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모임 친구이자 동료의 리뷰를 보고 읽게 된 김미옥 작가의 [미오기傳]은 제대로 걸크러쉬였다.
와... 분명 반백살은 넘어 보이는 그녀는 여전히 트렌디하고 에너지가 가득하고 위트가 넘쳤다. 페북 스타가 된 것이 우연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의 바닷속에서도 날치처럼 은빛을 빛내며 튀어 오를 것 같았다.
나도 쓰고 너도 쓰는 에세이들이 범람하고, 전자책이든 종이책이든 누군가의 소중한 이야기는 입지 않는 옷처럼 공장과 옷장에 켜켜이 쌓인다. 지방의 카페에 가면 그 지역의 작가들이 기증한 그들의 에세이를 볼 때가 있다. 브런치에서도 그렇다. 매년 높은 경쟁률을 뚫고 10편의 책이 발간되지만, 그들의 후일담을 읽어 보면 재인쇄로 가는 경우는 많지 않은 듯하다. 브런치에서 만 그런 것이 아니다. 등단을 하고 공모전에 우승을 한다고 지속적인 창작활동이 보장되지도 않고 독자들의 눈을 계속 사로잡을 수도 없다. 그것이 현실이다. 우승과 등단을 한 작가도 그럴진대 나 같은 습작생의 글은 오죽하겠는가. 여전히 "이유가 있어 사냐? 그냥 살지. 이유가 있어 쓰냐? 그냥 쓰지. 안 쓰면 또 뭐 할 건데!"라는 생각으로 나의 글을 계속 쓴다. 한편 쓸쓸하고 한편 자유롭다.
미오기전을 보면서 또 반가웠다. 나하고 이어질 일 없었을 한 사람의 인생이 무지개빛깔로 다가와 인사하는 기분이었다.
부당하게 자신의 뺨을 때린 수학 선생님, 선수도 수련이라는 핑계 하에 성희롱을 일삼았던 회사의 높은 분, 도와주러 갔는데 오히려 나를 때린 오빠, 회사 내에서 여성이라서 차별받고 시댁에서는 능력 있는 며느리라고 힐난의 대상이 되지만 그녀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해탈함으로 난관을 시트콤으로 승화한다. 다 좋다. 그럴 수 있다. 멋있다. 그런데 어떻게 미오기는 평생을 정서적으로 학대하고 현재까지 이용하고 있다고 보이는 친엄마에 대해서도 관대할 수 있을까? 그녀의 어머니는 12살 딸을 초등학교에서 끌어내어 밤 11시까지 공장에서 일하게 만들고 그 돈으로 오빠들을 교육시켰다. '딸년'이 책을 본다는 이유만으로 허파가 뒤집혀 악담을 퍼붓고 태몽까지 악몽이었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딸을 자신의 뜻대로 휘두르기 위해 노란 빨랫줄을 가지고 자살위협을 하는 엄마를 작가는 청소년 자식처럼 포용한다. 원망과 분노가 아닌, "쓰고 맵고 아린 시간에 열을 가하자 순한 맛이 되었다."라고 그렇게 자신의 과거를 푹 고아 "곰국"으로 만들었다. 그녀의 레시피가 너무 어려웠고 신선했다.
요새는 도움이 되지 않는 가족과 절연하고 불편한 친구와 손절하는 것이 유지하는 것보다는 더 건강한 선택으로 얘기된다. 책이나 짤, 드라마나 영상을 보면 그런 트렌드가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그것도 옳다. 과거 그러지 못해 상처받았던 이들이 굳이 억지로 감당할 수 없는 만큼의 짐을 질 필요는 없다. 질 수 없는, 해가 되는 짐을 내리는 것 역시 용기이다.
그런데 미오기를 보라. 김미옥 작가는 큰 그릇으로 그런 성게 같은 사람들을 담고 품는다. 처음에는 열등감이 들었지만 책을 읽다 보니 존경심이 들었다. 부당한 이들로 인한 상처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분노를 유쾌한 공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힘든 삶 속에서 자신을 키운 따스한 밥 한 공기의 감사함을 잊지 않았다. 짐을 내려 놓는 사람도 짐을 들고 있는 사람도 옳지 않은 사람이 없다.
책을 다 읽었을 때, 프롤로그의 첫 문단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때마다 나는 과거를 불러 화해했다. 쓰고 맵고 아린 시간에 열을 가하자 순한 맛이 되었다. 나는 술래잡기하듯 아픈 기억을 찾아내 친구로 만들었다.... 서글픈 기억이 다시는 내 인생을 흔들지 않기를 바라며 쓴 글이다. 쓰다 보니 웃게 되었고 웃다 보니 유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