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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Jul 11. 2024

나의 첫 미국인 내담자

Catch-22

미국의 인정받는 상담심리 학위 과정은 대부분 APA(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프로그램과 연계되어 있다. 공부를 하면서 APA에서 요구하는 상담에 필요한 필수 과목을 이수해야 하고 APA에서 인증된 슈퍼바이저가 있는 상담실에서 상담실습을 받고, 졸업 후에는 상담 인턴을 1년 해야 학위가 나온다.  우리나의 한국상담심리학회가 아마도 미국의 APA 시스템을 모방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 그냥 내 실력이 부족하면 내가 안 자고 더 많은 시간을 써서 하면 된다. 리포트를 쓸 때는 남들보다 3배는 더 시간이 들었다. 단순히 수업 발표에도 학회에 들고 가도 될 만큼의 레퍼런스를 달았다. 성실히 하려는 노력이기도 했지만, 내 말로 적어내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있어 더 많은 참고문헌을 찾았다는 생각을 한다. 굳이, 안 그래도 되었다. 완전하지 않아도 그냥 내 생각을 글로 적을 실력은 있었으므로. 하지만 잘하고 싶었고 틀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더 완벽히 했다. 당연히 성적은 좋았다.


하지만 상담은 아니다. 상담은 줄줄 외워서 잘 볼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다. 내가 한 다음 말에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뭐라고 답할지 생각하다가는 상담은 망한다.


문제는 영어였고, 문제는 내가 영어를 매우 잘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경력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다른 동기들 보다는 경험이 있어서 상담을 잘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내가 못 알아듣거나 내담자가 내 말을 못 알아들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첫 내담자는 백인 남학생이었다. 네이쓴. (미국에서 워낙 철수 영희 같은 이름이라 적어도 큰 영향은 없을 것 같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급격히 우울감이 커져서 수업 출결도 숙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18세인 그 아이는 천천히 내려앉는 배처럼 침몰했다. 일상생활이 안되고 있었기 때문에 약을 먹을 필요가 있었고, 다음 학기까지 무리해서 등록한다면 학점은 더 곤두박질 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실망할 것을 두려워해 말하지 못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출처 https://www.bbc.co.uk/programmes/w3ct1rmj
Catch-22


뭐지?


난 당황했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난다. 들었는데 모르는 말. 영어를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곳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말이 있다. '아'하면 '어'해야 하는데 나만 '뭐라고?' 하는 상황이다. Catch-22. 우리말로 하자면 진퇴양난, 사면초가여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말한다. 딜레마. 모순적인 상황을 대표하는 유명한 미국 소설 제목에서 나온 말이었다. 내가 1961년도 미국 책 속의 딜레마를 어떻게 알겠는가. 문제는 한번 삑사리가 나면 그 여운이 오래간다는 것이다. 빨리 제정신을 찾아와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Catch-22가 무한 반복된다. 어떻게 상담을 끝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생각보다는 언제나 최악이 아니다.


나의 내담자는 결국 선택을 했고, 다음 학기를 휴학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부모님은 그가 학기를 망쳐버린 것을 크게 나무라지 않았고 마음이 아팠던 아이를 따뜻하게 받아주었다. 나의 상담이 도움이 되어서였는지, 그가 더는 못 참아서였는지, 처음부터 그렇게 될 일이어서였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영어를 완벽히 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더 더 열심히 온전히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의 말을 내놓는 그 마음에 닿기 위해. 그는 출결도 제때 하지 못했지만 한 번도 오전 상담에 늦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먼저 와서 기다리던 금발의 곱슬머리를 한 나의 첫 내담자.  상담은 내가 해 주는데 그가 오는 게 왜 그렇게 고마웠을까.  


다른 내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게이인 내담자는 커밍아웃을 하면 자신의 학비를 지원해 주는 할머니로부터 받는 장학금이 끊길 것이고 정체성을 숨기자니 자신이 아닌 것 같고 속이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 (미국은 사립 대학이거나 사는 지역과 학교가 다른 경우 학비가 매우 비싸다. 그 학비를 돈 많은 조부모님들이 도와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연인과 헤어지자니 외롭고 만나자니 너무 싸우고.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미국 사람들은 어린아이들도 사회적인 태도가 세련된 편이다. 어른 같은 메너와 attitude를 우리나라 보다 더 철저히 교육받는다. 하지만  18살에 집을 떠나 학교로 온 아이들이다. 어른 같은 표정과 태도를 가졌지만, 이제까지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부모님 집에서 지내다가 돈 없이 홀로 선 학생이다. 미국은 21 살이 되어 술을 마실 수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Club 21이라고 21살이 된 학생들을 우리나라의 성인식처럼 축하해 주고 카드와 선물을 전해준다. 대학생이라고 하지만 파티에서 탄산수를 마시고, 몰래 술을 마시는 아직 청소년들이다.  남자 친구/여자 친구와 싸우고 수업에 못 들어가고, 부모님에게 인정받고 싶어 전전긍긍하고, 성적이 안 나오면 장학금을 못 받을까 봐 불안해한다. 인싸가 되고 싶지만 많은 경우는 그 언저리에 있고, 학비와 취직을 걱정하고, 친구가 타고 다니는 스포츠카에 주눅 든다.   


그들의 고민은 나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공부를 계속하자니 외롭고 불행했다. 그렇다고 관두자니 이제까지 투자한 것도 아깝고 다시 한국에 가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도 두려웠다. 시간은 가고 나이는 먹고 여기가 원하는 삶은 아닌  같은데, 보장받은 다른 미래가 있지도 않았다.  역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It’s Catch-22!!


상담을 하면서 사실 가장 위안을 받았다. 나의 위안을 위한 상담이 아니지만 그랬다.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공간. 유학을 하는 내내 그곳에 속해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I don't belong here.


내가 가장 힘들게 느꼈던 진실이었다. 하지만 상담실에 있을 때는,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었고 완전히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공부가 제일 재밌었고 상담이 나를 안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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