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이 등장한 이후 16세기 말까지 동서양의 총은 1분당 2발 정도밖에 쏠 수 없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전기톱’이라는 공포스러운 별명을 가진 MG42 기관총은 1분당 1200발까지 쏠 수 있었다. 기관총은 방아쇠만 당기고 있으면 완전 자동사격과 빠른 연발로 다량의 총탄을 발사해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게 목적이다. 그런 목적성에 비춰 보면 최초의 기관총을 작동방식이 아닌 다량의 총알을 빠르게 발사할 수 있느냐로 볼 수 도 있다.
명나라 때 중국에서 한 번에 3발을 쏠 수 있는 삼안총이 만들어졌다. 총구가 3개로 삼혈총이라고도 했는데 청동으로 만들어진 길이 38cm 정도의 총이다. 발포하면 총알 3발이 한 번에 나갔다. 어떻게 보면 최초의 초기형 기관총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삼안총은 짧은 사정거리에 화력이 약한 무기라 크게 대중화되지는 못했다. 이후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까지 10발의 총알이 연사 가능한 십안총, 28개 총탄을 연속으로 쏘는 연주총 등이 만들어졌다.
1718년에는 영국의 제임스 퍼클이 퍼클건을 만든다. 1분당 9발의 총알을 발사할 수 있었으나 실전에 도입해 쓰기에는 성능이 낮아 쓰이지 못했다. 이어 1862년 미국에서 리처드 캐틀링이 6개의 총신을 원형으로 묶어 개틀링 건을 만들었다. 손으로 레버를 돌리는 수동식 기관총으로 남북전쟁에 시험 운영되고 1866년 미군의 정식 무기로 선택된다.
빠르게 완전한 자동사격이 가능한 현대적인 개념의 최초 기관총은 1883년에 기관총의 아버지라 불리는 미국인 하이럼 맥심이 만들었다. 본인의 이름을 따서 맥심기관총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1분당 500~600발 사격이 가능한 자동 기관총으로 당시 50명이 소총을 발사하는 것과 비슷한 위력을 지녔다. 맥심기관총은 미국뿐 아니라 영국, 러시아, 독일까지 전 세계에 폭넓게 보급되며 대량 살상 무기의 원조로 자리 잡으며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방적기, 증기기관 등 영국은 1760년대 산업혁명의 시작지로 공장을 통해 대량생산하는 경제 체계를 만든다. 공장을 통해 물건은 많이 생산되지만 팔 수 있는 시장 규모의 한계로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서는데 산업화를 진행한 유럽의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만드는 방식을 택한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 유럽의 어지간한 나라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인도 같은 곳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드는데 열을 올린다.
식민지에서 나는 원료를 싼 가격에 사서 적은 비용으로 노동을 시키고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을 식민지에 비싸게 팔아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 한다. 이렇게 불평등하게 되다보니 싸움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고, 기관총은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헤치우는 만능해결사가 되어주었다.
맥심기관총은 1893년 11월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마타벨레족과 전투 시 700명의 군인으로 10만 명과 싸워 대승을 거두게 한다. 당시 영국은 아프리카,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식민지로 만드는 정복전쟁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항복했던 마타벨레족은 1896년 다시 영국에 반기를 들고 전투를 벌이는데 이 전투에서는 5만 명이 맥심기관총에 전사한다. 반면 영국군은 400명만 전사했다.
만주와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기 위해 벌였던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에서도 기관총은 위력을 발휘한다. 1904년 러일전쟁시 돌격전 중심의 일본군이 러시아군이 사용한 맥심기관총에 1만 5000명 전사하고 4만 5000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은 더 큰 위력을 발휘하고 전통적인 전투 방식과 다른 참호전이 나오게 된다. 1916년 7월 1일, 프랑스 솜 전투에서 연합군은 독일군 진지에 8일간 150만 발의 포격을 가한 뒤에 돌격전을 감행한다. 독일군은 깊은 참호에 몸을 안전하게 보호한 뒤라 피해가 적었고, 쳐들어오는 적을 향해 맥심기관총을 개량해 자체적으로 만든 스팬다우 기관총을 발사한다.
솜에서 벌어진 이 날 전투 하루에만 영국군은 기관총에 약 2만 명이 전사하고, 4만 명이 부상당했다고 한다. 11월 18일 폭설로 전투가 중단될 때까지 연합군은 고작 10여 KM를 전진한다. 반면 이 4달 반 동안 대략 영국군 42만 명, 프랑스군 20만 명, 독일군 62만 명 등 12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날마다 거의 8,000명 정도가 죽거나 다쳤다는 이야기이다.
1차 세계대전에서 군인만 1000만명이 죽고, 부상자가 2100만명이 발생했는데 이 대량 살상 역사의 현장에서 선봉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죽음의 사신, 무적의병기’라는 별명을 가진 기관총이다. 나중에 이루어진 조사에서 사상자의 90% 정도가 기관총에 희생되었다고 한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기관총이 발명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사람들이 덜 희생되고 약탈적인 식민지 정복 전쟁이 늦춰지거나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기관총이 나오기 전에는 영국도 꽤 많은 전투에서 원주민들에게 패하기도 하고 비슷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투가 많이 있었다) 이처럼 기관총은 제국주의 열강의 약소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지배 수단이자 대량 살상의 잔인한 전쟁 도구로 쓰였다.
임진왜란 때 중국에서 삼안총이 들어왔다. 한 번에 여러 발의 총알을 발사할 수 있는 총의 시초이고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현존하는 걸로는 1594년 선조 6년에 제작된 삼안총이 가장 오래되었다. 현재 보물 884호로 경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894년 11월 동학 농민군 2만 여명은 우금치 전투에서 관군 3천여 명과 일본군 2천여 명에게 거의 전멸되다시피 한다. 당시 회전포라고 불렸던 미국산 캐틀링 건에 당한 것이었다. 개화기 무렵 대한제국은 캐틀링 건 20여 정, 맥심기관총 6정을 보유했다고 한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는 미군의 지원을 받아 2차 세계대전시 미군의 주력 기관총이었던 M1919 브라우닝을 사용한다. 1960년대 이후에는 베트남전에서 맹위를 떨치고 영화 '람보'로 유명한 미국의 M60을 도입했고 기술 제휴로 국내에서 자체 생산을 시작한다.
하지만 M60은 별명이 '돼지'였을 정도로 10.5KG에 달하는 무거운 무게를 지니고 있고 주력 소총인 M16과 탄약 호완이 안 되는 문제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벨기에 FN사의 미니미 기관총을 참고해 1989년 M60보다 더 가볍고 소총류와 호완이 되는 K3 기관총을 개발해 1991년부터 실전 배치해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