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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날 것 같지 않던 계절도 더디지만 그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고 있다.
흐린 날씨와 조금씩 떨어지는 가을비 빗방울로 인해, 저 멀리 속삭이는 이들의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린다.
식사시간이 지나 배고프다며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당황스러움이 정겹다.
먼 훗날, 저 아이에게 기억도 못할 오늘 하루도 어쩌면 문득 초가을 엄마와 정답게 거닐었던 어느 가을비 오는 날이 되어 애틋한 그리움으로 새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움..
그리움이 짙어지는 계절이다.
그래, 그리움은 왠지 이 계절과 너무 잘 어울리는 단어인 것 같다.
세상사 모든 것들이 변한다고 하셨다.
석가여래(釋迦如來)는 '모든 것은 변한다[諸行無常,제행무상]'고 분명 말씀하셨다.
변화(變化)는 많아지게도 적어지게도 하고, 짙어지게도 옅어지게도 하고, 크게도 작게도 한다.
또 옆에 존재하게도 다 없어지게도 하고, 좋아지게도 싫어지게도 하고, 같아지게도 하고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하여 그리움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인지 문득 궁금해진다.
대부분의 세상 일들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점점 작은 쪽으로, 흐려지고 옅어져 조금씩 잊히는 게 대부분인 것 같다.
사랑도, 기쁨도, 즐거움 들처럼 각자 나름의 차이나 예외는 있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들 조금씩 덜해지고 적어지는 쪽으로 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것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겉모습과 내면들이 희미해지고, 사라지고, 잊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리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짙어지고, 더 또렷해지는 것만 같다.
기억도 희미해진 오래전에 좋은 이들과 와보고, 다시 여기 큰 바위 아래 절집에 들어서니 그리움이라는 화두(話頭)가 초가을 시원한 바람 한줄기로 스친다.
이것저것 그리운 것들을 생각하며 이른 가을 산들을 따라 머문 곳은 청송 주왕산 대전사(靑松 周王山 大典寺)다.
주왕산 대전사(周王山 大典寺)큰 바위를 높이 품은 주왕산(周王山) 아래 넉넉한 절집이다.
스치는 인연들을 반갑게 맞아 주는 산아래 아늑한 곳이다.
앉아 쉴 곳을 아낌없이 주며, 함께 깊어질 가을을 애써 함께 기다려 주는 그런 곳이다.
주왕산(周王山)산을 오르려는 이에게는 격려를, 내려온 이에게는 작은 휴식을 주면서 말이다.
소식을 전하면, 늘 격려와 휴식을 보내주는 그런 친구처럼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다.
많은 이들이 지나간다.
시절을 놓친 이 계절이 수줍은 듯 조금 더 시원한 바람을 절마당에 쏟아 놓는다.
가을은 좁지 않은 절마당을 느긋하게 물들이고 있다.
좋은 계절을 기다리는 이를 더더욱 애타게 하면서 말이다.
주왕산 대전사(周王山 大典寺)또 많은 이들이 넉넉한 은행나무 아래에 앉아 서로의 일에 대해 묻고 답하고 있다.
일상의 작은 대화들이 더 작은 가을비 여린 빗방울에 가볍게 젖어 끝도 없이 웃으며 이어지고 있다.
한참을 그 은행나무 아래 삥 둘러진 의자에 앉아 보광전(普光殿) 뒤 큰 바위산을 보고 있다.
주왕산 대전사 보광전(周王山 大典寺 普光殿)
그 순간, 늘 그렇듯 그리움은 문득 스치고, 또 길게 이어진다.
늘 과거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리움이라 시간이 지나면 절대적인 그리움의 숫자는 계속 늘어만 간다.
유한한 삶 속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미래는 늘 조금씩 짧아지고, 과거는 늘 조금씩 길어지기 때문일 거다.
또 그리움은 그렇게 과거를 전제로 하기에 늘 아쉬움과 동반하는 것 같기도 하다.
돌릴 수 없는 시간이 그리움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또 그리움은 그리움 자체의 그 크기도 시간이 흐르면서 더 커지는 속성이 있는 것 같다.
하여,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리움은 그 숫자도 또 그 크기도 늘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운 이도 그리운 것들도 그렇게 더 많아지는 게 그래서 인가보다.
주왕산 대전사(周王山 大典寺)또 석가여래께서 모든 것들이 변한다 하셨듯 그리움도 변한다.
변화라는 것이 거스를 수 없는 진리라면, 그 속에서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가 더 중요할 것 같다.
그리움에 늘 동반되는 아쉬움을 최소화하는 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더 커지는 그리움을 더 예쁘게 만들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또 아쉬움이 없다면 그 그리움에는 애틋함이 줄어 슬퍼질 것 같기도 하다.
마당 넓은 절집 큰 나무 아래 또 한참을 앉아 다시 큰 바위를 올려 본다.
저 바위들 위 하늘에 높은구름이 예쁘게 떠 있는 멋진 가을하늘이 되면 그리운 이들과 다시 와보고 싶다.
그 아래 나무들도 예쁜 가을 색으로 물들면 그리움 하나 더 새겨지겠지만....
좋은 시절의 그리운 이들에게 문자라도 보내야겠다.
'그때처럼 그렇게 가을이 예쁘게 스쳐 지나려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