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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언 Aug 22. 2017

영화 <더 로드>: 그래도 살아라

  

출처 = 영화 <더 로드>
"남쪽으로 가. 거긴 따듯해서 좋을 거야"

유언이 된 한마디만 남긴 채 아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무법 시대를 만끽하는 갱들에게든, 얼어붙은 날씨에게든, 아내는 죽었을 것이다. 존엄 있는 마지막을 선택하고 싶던건지도 모른다. 온 가족이 집단 자살하는 시대니까. 존엄이 있든 없든, 죽음이라는 결과값에는 변함이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살자니 목숨이 버겁고 죽자니 버텨온 생이 눈에 밟힌다. 버거운 목숨을 쥐고, 아버지와 어린 아들은 남쪽을 향해 걷는다.  

  

세계는 전소해 가는 중이다. 바람은 재를 실어 나르고 숯이 된 고목들이 길가에 즐비하다. 종말은 어디서 시작됐는가. 영화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인간의 자연파괴 때문일 수도 있고, 그저 세계가 수명을 다한 건지도 모른다. '왜?'라는 질문은 중요하지 않. '왜'는 길의 끝자락에 선 자들에게 합당한 물음이다. 늪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면 일단 발버둥 쳐 빠져나올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잿빛 무대 위에 섰고, 연극은 현재 진행 중이다.    

출처 = 영화 <더 로드>
"널 건드리는 놈들은 전부 죽일 거야. 그게 내 일이니까"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댄 폭력배를 쏘아 죽인 후 아버지는 말했다. 아들은 꼭 사람을 죽여야만 했냐고 절규한다. 살인자가 되는 것과 아들을 살리는 것. 아버지는 주저하지 않고 선택했다. 모진 생을 지속하게 해주는 존재가 신이라면, 아들은 아버지의 신이다. 신의 목에 칼을 댄 자를 처단한 아버지의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한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 상처 입혀온 이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나는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더 로드>는 마음이 심판받는 재판정이다. 법과 사회가 사라진 세계에서 사람들은 각자 선택해야 한다. 누군가는 폭력조직에 가담해 살인과 약탈을 일삼고 또 누군가는 최소한의 악행만 저지르면서 생을 부지한다. 아들은 비쩍 마른 노숙자에게 식량을 건넸고 아버지는 복잡한 표정으로 허락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우리는 가슴속 불을 옮기는 사람들이야"라고 말했다. 인간과, 인간의 선함에 대한 마지막 믿음을 놓지 말라는 주문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세계에서 불을 지킨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질까.    


불을 지키는 건 고된 작업이다. 가스불이 상용화되기 전, 며느리와 가장들은 아궁이 옆에 부지깽이를 들고 앉아 불씨를 지켰다. 시간마다 한 번씩 재를 뒤집고 오래 타는 장작을 넣고 나면 간신히 아침이 밝았다. 아랫목에 나란히 누워 허리를 지지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그들은 눈꺼풀에 내려앉은 졸음을 몰아냈다. 누군가는 밤을 새워 불씨를 지킨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가족은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선한 불씨를 나르는 누군가가 있다는 믿음만이, <더 로드> 속 무법 지대를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와 구분 짓는 선이다.   

  

출처 = 영화 <더 로드>

병든 아버지는 남쪽 바닷가에서 쓰러졌다. 울먹이는 어린 신은 이제 혼자서 지옥 같은 세계를 떠돌 터였다. 아버지는 가슴속 불을 잊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다. 오열하는 아들에게 장총을 찬 남성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함께 가자는 것이다. 아들은 남자에게 총을 겨누며 묻는다.  

  

"당신은 가슴속에는 불씨가 있나요?"
".... 그래. 불씨가 있지"    


<더 로드>는 반딧불을 찾는 영화다. 원작자 코맥 매카시와 존 힐코트 감독은 멸망이라는 설정을 통해 세계의 조명을 제거한 셈이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는 훔칠 테고 누군가는 죽일 것이다. 그러나 조명이 밝을 때는 보이지 않던 반딧불 몇 마리가 은은한 빛으로 무대를 밝힐 거라고 영화는 확신한다.

          

*By. 철학자 토마스 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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