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에서 연대로 개인에서 집단으로
아들이 맥북을 사면서 애플 TV 3개월 무료 이용권이 생겼다. 그간 보고 싶었던 영화 <플로라 앤 썬>을 보고 뭘 볼까 하다 상담에 대한 내용이라 호기심에 눌러봤는데 재밌었다. 애플 TV+의 오리지널 시리즈로 심리상담가인 지미가 아내와 사별 후 일도 가정도 엉망이 되어 버린 후 동료와 가족, 친구, 일을 통해 다시 삶을 회복하는 이야기이다.
이전에도 상담에 대한 시리즈들은 몇 있었다. 정통 상담은 아니지만 청소년의 성상담 이야기인 넷플릭스의 Sex Education (오티스의 성상담소)가 있었고, 멋진 배우 폴 가브리엘이 상담사로 나오는 HBO의 In Treatment 가 있었다. 인트리트먼트가 시즌 1이 시작했을 때가 내가 미국에서 박사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드라마 보고 학교 가면 미국 친구들이랑 드라마 속 상담 장면을 같이 씹고 뜯고 맛봤던 기억이 있다. 드라마 주요 내용이 실제 상담을 하는 장면이 많아 한국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었던 것 같다.
도대체 왜 제목이 <Shrinking>에서 <맵다! 매워 지미의 상담소>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원제목 자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인 것 같기도 하다. 상담을 하는 나도 Shrink가 정신과의사를 부르는 속어라는 것을 이번에 알았는데 일반 사람들은 더욱 알기 힘들 것 같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보면 의사는 아니고 Psycho-Therapist 심리치료사가 맞는 것 같다. 예상컨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상담이 진행되는 동안 머릿속의 문제들이 줄어드는 것까지를 포함해서 Shrinking 이 되지 않았나 싶다.
총 10회인데,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아내를 잃고 상실의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주인공 지미가 다시 회복하는 모습과, 그의 환자들과 주변 가족과 친구들이 서로서로 의지하며 성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내가 같은 상담을 하는 사람으로서 재밌었던, 통쾌했던 부분은 지미가 속에 있는 얘기를 그냥 막 해대는 것이었다. 그게 상담자로서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아니라는 걸 그도 알고 그의 환자들도 안다. 환자들이 말한다. "너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것도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매번 지미는 자신도 알아 하는 찡그린 표정을 짓고 동료이면서 슈퍼바이저 역할을 하는 폴 (해리슨 포드 역)에게도 혼난다. 나 역시 상담을 하면서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하는 말을 구분하는데, 그럴 때 내가 꼭 '달리고 싶어도 달리지 못하고 목줄이 매어 있는 개' 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상담은 내 욕구대로가 아니라 내담자의 욕구와 단계에 맞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답답함이 평소 전문성에 잘 여며지다가 인생의 시련이 길어지자 어느 순간 지미의 셔츠에서 단추가 떨어져 나가듯 툭 터져 버린다. 그게 1화였다. 전문적으로는 역전이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보통은 그러면 상담은 쉬어야 한다고 하지만 미국이나 한국이나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런지 일을 쉬지 않는다.
지미는 환자와 이중관계를 만들고 환자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역전이 상황에서도 계속 상담을 하는 등 APA(미국 심리학회)에서 정한 상담윤리를 제멋대로 어긴다. 환자를 집에서 묵게 하고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은 '헉'소리가 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속으로 미국에서 정말 저런다고? OMG를 연발하게 하는데 다행히도 지미가 우당탕탕 하는 동안, 폴(해리슨 포드 역)이 옆에서 그럴 경우 어떤 위험이 있는지를 계속 알려주고 경계를 세워준다는 것이다. 그런 동료가 있다는 것은 참 부러웠다. 상담은 북미권 문화이고, 그 안에서 만들어진 틀이 우리나라에 온 것인데, 현재 미국은 이전의 견고했던 프레임이 다소 부드러워진 것인지 아니면 그냥 드라마라 그런 것인지 좀 궁금하기도 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상담이라는 치료방식은 독립성과 자율성이 중요한 서구 문화에서 개인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도록 고안된 장치라고 본다. 혼자는 못하겠고 그렇다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지하는 것은 독립적이지 않으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랬던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다시 연대를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독립과 자율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슬며시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오는 치유와 성장에 대한 콘텐츠가 많아졌다. 15년 전의 HBO 인트리트먼트에서는 개개인의 환자와 개개인의 치료자로 이야기가 구성되었다면, Shrinking에서는 치료자들끼리의 연대와 치료자와 환자의 연대까지 볼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켈리 맥고니걸은 TED에서 스트레스를 건강한 방식으로 대처하는데 도움을 주는 호르몬으로 옥시토신을 거론한다. 이는 인간의 공감능력을 향상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친밀한 관계를 강화해 주는 호르몬이다. 놀라운 것은 이 옥시토신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 분비되어 힘들 때 다른 사람을 찾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타인의 손을 잡게 하고 싶고 더 이해하게 만들어 연대를 형성하도록 돕고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감당하고 성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힘들면 주변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함께 하라고 얘기한다. 혼자 있지 말고 연대하라고, 마치 상호의존적인 방향의 과거 동양적인 문화가 인간을 위기에서 구해준다고 말하는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