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의 미소

그 여자의 생존법2 - 향기

by Lali Whale

향기는 우걱우걱 사과를 씹으며 핸드폰 화면을 응시했다. 젊은 일타 강사는 화면이 뚫어져라 열강을 토했다. 불안한 마음에 인강은 켜 놓았지만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라면이나 빵을 먹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오늘부터는 폭식을 하더라도 건강한 것을 먹자는 다짐에 엄마에게 얘기해서 과일을 냉장고 가득 쟁여 놓았다. 탄수화물이 주는 단맛이 향기를 달콤하게 유혹했지만 이미 다 비워버려서 다시 사러 가기도 귀찮았다.


폭식이 시작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수행 전날이나 시험이 있는 주에는 미칠 것 같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발이 주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잘 먹지도 않던 과자나 빵, 라면이나 치킨 같은 음식들을 닥치는 대로 먹었다. 2학년이 되면서는 꼭 특별한 일이 있지 않아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미친 듯이 먹었다.


다음 주면 기말고사가 시작이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된 과목이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가는 원든 원치 않든 수시로 대학을 가긴 글렀다는 생각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정시를 준비한다면 재수는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향기는 사과를 먹고 있는데도 뭔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귓바퀴 앞에 보초라도 서있는 듯 어떤 소리도 들어가지 못하게 탁탁 막아내는 것 같았다.


향기는 핸드폰을 들고 다시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열었다. 혹시 남아있는 케이크나 핫바가 있는지 서랍 하나하나를 모두 열어보았다. 냉장고 칸칸이 사과, 복숭아, 오이, 토마토 같은 것들이 가득가득 들어있었다. 어쩔 수 없이 토마토와 복숭아를 가져왔다. 과도로 복숭아와 토마토를 잘라 방으로 가져왔다. 토마토에는 설탕을 잔뜩 뿌렸다. 음식물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지만 계속 계속 들어갔다. 원래 먹던 음식이 아니라 먹어도 먹어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향기는 미소에게 디엠을 보냈다.


- 사과 3알 복숭아 2알 토마토 5개

- 잘했어. 그래도 폭식할 거면 과일이 낫지. 우리 대학 가면 꼭 바프 같이 찍자!

- 아 미치겠다.

- 복숭아 맛있겠는데.

- 내일 가져갈까?

- 좋아~

- 영통가능?


향기가 폭식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친구였다. 늘 밴드를 감고 다니는 손목을 보고도 달리 묻지 않고 더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해 준 친구였다. 미소의 언니도 꽤 오랫동안 우울증에 걸려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얘기하며 향기를 꼭 안아주었다. '너무 힘들면 연락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은 연락하지 못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막상 연락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또다시 몸에 상처를 내는 것도 미소의 관심을 배반하는 것 같았다. 필통 속의 커터칼을 뺐다 넣었다 하다 결국 쓰레기통에 버리고 미소에게 디엠을 보냈다.


- 안 했어.


빠르게 답장이 왔다.


- 잘했어. 영통 할래?


새벽시간이었지만 한 참을 통화했다. 뭘 특별히 한 것은 없었다. 핸드폰을 켜놓고 각자 할 일을 했고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잤다. 그렇게 향기와 미소는 새벽이면 서로 핸드폰을 켜놓고 곁을 지켰다. 라면이나 빵 대신 과일을 먹자고 제안한 것도 미소였다. 한동안은 향기의 터질 것 같은 불안도 피식 바람이 빠진 풍선같이 느껴졌다. 학교에 가면 미소가 있었고, 밤에는 오롯이 그녀와 얘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소가 다른 친구들과 있으면 식은땀이 났다. 나에게만 웃어주기를 바랐지만 미소는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런 날이면 편의점으로 가는 발길을 도무지 돌릴 수 없었다. 용돈을 탈탈 털어 군것질 거리를 잔뜩 사가지고 집에 왔다. 그렇다고 이런 마음을 꼬치꼬치 미소에게 말하고 미소를 자신에게 붙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말을 하는 순간 미소가 영원히 자신을 떠나갈 것 같았다. 밤에 디엠을 보내도 답이 안 오는 횟수가 늘어갔다. 그런 날이면 다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향기는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핸드폰을 들었다. 영통이 아닌 음성통화 버튼을 눌렀다.


- 자?

- 아. 미안. 요새 왜 이렇게 졸리냐.

- 잤구나. 아냐.

- 무슨 일 있어?

- 아냐 그냥. 일찍 자네?

- 응. 요새 부모님이 밤에 엄청 싸우고 언니도 다시 좀 안 좋고 그래.

- 진짜? 난 몰랐어.

- 아냐. 내가 말 안 했는데 뭐.

- 너도 힘든데 내가 너무 널 힘들게 했나 봐.

- 아냐. 나도 너랑 얘기하는 동안 다 잊을 수 있어서 좋은데 뭘.

- 미안.

- 뭐가.

- 복숭아 내일도 가져갈까?

- 아직 있어?

- 응.

- 영통 할까?

- 좋아.


향기는 책상 위에 있던 과자와 사발면 그릇들을 급히 주방에 가져다 놓았다. 설레는 마음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냉장고에 전에 먹던 복숭아가 아직 한 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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