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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Sep 21. 2022

양산 용화사에서

김정한의 '수라도'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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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번뇌를 딱 108개로 정해버린 불교의 호기로움이 멋지다.
길고 짧음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여유로움도 또한 멋지다.

조선이 억불(抑佛)을 추구하자 세상사에 관심이 많던 이 불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듯이 모든 걸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고 몇 백 년 세월을 하루같이 보내며 언제 올지도 모를 세상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세상 수많은 절집들이 산속으로 들어갈 때, 여기 양산 용화사(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595)는 낙동강 강가에 와 있다.

대부분 일부러 가 보려고 가는 그런 절집들이다.

하지만 여기 양산 용화사는 아무런 정보도 계획도 없이 그냥 지나가다 목이 말라 잠시 차를 세우고 내려서 물 한 모금 먹다가 만난 절집이다.
다른 절집들은 산으로 계속 올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긴 20분 정도 한참을 걸어 내려가게 만든 절이다, 물론 돌아올 땐 다시 더 많은 시간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다.


우연이라는 말은 참 멋이 없다.
그래서 우연보다는 인연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우연히 여기 용화사라는 절에 왔지만, 역시 우연은 아닌 게 틀림없다.

여기서 많은 인연들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께서 부산대학교에서 아주 좋은 강의를 들었었다고 하신 요산 김정한 교수에 대해 정말 우연히 말씀하신 적이 있고, 그 바쁜 고등학교 시절, 요산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 “수라도”, “사하촌”이라는 슬프고 안타까운 소설들은 양희은의 맑은 노래들처럼 내게 작은 휴식들이었다.

그리고 그 해 내가 본 학력고사 국어문제에 모래톱 이야기와 사하촌에 대한 내용이 나왔었다.
찾아보니 얼마 전 수능 문제로도 나왔다고도 한다.

그리고 나는 요산이 강의했던 그 부산대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지금 여기 용화사는 요산 김정한 선생의 “수라도”에 나오는 미륵당(용화사)이며, 내가 20분 넘게 내려오기 전 만났던 오봉산, 명호(명지), 태고 나루터(토교마을), 대밭각단(죽전마을), 냉거랑다리(화제교), 허진사 댁(명언 마을)들이 고스란히 내가 30년도 더 전에 읽었던 그 소설 속 실제 지명들이라는 사실에 숨이 막힐 듯 설렜다.


아주 어렸을 때 봤던 흑백영화 속 날카롭게 아름답고 슬펐던 비비안 리의
'애수'(Waterloo Bridge)를 보고,

40년 후 런던의 Waterloo Bridge와 Waterloo역을 우연히 지날 때의 그 설렘만큼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때도 우리가 가야 할 역이 공사 중이라서 한 역 앞에서 내렸는데 그 역이 내가 언젠가 가 보고 싶었던 그 영화 속의 바로 그 waterloo역이라는 사실이 신기했었다.

이 모든 게 다 우연이라고만 설명하려니 너무 어지러워진다.

소설 속 미륵당에 모셔진 석조여래좌상도 그대로 그 세월 속에 30년 넘게 나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용화사석조여래좌상 대한민국 보물 제491호

아주 낮은 강가에 바로 접한 절은 참 드물다, 절집도 대웅전, 산신각, 요사채가 전부인 아주 작지만 마당 넓은 여유로운 절집이다.

오히려 건물들이 없으니 더 여유로운 건지도 모르겠다. 없음으로 해서 더 많은 공간의 여유로움, 그래도 속세의 많음의 여유도 알고 있는 나는 뭔가 아쉬움도 많이 남음을 숨길수는 없었다.
절집으로 가는 길의 아랫 경사가 만만치 않아 허벅지와 무릎에 무리가 올 정도로 힘들어 사람들도 없다(나중에 한참을 대웅전에 앉아 있으니, 자동차가 절집 마당까지 내려오네,  아! 내 무릎.........).

문이 활짝 열린 대웅전 안에서 시원한 바람과 잘 생긴 여래좌상과 함께 할 수 있는 호사를 누렸다.

미륵불보다 늦여름  법당을 감도는 작은 바람이 더 좋았고, 더 높은 초가을 풀벌레 소리가 더 좋았던 것 같다.

절 집을 나와 다시 걸어서 올라오는 길은 참 멀었다.

그래도 다음에 다시 또 오고 싶다.
그때도 그 소설 속 사람들처럼 또 걸어 내려올 것 같다.
 

집으로 오는 길에 보이던 늦은 토요일 오후의 낙동강은 30여 년 전의 내가 읽었던 그 낙동강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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