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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Sep 18. 2023

기장 척판암에서

첫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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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시작되는 토요일에 비가 온다.

하루종일 오는 비가 꼭 초여름 장맛비처럼 오고 있다.


그리 길지는 않지만, 좁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자동차로 오른다.


자동차 운전이 살짝 부담도 되지만, 비가 와서 그런지 토요일 오후 높은 산사(山寺)에는 인적이 없어 다행스럽게도 자동차가 좁은 산길에서 서로 마주치는 수고는 하지 않았다.

마주치더라도 좁은 산길 군데군데 교차할 수 있도록 만든 좁은 여유지역이 있어 안심은 되긴 한다.


계속된 비로 인해 바위산에서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하다.

바위에 붙은 이끼들이 딱 있어야 할 곳을 알기나 하듯 멋지게 붙어 있비 맞은 바위가 더 신비롭게 느껴진다.


여기는 신라의 고승 원효의 뜻이 전해져 내려오는 부산광역시 기장 불광산 척판암(佛光山 擲板庵)이다.

불광산 척판암(佛光山 擲板庵)

당나라 어느 절이 장맛비의 산사태로 인해 무너질걸 미리 알고, 원효께서 판에 경고문을 써서 높이 던져 미리 대피하게 하여, 1000명의 인명을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그들이 그 인연으로 이곳 판암에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던질 척(擲), 널빤지 판()을 써서 척판암이라고 한다.



크지 않은 암자(庵子)다.


척판암이라는 현판을 내걸어놓은 전각(殿閣) 앞은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온통 높고 푸른 산이 비구름을 머금고 있어 그저 넉넉할 따름이다.


척판암(擲板庵)

거기다 절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바위들 이끼에 스민 빗소리.

나무 위 검은 새들의 깃털에 젖어 떨어지는 빗소리.

산과 산들 사이 계곡에 드리운 하얀 구름에서 바로 떨어지는 빗소리.

바람에 묻어 흩어지는 빗소리.



들릴 듯 말 듯 한 빗소리들이 고즈넉한 산사(山寺) 더 차분하게 만든다.


첫인상이 참 중요할 때가 있다.


새로운 사람과의 첫 만남은 늘 언제나 크고 또 작은 긴장감을 유발하고, 그 긴장감은 첫인상을 강하게 기억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첫인상은 그 사람과의 만남 지속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한다.

살다가 만났던 사람들의 첫인상이 그 사람의 전부가 되는 경우도 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도 그 첫인상에 단단히 각인(刻印)되어 버린다는 것일 거다.

물론 그 첫인상이 심각한 오류를 야기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좋은 첫인상만큼 더 좋은 관계로의 만남으로 이어진 결과가 우리는 친구라고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첫인상이 나쁘더라도 만남들 속에서 더 좋은 모습으로 더 좋은 친구로 지내는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내게 있어 이곳 척판암의 첫인상은 고즈넉한 산사에 빗소리들로 가득해 차분함이 더해진 편안함이다.


그래서 좋은 친구처럼 가끔씩 생각나면 그냥 만나러 올 것 같아 좋다.

언제나 웃으며 반겨줄 것 같고, 위로해 줄 것 같은 친구처럼 말이다.


척판암 현판이 붙은 전각 앞 절벽 난간에서 보는 비 오는 초가을 푸른 산들이 좋다.

그래서 진한 단풍들로 설렐 그 풍경도 보고 싶어 또 연락도 없이 올 것 같고, 차가운 바람에 나뭇가지만 남아 조금 쓸쓸할 것 같은 풍경도 보고 싶어 옛 친구를 보러 오듯 올라올 것 같다.


살짝 젖은 댓돌에 앉으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친다.


시간의 흐름이 내 팔에 차고 있는 스마트워치의 숫자들로만 이루어진 게 분명 아님이 새삼 느껴진다.

멋진 계절들의 설렘을 기다리기 시작하니, 숨 가쁘게 흐르던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느려져 버렸다.

비 오는 산사 앞 더 많이 내려앉은 구름들을 한참을 보고 있으니 시간은 또 그만큼 더 느려져 버린다.


여기 오길 잘한 거다.


좋은 이를 만났을 때 설레는 것처럼 설레는 걸 보니 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변해가는 모습이 보고 싶어지는 걸 보니, 좋은 인연(因緣)인가 싶기도 하다.


한층 짙어질 가을 다시 오겠다 약속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참을 내려왔다.


산 아래 토요일 늦은 오후의 빗소리는 아직도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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