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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Nov 27. 2022

경주 기림사에서

존재(存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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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다.

분명 계획을 하고 가지는 않았다.

계획하지 않았는데 그런 만남이 만족스럽다면 그 우연은 깊은 인연일 수도 있는 게 맞다.


그래 분명 우연인데 계절과 너무 잘 어울리는 곳에 와 있으니 그리고 그 계절이 가을이면 진한 인연이 틀림이 없다.


절 밑에서 절 입구까지 저물어 가는 가을을 흠뻑 느끼게 할 정도의 적당한 거리가 좋다.

기림사 가는 길


천왕문을 지나면 진리에 도달한 이상적인 세계라 정의된 피안(彼岸)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그 답을 엿볼 수 있을 듯 편안한 화려함이 기다린다.

길고 고요한 담장과 가을을 칠해놓은 꽃천지 절마당이 세상 모든 근심을 지워버린다.



향기가 보일 듯 마당 전체가 꽃 천지인 여기는 경주 기림사(祇林寺)다.


낯설지 않은 신라 왕인 신문왕이 다녀갔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1,000년 세월은 훨씬 넘었고 2,000년에 가깝게 전해오는 사찰이다.


이 절집은 깊고 또렷한 진리를 확신에 찬 언어로 가르치려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보라는 듯 공원을 산책하듯 무슨 어려움이 있는지 말할 때까지 끝까지 기다리며 들어주겠다는 그런 곳이다. 

들어주기만 해도 고마운 벗처럼 말이다.



화려한 가을꽃에 취해 여래께 인사도 잊었다.

절 마당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또 한참을 앉아, 더 머무를 수 없는 가을을 붙잡고 한참을 놓아주지 못하고 있다.


그 알록달록 화려한 꽃들 속에 단청이 입혀지지 않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의 카리스마 가득한 단색은 초저녁 어스름한 분위기와 맞닿아 신비롭기까지 하다.

물론 다포식 공포(多包式 拱包)로 한층 멋을 부려 단층이 칠해지지 않은 무거운 침묵을 걷어내고 다정스럽게 다가와 주니, 내 눈의 호사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기림사 대적광전(祇林寺 大寂光殿.대한민국 보물)

미혹(迷惑)에 묶여 흐트러진 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믿음을 지키는 이에게 나타난다는 그 대적광전에 계신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께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세계는 이런 곳이 아닐는지.

아니면 이 꽃들의 향기로 미혹에 묶인 굵은 사슬들을 떨치고, 진리에 한걸음 더 나아가라고 가르쳐 주시는 듯하다.

그 큰 뜻을 알지 못한 이의 답답함을 이 작은 꽃들과 소담한 꽃들 사잇길들로 위로하고 있다.


대적광전에서 바라본 마당

놓여있는 돌 하나, 피어있는 꽃 하나, 늘어선 담 하나까지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게 함으로 어느 하나 허투루 존재하지 않음을 가르쳐주고 있는 듯하다.

그 모든 게 우리들처럼 작지만 소중한 역할이 분명 있는 게 틀림없다.



또 한참을 앉아 조금씩 조금씩 스미는 어둠을 즐긴다.


꽃을 보며 예쁘다 보다는 위로를 먼저 받는 걸 보면 나이가 든 게 맞다.

그래도 나이 들어감의 즐거움도 그리 나쁜 건 아니다.


놀이공원의 회전목마를 혼자 타고 싶은 다섯 살 꼬마는 꼭 일곱 살이 되면 혼자 탈거라 기대하여 빨리 나이 먹게 해달라고 기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나이 듦은 '늙는다'보다는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와 더 가까운  말인 게 아닐는지.


그냥 멋지게 나이 들어감을 기대하면 되지 않을까.


공양간에서 이 계절과 너무 어울리는 나뭇가지 태우는 냄새와 하얀 쌀밥의 냄새가 보인다.

모든 게 이 계절을 아쉽지 않게 채우고 있다.


 가을은 제 역할을 다 했으니 또 멋진 계절을 맞을 마음 준비를 하며, 올라올 때 보다 더 차분히 물러난 가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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