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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Nov 13. 2022

경주 골굴사에서

비움[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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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찬다.


어떻게 배합해야 이런 색들이 나오는지 나는 알지 못하기에 그림 그리는 이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튼 숨 막힐 듯 멋진 단풍이 그렇다.

하늘과 맞닿은 붉은빛, 노란빛, 그 속에 남은 녹색빛의 푸르름에 내 눈보다 가슴벅차 숨이 찬다.


숨이 찬다.


만만치 않은 돌계단을 무아(無我)경지에 도달할 즈음에야 다 올라올 수 있었다.

어쩜 수줍은 듯 당당한 듯, 큰 바위에 저 멀리 동해바다를 한 없이 응시 한 마애불께서 맞이해 주신다.

그 미소에 화답할 기운은 돌계단 한단 한단에 다 보시(布施)하다 보니 남아 있지가 않다.

다들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산사의 적막을 깨우고 있다.


여기는 신라의 고승 원효가 열반했다고 여겨지는 경주 골굴사(慶州 骨窟寺)다.


무슨 복을 받을 거라고 저 고생들을 하고 이 험한 돌계단을 기꺼이 올라 무심한 듯 이천 년 세월을 미소만 보내시는 여래를 굳이... 하지만 누구 하나 불만도 불평도 없다.

전부 다 웃는 얼굴이다. 

헉헉거리지만 다들 웃고 있다.

모르는 이에게 오지랖 넓게 이것 잡아라, 저건 밟아라 하며 바위 속 돌부처님보다 훨씬 큰 웃음을 주고 또 받고 있다.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慶州 骨窟庵 磨崖如來坐像)

분명 거친 오르막과 돌계단에 기운을 다 쏟아버려서, 서 있기조차 어지럽건만 어디서 그런 힘이 다들 생겼는지 가장 높은 마애불 주위는 깨끗한 왁자지껄이 넘치고 있다.

그 거친 돌계단에 그 보다 더 거친 세상의 번뇌는 힘겨운 한숨 한숨에 다 씻기어 온 데 간데없고, 다들 어쩜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 얼굴을 하고 있다.

이런 게 복 아닐까 싶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표정 없이 살아들 가겠지만 이 짧은 순간 부처님 닮은 얼굴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또 한없이 짧지만 고마운 위로 것 같다.

허나 오래도록 기억될게 틀림 없다.


그 높은 곳에 새겨진 마애불의 시선으로 동해 쪽 산들을 보니 어쩜 이 부처님은 한 없이 행복하셨을 것 같다.

다음 생에 바위로 태어나고 싶다던 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는데, 여기 와서 이천 년 세월을 웃음 띤 수많은 이들과, 더 한 없이 아름다운 산들의 잔치를 함께했을 마애불을 보니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올라올 때의 힘겨움보다 더 풀려버린 허벅지를 움켜쥐고 내려오니, 비워버린 내 번뇌의 공간에 더 진한 가을 풍경이 넘치도록 들어온다.

숨이 멎도록 아름다운 풍경이.


오는 겨울은 더 아름답기를 빌며 한참을 내려왔다.


분명 한발 한발 다 비웠는데,

가슴은 더 채워져서 따뜻하다.


가을비가 한 방울씩 떨어진다.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

: 대한민국 보물 제5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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