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의 생존법 - 유성
유성은 자신의 결백한 마음을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속창까지 뒤집어 보여주고 싶었다.
- 안 잤다고. 안 잤다고. 그냥 딱 한 번이었어. 호기심에 가본 거야.
- 모텔까지 가기로 하고 참도 안 잤겠다. 뭐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안 했다고 하시지.
- 채팅에서도 봤잖아. 모텔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진짜 가지 않았어. 내가 나가지 않아서 걔가 난리 피는 거 당신도 읽었잖아.
- 네가 다시 만났는지 아닌지 알 게 뭐야. 그리고 안 잤으면 문제가 끝난 거니? 정말 더러워서.
- 정말 아무 의미 없었어. 진짜야. 믿어줘.
유성이 오픈채팅을 들킨 것은 아내와 여름휴가로 제주도에 가서였다. 둘 다 일이 너무 바빠 한창인 여름이 지나고서야 시간을 맞춰 떠날 수 있었다. 오랜만의 여행에 유성도 그의 아내도 들떠 있었다. 내륙이었다면 자신의 자가용에 탑재된 내비게이션을 이용했겠지만, 렌트한 차의 네비가 그의 손에 익지 않아 자신의 핸드폰 네비를 킨 것이 문제였다. 낯설어진 상황에서 좀 더 주의했어야 했지만 자신이 방심했다는 것을 유성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오픈 채팅 방의 알림 설정은 묵음으로 처리해 놓았으나 하필 유성이 차에서 내려 담배를 사러 간 사이 아내가 핸드폰 내비게이션을 조정했고 그때 수십 개의 읽지 않은 톡을 클릭한 것이 이 모든 환란의 시작이었다. 실제 그녀가 본 채팅은 단순히 성적인 농담이나 야한 사진을 공유하던 상대였지만 그로 인한 아내의 의심에 불씨가 붙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숨겨놨던 비밀들이 핸드폰의 삭제된 밑바닥까지 탈탈 털려 아내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제의 여성과 모텔에 가기로 한 약속까지 아내의 눈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제주도의 여행은 지옥으로 끝나고 서울로 돌아와서도 그 지옥은 이어졌다. 눈만 마주치면 아내의 추궁과 분노가 쏟아졌고 하루하루가 지뢰밭길이었다.
- 포렌식 해서 내가 다 보여줬잖아. 내가 그런 대화 나눈 건 정말 미안해. 내가 진짜 미안해. 그런데 거기까지야. 진짜야.
- 우리가 왜 이런 말을 해야 해? 넌 그냥 너 좋을 대로 살아. 그러면 되는데 서로 피곤하게 왜 이래.
아내는 안방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고 들어가 버렸다. 유성은 오픈 채팅을 하면서 그 상대들에게 정말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얼굴을 숨기고 나누는 대화에서 오는 쫄깃한 쾌감이 있었다. 마치 유성의 닉네임인 '밤의 마왕'처럼 자신을 떠받들어주는 반응이 그를 안달 나게 했다. 몇 번이나 다짐도 하고 어플을 지우기도 했지만 다시 들어가게 되었고 마치 마약처럼 유성의 손가락을 멈추지 못하게 하였다.
모텔에서 만나기로 약속은 했지만 끝내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유성은 거기까지 자신이 넘으면 안 되는 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아내가 알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고도 채팅을 끊지는 못했다. 모범생인 아들로, 존경받는 남편으로 이제까지 애써 쌓아 온 위치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거기에 이혼까지 당한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삶이 부정되고 무너질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 함께 누워 사랑을 나누던 우리의 방이 거대한 철창 뒤에 있는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이 상태라면 유성의 부모님과 장인장모님에게 지금의 일들이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거실 한 켠에는 제주도 여행 때 가져갔던 기내용 캐리어가 나뒹굴고 있었다. 신혼여행 때 면세점에서 꽤 비싸게 주고 구입한 캐리어였다. 아내는 해외로 함께 여행을 갈 때마다 커버까지 씌워 이용하던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탄탄한 우레탄 바퀴가 집 안쪽을 향해 항복을 외치고 있었다. 유성은 어릴 적 딱 한 번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고 들켜서 크게 혼난 적이 있었다. 그 돈으로 뽑기를 했는지 엄마가 사 먹지 말라는 불량식품을 사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쫓아내는 엄마에게 매달려 울며 빌었고 겨우 문 밖으로 내쳐지진 않았지만 거실 벽에 붙어 손을 들고 서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자신의 처지가 어릴 때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미안하고 수치스러운 마음도 진심이었지만 진짜 잔 것도 아닌데 한 달 넘게 화를 내며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가 너무하게 느껴지는 마음도 있었다. 이제까지 자신이 가족을 위해 노력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 같아 허무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대로 저 현관문 밖으로 밀려날 수는 없었다.
유성은 조용히 캐리어를 작은방에 넣어두고 집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쌓여있는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로 집안 곳곳을 쓸고 손걸레로 닦았다. 온라인 마켓에서 사놓은 불고기 밀키트와 냉동 대나무통밥을 냉장고에서 꺼냈다. 담양 여행을 할 때 아내가 좋아하던 메뉴였다. 대나무통 밥은 조리 방법 대로 찜기에 넣어 쪘고, 불고기는 무쇠 프라이팬에 납작하게 눌러 구웠다. 지글지글 맛있는 소리와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을 했다.
아내의 잠긴 문은 락앤락 반찬통처럼 물 샐 틈 없이 닫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