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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Dec 25. 2022

양산 비로암에서

추억(追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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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암자들을 품은 양산 통도사는 큰 절이다.


그래서 그 많은 암자들 중 에서 제일 높은 암자에 올라와 보았다.


아주 많은 암자들을 지나치다 보니, 거의 마지막에 가까운 여기 아주 높은 암자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밑에 있던 암자들로 많은 사람들이 가버리고 여기까지는 발길이 거의 없나 보다.


멋들어진 소나무 숲을 지나고, 귀여운 강아지가 개구멍으로 들락날락하는 예쁜 암자들도 지나니, 더 높고 더 예쁜 암자가 여기까지 올라온 수고를 잊게 하고 있다.


그래 여기는 영축산(靈鷲山) 높은 곳에 자리한 양산 통도사 비로암(梁山 通度寺 毘盧庵)이다.

수묵화처럼 흐르는 산들이 절집 앞으로 또 아래로 흐릿 흐릿 정말 순서대로 그 채도를 달리하니, 한없이 편안하다.

찬 바람맞으며, 올라온 딸아이는 조금 전 투덜대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연신 셔트 누르기에 바쁘기만 하다.

그래 참 예쁘다, 절집도 또 딸도.


구름 한 점 없는 겨울 하늘이 조금은 아쉽지만, 이명이 들릴 정도로 조용한 절집이 그래도 좋다.


말소리는 우리가 하는 감탄사밖에는 들리지 않으니, 조금 민망하지만 오랜만에 듣는 고요함이 참 좋다.


요즘 한창 사춘기인 중2딸과 갱년기 아빠는 이 땅에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늘 한결같이 좋은 사이일 수 없다.

이번 주는 딸아이와 기억도 나지 않는 이유로 말 다툼하고 몇 날을 서로 이야기하지 않다가, 오늘 이 절집에 오니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다.

고마운 절집이다, 중2인데도 고맙게 따라와 주니 더 고맙고, 이 절집이 편안하게 해 주니 절집도 고마울 따름이다.

그 편안함이 중2병과 갱년기의 슬픈 전쟁을 단숨에 끝내버리게 해 주니 정말 고맙다.


어쩜 먼 훗날에도 이 절집에 또 오게 된다면, 중2 예쁜 딸과의 이런 기억들이 추억으로 물들어 있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될 것이다.

딸도 먼 훗날, 기억이 아니라 추억으로 예쁘게 꺼내볼게 틀림없을 것 다.


좋은 기억들을 좋은 추억으로 만들어 준 여기 비로암에서, 또 언젠가 추억으로 기억될 사진들을 찍고서 차가운 토요일 오후의 따뜻한 여유로움을 한껏 즐기고 한참을 또 내려왔다.


여전히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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