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그 공부 중에서 수많은 한자들도 힘들지만, 내게 있어 일본어는 자동사와 타동사의 쓰임이 힘들다.
문을 여는 것도 내가 문을 여는 타동사와 스스로 문이 열리는 자동사의 구분이 일본어를 배우는 입장에서는 어렵다.
어릴 때부터 일본어를 쓴 현지인들이야 습관처럼 나오겠지만 말이다.
.
.
- 늙다
: 나이를 많이 먹다
- 나이 들다
: 나이가 많아지게 되다
(daum 한국어 사전)
.
.
다음 한국어 어학사전에서는 늙다와 나이 들다의 사전적 정의를 자동사와 타동사로 구분해 놓았다.
내게 있어 참 흥미롭다.
"늙다"는 내가 나이를 먹는 타동사다.
그런데, "나이 들다"는 나이가 그냥 많아지는 자동사다.
이 타동사와 자동사로 구분된 비슷한 단어가 내게 의미 있게 다가왔다.
노화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늙다'와 '나이 들다'와 같은 단어들 말이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내게 그렇게 힘들어하는 자동사와 타동사만큼 큰 차이로 다가온다.
필연적으로 노화는 온다.
그 노화의 해석에서 '늙다'는 스스로 자신이 노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들다'는 자연스럽게 노화로 진행되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노화를 자초하는 '늙다'보다는 '나이 들다'쪽이 더 자연스럽다.
어쩜 조금 더 멋있어 보인다.
또 다르게 보면, '늙다'는 나를 타인이 판단하는 객관적인 기준이고, '나이 들다'는 내가 스스로를 판단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늙음'에 따른 신체적인 변화는 막지 못한다.
하지만 판단기준이 타인의 시선이라고 가정한다면, 감출 수 있거나 들어내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거다. 그 자체가 지극히 타인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내가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평가당하게 되어 있는 구조로 보인다.
그러나 '나이 듦'에 대한 기준은 내가 설정하면 된다.
이게 참 기분 좋은 기준이라는 거다.
스스로에게 만족도 높은 기준을 잡았다고 해서 내 나이 듦의 평가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만족도를 충분히 즐기면서 행복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평균수명과 기대수명이 늘어가는 현대에서 그 주관적이라 생각되는 '나이 듦'의 기준은 한층 더 높게 잡거나, 아니면, 낮게 잡아도 나이 들었음의 만족도를 높여 노화에 대한 인식에 조금 더 긍정적인 느낌을 받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또 늙음의 반대는 '젊음'이지 않을까?
그러나 나이 듦의 반대는 '어리다' 정도가 아닐는지, 어리다는 젊다는 의미보다는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는 의미와 더 가까운 것 같다.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의 삶은 어쩌면 멋지지 못한 행동이 나타날 수도 있고, 삶의 질이 조금 더 윤택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어 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싶어 불안하다.
그러나 나이 듦에 깃들여져 있는 성숙함은 '삶이 멋있어진다'와 연결되어 주관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행복에 조금 더 가까운 단어로 느껴진다.
5살 꼬맹이는 7살부터 혼자 탈 수 있게 되어 있는 회전목마가 부러울 것이다.
빨리 7살이 되고 싶을 것이다.
5살은 분명 7살보다 나이가 덜 들었지만, 회전목마에 있어서의 만족도가 7살보다 현저히 떨어진다.
노화를 논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분명 7살은 5살보다 늙었지만, 아무도 늙었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늙음은 분명 본인 스스로의 기준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기준이라는 게 맞아 보인다)겠지만, 7살이 분명 5살보다는 노화가 진행되었어도, 만족도는 5살보다 훨씬 크다.
이건 분명 2살 '늙음'에서 오는 만족도보다는 2살 더 '나이 듦'에서 오는 만족도가 분명하다.
나이 들어감에 따라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있다.
늙음은 하고 싶은 게 없어지는 게 아닐까?
'나이 듦'은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고, '늙음'은 하고 싶은 것도 줄어들어 할 수 있는 것들도 외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느 날 노안과 이명이 왔다.
늘 보던 책들에서 글자들이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다초점렌즈의 안경으로 겨우 안 그런 척하기도 하고, "나는 아니야!" 라면서 부정하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노안이란 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이제 그만 바로 눈앞에 있는 각박한 현실만 보지 말고, 저 멀리 좀 더 멀리 보라는 유전적 배려가 아닐까?
나이 들어도 늘 가까이 있는 것들이 잘 보이는 인류는 수많은 가까운 것들에게서 받는 너무너무 힘든 스트레스에 의해 자연적으로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고, 일정 나이에서 힘들고 각박한 가까운 것들이 덜 보이고,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멀리 있는 것들까지도 포용하고 볼 줄 아는 이들만 행복하게 살아남아 그 뜻을 전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일정 정도로 나이 들면 바로 코앞만 보지 말고, 더 멀리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는 그 큰 뜻이 유전자에 새겨져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최근에는 노화로 보이는 이명도 생겼다.
이게 참 이상한 게 여럿이 즐겁게 생활하면 전혀 못 느끼다가, 혼자 아주 조용히 있으면 느껴진다.
이것도 나이 들어감에 있어 주위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멋지게 나이 들어가야 된다는 유전학적인 인류의 고마운 유산으로 느껴진다.
가끔씩 힘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직 반 정도밖에 살지 못했다.
나머지 반은 '늙음'과 '나이 듦'을 번갈아 가면서 살아갈 것 같다.
늙음보다는 나이 듦이 더 매력적이다.
'늙음'은 내가 내 의지를 가지고 노화에 이르는 길이고, '나이 듦'은 자연스러운 노화에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이르는 길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뭇 다름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