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르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특정한 장소나 사물을 지나칠 때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취향이 있다는 것.
옷을 입을 때 초록색 아이템을 자주 매치하는 사람, 르라보 편백나무향 핸드크림을 늘 바르는 사람, 윤종신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자주 듣고 읽는 사람들은 오늘도 누군가에게 ‘어떠어떠한 사람’으로 구체화된다.
취향이 있는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하지 않다.
대신 자기와 잘 어울리는 것을 알고,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 법을 인지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방향이나 경향’이란 뜻을 가진 취향은 자기 자신과의 긴 대화 속에서 발현된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행복한지, 혹은 어떤 것들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는지, 그렇다면 불편한 것을 무엇으로 대체하면 좋을지, 혹은 내가 꼭 해보고 싶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이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본다.
노트를 펴고 글로 적어보자.
필기구를 잡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적다 보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이 정리된다. 본인의 취향을 정리하고 새로이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대상에 빠져보자.
본인의 취향을 자기 자신이 객관화하기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주변의 사람들에게 내가 언제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물어보자.
그것이 일반적이고 구체적이지 않다면, 취향을 갈고 닦아야 한다. 만약 꽤나 구체적인 답변이 나온다면 더욱 집요하게 물어 취향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시켜야 한다.
이처럼 취향을 만드는 건 꽤나 까다롭다. 까칠한 사람이 추천하는 맛집은 평균 이상일 확률이 높다는 말 있지 않은가. 얼마나 많은 음식점을 드나들며 맛을 보고, 본인만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비용을 지불했을까. 그리고 그걸 어떤 사람들에게 추천할 때 반응이 좋을지 평소에 고민을 한다는 것이다.
만약 남들과 다른 특별한 나만의 색깔이 없다고 느껴진다고 성급하게 생각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알맹이가 없는 텅 빈 하얀 그릇 같다고, 매력없는 사람이라 본인을 평가하지 않아도 된다. 하루키는 한 소설에서 취향에 대해 말한다.
“혹시 네가 텅 빈 그릇이라 해도 그거면 충분하잖아. 만약에 그렇다 해도 넌 정말 멋진,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그릇이야.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그런건 사실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 안해? (중략)
네 말대로라면, 정말 아름다운 그릇이 되면 되잖아.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그 안에 뭔가를 넣고 싶어지는, 확실히 호감이 가는 그릇으로.”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개인적인 나의 취향들이 너무 일반적으로 사소해 보인다면, 그건 누군가와 함께 즐겨도 보편적으로 향유하고 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이지 않을까. 가장 보통의 취향을 가졌지만 그 속에서 지속적으로 디테일을 찾아간다면, 그 취향이 깊어져 나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타인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