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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Oct 02. 2022

울산 석남사에서

번뇌가 씻겨 흘러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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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 절 앞을 지날 때면, 매표소에서 절 마당까지 거리가 부담되어 그냥 지나치기를 여러 번 했다.

그런데 큰맘 먹고 오늘은 가 보기로 했다.


여유롭다.


부담될 거라 생각된 걸음은 계곡의 물소리, 키 큰 나무들이 만든 그늘로 오히려 짧게만 느껴진다.


시간의 길고 짧음의 잣대는 인간의 절대적 측정능력은 아닌가 보다.

나이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다르듯 말이다.


여기는 울산 석남사(石南寺)다.


비구들이 수행증진하는 절집이라 그런지, 아니면 선입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마당에 들어서서 보는 첫 느낌은 단아함이다.


극도로 절제된 가람 배치에도 특유의 단아함이 느껴진다.

단아하지만 그래도 한 없 비움이 아쉬워질 때, 세상사에 찌든 이들에게 탈탈 털어버리라는 듯 그 자리를 당당하게 제법 높은 탑이 지키고 서 있다.

정말 딱 있어야 할 곳을 아는 듯 화려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절제미 가득한 석탑이다.


탑 뒤에 석가여래와 그 양으로 보현보살, 문수보살께서 보필하시는 대웅전이 있다.

그 뒤로 예쁘게 단장된 '번뇌가 쉬어지는 길'이 흐르고 있다.

번뇌가 쉬어지는 길

한 호흡에도 다 걸어갈 수 있는 짧은 길이라서 내 안의 복잡한 번뇌를 다 날릴 수는 없겠지만, 한 순간의 깊은 호흡으로도 번뇌를 떨칠 수 있는 자신감은 가질 수 있어 좋았다.


그 길 끝에는 보물로 지정된 승탑이 소담스럽게 맞아주고 있다.

일부가 부서져 살짝 기울었지만 그런 모습이 왠지 더 번뇌에서 잠시 잊게 해주고 있어 편안 해진다.

울주 석남사 승탑 보물 제369호

다시 내려오는 길 끝에서 본 절지붕들이 넉넉하다.


소박하게 덧 댄 까치박공이 한껏 멋을 낸 팔작지붕과 어우러져 절집 지붕이 파도처럼 흘러간다.


번뇌가 씻겨 흘러가듯이.


한참을 절마당에 앉았다가 가볍게 인사드리고 나오니, 묵직한 바위들로 쌓아놓은 절집 외벽이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 말고 굳건히 이겨내라고 제 무게보다 더한 용기를 주며 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석남사 외벽


10월 늦더위가 한창인 석남사에서 가벼워진 발걸음보다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올 때보다 한층 더 짧아져 버린 그 길을 올 때보다 더 느리게 걸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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