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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Jan 18. 2024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사랑이 주는 깊은 위로 - 드라마 연인 (2023)

장안의 화제였던 드라마 연인(2023) 보면서  역시  대사에 울컥했다.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주연이었던 배우 남궁민이 종영 소감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 꼽았다고 하는데 나 역시 그랬다.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간 여주인공 '길채'는 포로가 되어 청인에게 능욕을 당한다. 우여곡절 끝에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지만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자신의 선택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제는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할 뻔한다. 그런 길채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 '장현'에게 자신이 청에서 욕을 당했다고 고백하니 장현이 한 말이다.  


살면서 약점은 가능한 숨겨야 한다고 우리는 배웠다. 사회적으로 긍정적이라고 인식되지 않는 정보들은 약점이 된다. 부모의 이혼, 복잡하거나 유실된 가족관계, 잃어버린 순결, 정신질환, 성폭력의 기억, 가난...


내가 대학을 갔을 때가 IMF 외환위기 즈음이었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 속에 집안에 있던 얼마  되던 금붙이를 국가를 위해 내놓던 믿지 못할 시기였다. 분당의 상가주택에 가장 위층에 살던 우리 가족은 갑작스럽게 집값이 바닥을 치면서 같이 내려간 전셋값 때문에 살던 집을 내줘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존보다 전세 보증금이 반토막이 넘게  떨어지면서 이전 세입자에게 돌려주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 가족은  4개짜리 집을 전세 주고 엄마가 음식점을 하던 서울 송파구의   칸짜리 다세대 연립에 월세로 들어가 살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남의 집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월남전에 참전하여 벌어온 돈이 종잣돈이 되었고 수완 좋은 엄마의 뛰어난 재테크로 언제나 주인집 딸로   있었다. 이미 대학생이었고, IMF 모두의 재난이었기에 오히려 별일 아니라고 느껴졌었다.


 당시  앞의 책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매일 같이 오는 남자 손님이 있었다. 동글동글 생긴 하얀 얼굴의 동갑인 남자애는 거의  달을 매일 찾아왔다. 12시에 문을 닫는데, 어느 날은 셔터문을 내리려고 하는데  멀리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인사를 했다. 만화책이 아니라 나를 보러 왔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서울의 4년제 대학에 다니며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반수를 하고 있던 그와, 사귀자는 다짐 없이 만났다. 밝고 유머 있는  애가 좋았다. 대학교 1학년이던 그때, 나는 순수했고 솔직했고 자신 있었다.  


"우리 집 여기 월세야. 오늘 집주인이 월세 제때 안 준다고 아침 8시에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 있지. 스크루지 영감 같아."


내가 살던 다가구 주택 앞의 아파트 단지에 살던 그는 당황했다. 그랬을  있다고 이해한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버지와 전업주부로 있는 엄마, 대학에 가서도 부모님의 용돈을 받으며 아르바이트 조차 해보지 않았던 순진한 어른 아이. 우리  월세인 것이 그다지도 충격이었는지 아니면 만나보니 별거 없어서 그랬는지 어느 순간  애는 책방을 찾지 않았다. 공교롭게 '우리  월세'라는 가난의 정보를 공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무슨 일이냐고 먼저 연락을 한 것은 나였다. 마지막으로 종로의 맥도널드에서 300원짜리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더 이상 연락하지 말자는 그는 "나는 너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라고 말했다. 마지막은 좀 더 조용한 곳에서 그래도 호감을 가졌던 인연에 성의를 보여도 좋았을 텐데 하는 씁쓸함을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중화시켰다. 나는 '네가 나를 왜 감당하니? 각자 인생 사는 거지.'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우리 진짜 집 분당에 있고 그게 너희 집 보다 매매가 높다고 사실관계를 정정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월세도 자가도 실은 내 것이 아니었다. 이미 나에게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나를 더 설명하고 서로의 다른 생각을 점검할 이유가 없었다.


가난은 비밀 이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의 가난은 어디 가서 명함도 내밀기 어려운 수준이어 그게  민망했다. 심지어 나는 가난하다고 생각도  했기에  어이가 없기도 했고 상처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성인이  나에게 학벌이나 부모의 재산이 친밀한 관계에 장애가   있다는 생각에 근거가 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경험으로 배운 지식은 지혜가 된다. 나는 조금씩 나에 대한 정보는 선별적으로 단계적으로 공개하는 어른이 되어갔다. 약점이 되는 정보는 비밀이 되었고 아주 친밀한 관계가  이후에 하나씩 서로의 비밀을 주고받으며 오픈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는 동안 나는 우리 부모님이 이혼을 했다는 사실을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사생활이기도 했지만 결혼을 고려하면 부모의 이혼이 약점이 될 수 있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아빠와 사이가 나빴던 엄마는 "너희  시집가면 이혼할 거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우리 결혼이 늦어져서도 있지만  결혼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아빠의 사업에 부도가 났다. 아빠는 집에 빨간딱지가 붙기 전에 엄마와 이혼을 했는데 엄마는 ‘ 왠수가 결국은 애들 앞날까지 막는다.’ 며 원망을 쏟았다. 부도가 나서 이혼을 했다기에는 둘은 이미 부부로서의 어떠한 기능도 하지 못하던 관계였기에 부도는 트리거가 되었을  진짜 이유는 진실했다.  누구보다 엄마 본인이 가장  알았고 실제는 이혼을 원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에도 한동안 엄마는 가능한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얘기해야 한다며 "사업 때문에 어쩔  없이 따로 산다."라고 말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나도 나지만, 엄마가 감당해야  사회적 압박은  크고 무거웠을 것임을 알기에 나는 '그게 무슨 상관이야.'라고 가벼운  넘겼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결혼 전에 남편과 영화를 보러 갔다가  혼자 토라져 영화는 보지도 않고 팝콘만 가지고 나온 적이 있었다. 그가 '이혼한 '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가볍게 했는데 나는 혼자   저려 화를 냈었다. 아마 우리 사이가 가까워졌고, 결혼도 염두한 관계였기에 부모님의 이혼 사실도 공개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던  같다. 스무 살에 '우리  월세야' 나를 상대에게 감당할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듯, '우리 부모님 이혼했어' 누군가에게 비난이나 무시의 이유가 될까  조심스러웠다. 내가  비난과 무시에 흔들릴까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옳다고 믿은 사람에게 실망할까  신중했다.


기분이 분명 좋았던 여자친구가 갑자기 돌변하니 그는 당황했다. 그가 유리알처럼 속을 보이는 사람이란 것을 알기에  그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엄마 아빠 이혼했어. 그런데 오빠가 이혼한 집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는 것 같아 화가 났어."


그는 드라마 속 남주처럼 유수하게 대사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 기억나지 않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솔직한 말과 일관성 있는 태도는 나에게는 따뜻한 답이었다. 그는 진심과 다른 말을 하고 곧 태도를 바꾸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정말 상관이 없었고, 그 후로도 줄곧 나에게도 나의 부모님에게도 어떤 부정적인 평가나 비난을 한 적이 없었다. 현실 속에서는 득이 되는 행동이 아니라 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 만으로 사실은 충분할지 모른다.


나의 경험들은 지나가던 사람들도 돌아보게 만들 만한 트라우마 사건은 아니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 큰 고난도 깊은 가난도 피해 갔다고 생각한다. 소소하지만 일상 속에서 '내 잘못이 아닌데 사람들은 왜 저렇게 생각할까?' 하는 일을 경험하면 순간 당황한다. 이성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지라고 생각해도 마음으로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이상하게 사람만이 치유해 줄 때가 있다.


많은 경우 나보다 천배 만배 큰 괴로움을 안고 사는 이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머리로는 상처받을 일이 아닌데 마음은 삐죽 눈물이 참아지지 않는 일이 있다. 내 잘못이 아닌데, 남에게 피해 준 일도 아닌데 비난받을까 눈치를 보고 부당하게 비난받기도 한다. 마땅히 억울해야 하는데 수치심이 들고 스스로 작아질 때가 있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의 따뜻한 한마디는 나 혼자는 결코 풀지 못하던 족쇄를 풀기도 하고 반대로 가시 같은 한 마디는 없던 족쇄를 채우기도 한다. 그럴 때 드라마 속 남주처럼 얘기해 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인. MBC 드라마. 2023)
안아줘야지. 괴로웠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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