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정치의 변화)
복음이 외치는 정의를 말하다. — 정의는 제도가 아니라 삶이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4)
정의를 외치던 시대 — 하나님은 왜 침묵하셨는가?
아모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누리던 시기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시장은 더없이 활기가 넘쳤다.
국경 또한 견고하여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
종교적 열심 또한 지극히 커서 성소마다 제물의 향기가 넘쳐났다.
그러나 이 시대를 향한 성경의 외침은 그와는 반대의 결에 있었다.
그래서 의아함이 커지고 그 물밑에서 이뤄진 노골적인 삶의 모습이 있었음이다.
그것이 이 시대를 심판 직전으로 표하는 이유다. 왜일까?
이유는 단 하나 '정의의 실종'이다.
아모스가 본 현실 — 제도는 화려하나 정의가 죽었다.
아모스는 농부였다. 정치 엘리트도, 성직자도 아니다.
그는 시장의 언어와 권력의 구조를 정확히 보았다.
- 가난한 자는 헐값에 팔렸고 - 신 한 켤레 값에 팔려 갔다.
- 재판은 돈으로 왜곡되었으며 - 뇌물에 오염되어 약자의 권리를 짓밟았다.
- 종교는 제도화되었다 - 기득권 정당화의 화려한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때마다 예배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배를 거부하셨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며 멸시하며
너희 성회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암 5:21)
이것은 신앙 형식의 실패 이전에 삶에서 정의가 파산되었음을 선언한다.
'정의'라는 단어의 무게 — 히브리어 원어로 본 의미
아모스 5:24에서 사용된 '정의'와 '공의'는 서로 다른 단어다.
정의 — מִשְׁפָּט (미쉬파트) : 올바른 판단, 관계의 회복, 억울함을 바로잡는 결정
공의 — צְדָקָה (체다카) : 의로운 상태,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삶의 질서
즉, 미쉬파트는 판결의 정의이고, 체다카는 삶의 정의다.
하나님은 정의를 외치되 공의 없이 외치는 것을 거부한다.
제도는 정의를 말할 수 있지만, 공의는 삶으로만 증명된다.
"비를 막는 제도, 그러나 우산은 없다" — Les Misérables 장발장의 빵 한 조각
Les Misérables의 장발장은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다.
옳다! 미쉬파트의 법적 정의는 "절도는 절도다"라고 주장한다. 명료하다.
그러나 그가 훔친 것은 욕망을 채우는 '부'가 아니었다.
장발장은 가난한 농부였고, 남편을 잃은 누나와 7명의 아이들을 부양하고 있었다.
겨울이 오고, 일거리가 끊기고,
아이들이 며칠째 굶자 그는 빵집 유리창을 깨고 빵 한 덩이를 훔니다.
그 결과 5년형을 선고 받고, 탈옥 시도로 형량이 늘어나 총 19년의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아이들을 살리려다 법에 걸린 사람이다.
성경이 분노하는 지점이 여기다.
제도적 정의를 규정하면서, 삶의 체다카가 무너진 상실의 현장이다.
우리는 일상의 법과 제도 앞에 수 없이 많은 장발 쟝의 아픔을 경험한다.
복음적 정의 — 사람을 살리는 방향
복음은 정의를 법의 언어로만 말하지 않는다.
복음이 말하는 정의는 관계의 회복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라. 그분은 법을 폐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법이 보지 못한 사람을 보셨다.
세리
창기
병자
이방인
그리고 기득권에 속했지만 그러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
복음적 정의는 옳고 그름의 선을 긋기보다 무너진 인간을 다시 세우는 방향을 가진다.
그래서 복음은 묻는다.
"이 정의는 사람을 위한 것인가?"
"합법적 방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인가?"
예수와 정의 — 가장 불의한 판결 앞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정치적 정의의 완전한 실패였다.
- 불법 체포
- 왜곡된 증언
- 여론에 휘둘린 판결
-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십자가 형벌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복음적 정의가 시작된다.
예수님은 정의를 요구하지 않으시며 친히 그 몸으로 감당하셨다.
십자가는 정의가 포기된 사건이 아니라, 정의가 더 깊은 차원으로 내려간 사건이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완성으로 불린다.
거기에서 그 멀리 있던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신앙인의 자리 — 정의를 ‘요구하는 자’인가, '흘려보내는 자'인가
아모스는 말한다.
"정의를 물같이 흐르게 하라."
"공의를 마르지 않는 물 같이 하라"
정의는 곳간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것이다.
신앙인은 정의를 소유하지 않는다. 정의의 통로가 된다.
그래서 신앙인의 정치 참여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정의가 막히지 않도록 크고 작은 길을 내는 일이다.
묵상
나는 누군가를 이기고 싶은가, 아니면 누군가를 살리고 싶은가?
정치는 정의를 관리하지만, 복음은 정의를 살아낸다.
하나님은 정의를 외치는 사람보다, 정의를 흘려보내는 사람을 찾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