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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높은구름 Sep 06. 2023

김해 은하사에서

향기(香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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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번 만나도 늘 새로운 이도 있고, 처음 만났지만 낯설지 않고 언젠가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이도 있다.


두 경우 다 참 좋은 느낌이다.


전자의 사람이나 후자의 사람 모두 대부분 참 좋은 이들이 많기도 했고, 빠르게 친해지고 오래 만나는 이들이 많기도 하다.

어쩌면 그런 이들은 보이지 않지만 참 좋은 향기를 가지고 있어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런 새로움과 익숙함은 각각 설렘과 편안함을 주기에 그럴 거라 생각되기도 한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다 보니 새로움에 의한 설렘보다는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래도 가끔씩은 설렘으로 잠 못 이루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그런 설렘과 보이지 않는 그런 향기가 좋아 몇 번 인지도 모르지만 여기 경상남도 김해 신어산(金海 神魚山) 기슭에 자리한 은하사(銀河寺)에 또 오게 되었다.

은하사에서 바라본 돌계단

익숙해서 좋은 향기에 이끌리지만, 매번 다른 향기를 주고 있어 설렘을 덤으로 받는 듯하여 좋다.


삥 돌아 잘 닦인 시멘트 길이 있지만, 거칠게 쌓아 올린 길지 않은 돌계단으로 올랐다.

늦여름, 토요일 오전의 인적 드문 절집 앞 배고픈 모기들에게 넉넉하게 보시(布施)해야 함을 감수해야 하지만..

 

가다 보면 제법 큰 연못도 있고, 곧바로 조금 더 오르면 속세에서 지은 죄를 여기서 다 뉘우치고 올라가라는 듯 무서운 눈으로 절집을 지키는 수문장인 금강역사(金剛力士)들로 인해 일순 긴장하게 된다.

은하사 금강역사(金剛力士, 인왕(仁王))

이런저런 자잘한 것들이 머리에 스쳐 두렵다.

그래도 무사통과 시켜주시는 걸 보면 그다지 큰 잘못은 아니기에 안심이 되긴 한다.

큰 루[범종루(梵鍾樓)]를 지나 여름 꽃들 사이로 올라가는 대웅전 앞 계단 위로 먼저 눈에 띄는 건 딱 알맞게 보이는 구름과 산 위의 하늘이다.

범종루(梵鍾樓)

참 예쁘다.

그리고 그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계단과, 양 옆으로 보이는 전각(殿閣)들이 하나같이 다 예쁘게 놓여있다.


그 예쁜 향기가 이런 산, 하늘, 구름, 물, 꽃, 그리고 하나하나 차분하게 놓여있는 전각들....

이런 풍경들이 어우러져 나는 것이었다.


영원할 것 같고 더 강해진 듯한 여름도 이제 조금씩 힘이 빠지고, 자연스럽게 다음 계절로 서서히 순서를 넘기고 있다.

이런 익숙한 방법으로 계절은 돌아가고, 그 익숙함 사이사이에 계절의 극적인 변화를 심어놓아 설레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 뜻이 참 고맙다.


늦은 아침에 도착한 은하사는 조용하다.


아직도 아쉬운 듯 매미소리가 조금 낮아진 주파수로 마지막 노래를 쏟아내고 있어 산사의 뜰안은 더 조용한 듯 느껴지게 만들고 있다.


여기 김해는 옛 가야국의 중심지다, 이 절도 가야국의 시조 수로왕시기까지 올라 옛이야기들을 시작하는 걸 보니, 2000년 가까이 그 뜻을 전하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물론 세상사가 다 처음과 똑같이 흘러온 건 아닐 거라서, 여기도 그 세월 동안 변화하며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져 온 게 틀림이 없다.


그래도 그 시대 그들이 느꼈던 그 느낌이나, 지금 여기서 느끼는 이 느낌이나 그리 다르지 않음을 충분히 알고 나면, 2000년 전 가야국의 그들과 통한다는 이 느낌이 참 좋다.

여기 이 산 밑에 이런 절을 짓고 나서 사랑하는 이들의 안녕과 평온을 빌었을 그 간절함을 알기에 말이다.


늦여름처럼 힘이 빠져버린 매미소리가 일시에 조용해질 즈음, 절 밑으로 흐르던 물소리가 대나무 숲에서 나던 그 향기처럼 귀에 들리니 옛 생각보다 먼 훗날의 생각에 웃을 수 있어 좋다.


잘 될 거라는 건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었구나 싶어, 나무 그늘진 대웅전 돌계단에 앉아 여래의 시선보다 조금 아래에 눈을 맞춰 한참을 쳐다본다.


대웅전 석가여래를 등지고 그렇게 앉아 무심히 쳐다보고 있다 보니, 불안한 마음도 어지러운 마음도 차분해지고 있어 참 좋다.

대웅전 앞 돌계단


그러고 보니 여기서 빌었던 이들은 다들 지금과 훗날의 안녕과 평안들을 빌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간 일들은 그렇게 지나게 하고서는 다가오는 훗날들 속에서 함께 할 이들의 행복을 빌었겠구나 싶었다.

하여 지금까지 내가 행복하게 살아올 수 있도록 빌었던 많은 이들이 있었구나 싶어 그들의 행복도 함께 빌어보았다.

그렇게 그분들의 나를 위한 간절한 기원들이 하나하나 들어져서 이렇게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들을 위한 나의 기원들도 하나도 빠짐없이 꼭 들어주시라고 욕심도 부리면서 말이다.


아직은 그늘이 더 좋다, 언젠가 언제 그랬냐는 듯 따뜻한 햇살을 찾게 될게 틀림없다.

그리고 익숙한 날들과 더 익숙한 계절의 변화 속에 또 그런 익숙한 설렘들이 기다려지고 있다.

다시 힘차게 매미 한 마리가 늦여름의 한낮을 깨우니, 절집은 온통 매미소리로 덮여버린다.

조만간 귀뚜라미들이 대신하겠지만 말이다.


내려오는 길가 계곡의 힘차게 흐르는 물소리는 여전히 익숙한데도 계속 설레게 만든다.

그래도 올라올 때의 그 향기는 바뀌어 있었다,


나는 그 똑같은 물소리도 좋고, 바뀐 그 향기도 좋다.


그래도 돌계단위 절집은 아주 먼 훗날에도 지금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변하지 않아도 충분히 설렐 것 같으니까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들 변하는데,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라면, 그건 어쩜 변한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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