐작했다. 그는 ‘살리기 위해’ 자원입대했고, 눈 앞에선 부상당한 전우들이 신음하고 있다. 그가 믿는 신은 그의 신념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베푼 것인지도 몰랐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도스는 달려간다. 


출처 = 영화 <핵소 고지> 캡처

“한 명만 더... 한 명만 더 구하게 하소서”


다음 날 전열을 정비한 아군이 고지에 재진입하기 전까지 도스는 75명의 중상자를 고지 아래로 이송했다. 그가 구한 부상병 중에서는 일본 병사 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힘써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부대원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는 양심적 집총 거부자로서는 처음으로 최고 명예 훈장인 ‘명예 훈장(Medal of hornor)’를 받았다. 2003년 인터뷰에서 그는 “진짜 영웅들은 묘지에 누워있다”며 말을 아꼈다.




출처 = 연합뉴스

혹자들은 말한다. 세월호나 메르스 같은 재해가 어째서 대통령 탓이냐고. 최선을 다해도 안되는 걸 어떻게 하느냐고 대통령을 변호한다. 옳은 말이다. 대통령은 신이 아니다. 모든 사고의 원인과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지는 않다. 최선을 다해 구하려 했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최선만 다했다면.


우리가 분노한 이유는 그가 사람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위태로워진 인명을 구하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고 당시 7시간 동안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끝끝내 함구했기 때문이고, 유가족들을 ‘정치 세력’으로 규정하고 견제했기 때문이다. ‘살려야 한다’는 말은 살리기 위해 애쓴 자들에게 합당한 말이다. 


<핵소 고지> 속 도스는 ‘살려야 한다’는 말을 쓰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췄다. 그가 75명의 인명을 구한 전쟁 영웅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타인을 살리고자 애썼던 한 인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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