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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Jul 18. 2024

문제는 Not 영어, But 영어를 못한다는 내 생각

박사과정 1년 차는 전쟁이었다. 공부도 공부지만, 당장 일자리를 구하지 않으면 당장 내년부터 버티기 어려웠다. 영국에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갔을 때도 그랬지만, 집에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필요하다고 하면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보내 줄 수도 있겠지만, 현금이 없는 집에서 갑자기 수천만 원이 나오려면 누군가는 분명 무리를 해야 했다. 내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손 벌리는 일만큼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에 다닐 때도 6시에 일어나서 12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갔던 나였다. 알바도 하지 않으면서 주 20시간 정도의 수업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업을 듣고 숙제를 하고도 남는 숱한 시간에 나는 끊임없이 장학금과 job을 알아봤다. 학생비자로 할 수 있는 일은 학교 GA(행정조교)와 TA(티칭조교)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업도 따라가기 바쁜데 수업을 할 만한 영어 실력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TA는 포기하고 GA는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끊임없이 교내 구직자리를 알아봤다. 어딘지가 중요하지 않았고 닥치는 대로 지원했다. 


상담은 연구조교가 거의 없었다. 랩실이 있는 전공은 실험을 하는 연구 조교들이 많이 필요했지만 상담은 아니었다. 전체 상담전공에 RA가 딱 2명 있었고 이미 논문주제를 고른 미국애들과 그들의 지도교수가 함께 일했다. 이제 막 박사과정을 시작한 어리바리에게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다. SOP를 쓸 때처럼 열심히 C.V와 지원서를 작성했다. 대학원 때 T.A와 R.A를 했었고, 시간강사로도 일했고, 워크숍 코디네이터도 했었기 때문에 경력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언제나 영어였다. 


대학원 생활 내내 나는 내가 Rerated 저능아 같고 Disabled 장애인 같았다. 어쩔 때는 장애인을 위한 자동문 버튼을 누르고 당당히 들어가기도 했다. 남들보다 몇 배가 되는 학비를 내고 10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와서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건지 현타가 왔다. 언제나 겸손했고, 두세 번씩 확인했고, 나를 의심했다. 교수님이 수업에서 과제나 성적, 시험과 관련된 중요한 얘기를 하면 분명히 들었지만 틀릴까 봐 다시 확인했다. 옆에 있는 동기들에게 물어보거나 교수님에게 다시 확인했다. 


한 번은 중간고사를 보는데 질문이 10개나 되었다. 나는 내가 줄줄 외운 것들을 까먹기 전에 모든 집중력을 모아 답안을 작성했다. 교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외운 것을 적느라 뭐라고 말하는지 신경도 쓰지 못했다. 모국어가 아닌 말은 애써 귀를 열지 않으면 자동으로 안 들린다. 시험시간은 3시간이었고, 3시간을 모두 채우고 나온 학생은 나 밖에 없었다. 3시간 동안 B4 크기의 갱지 10장을 빽빽이 채웠다. 언제나 그랬다. 모든 시간을 다 써서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적었다. 시험이 끝나고 다음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나를 불렀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 교수님이었다. 10개의 질문 중에 3개를 적으면 되는데, 나는 10개를 모두 적었다고 했다. 


"3 out of 10"


답을 적을 생각에 중요한 지침은 지나친 것이다. 교수님이 이번만 잘 답한 것으로 3개를 뽑아 점수를 주지만, 다음에 또 그런다면 앞의 3개로 점수를 준다고 하셨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면서 등에서 땀이 나고 얼굴이 빨개졌다. 대학원은 절대평가이기 때문에 나에게 점수를 좋게 준다고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가 되지는 않는다. 다행히 이 학교의 박사 과정은 성적 장학금이 없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성적에 예민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패배감이 들 필요 없었는데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그 당시 동등하고 공정하게 지내자고 선을 그었던 나의 상담선배가 내게 해준 얘기가 있었다. 학교에서 International 학생을 뽑았을 때는 학교도 그 학생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영어만 잘할 것 같으면 미국애들만 뽑으면 되는데 학교에서 국제학생을 뽑았을 때는 그것이 정치적인 이유이든 연구의 다양성 때문이든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학교에도 우리를 키울 책임이 있고 우리도 우리가 잘하는 것을 하면 된다고 했다. 우리가 영어를 모국어처럼 잘 못하는 거지 연구나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친절하지 않았지만 멋있었다. 당당했고 주눅 들지 않았다. 아마 오랫동안 외국에서 공부해 왔기에 나보다는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지식도 태도도 세련되었던 것 같다. 그 말은 힘이 되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나의 축 처진 어깨가 올라가진 않았다. 


나의 깊은 고민과 불안이 무색하게 나는 무탈하게 GA자리를 구했다.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밖에 안 하는 내가 학교의 Recreation Center에 Wellbeing 부서에 잡을 얻었다. 웰빙과 관련된 자료를 만들고 행사와 교육을 담당하고, 온라인상의 웰빙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자리였다. 앞으로도 고생문이 쫙 펼쳐지는 자리였지만 너무 좋았다. 인터뷰를 할 때는 놀랍게 영어가 술술 나온다. 불안은 동력이고 집중력을 극대화시키는 부스터다. 긴장하면 영어가 느리게 들린다. 마치 야구선수가 시합에서 공이 느리게 보이는 것과 같이 인터뷰에서는 영어 단어가 하나하나 꽂힌다. Practice makes perfect. 실전만큼 좋은 연습은 없다. 


UREC에서 2년을 일했는데 거기에서 나를 최종적으로 뽑아주었던 최종 보스가 있었다. 아들이 둘 있는 캐나디안 워킹맘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언제나 코트를 돌고, 업무가 끝나면 GX 스피닝 수업을 지도했다. 깡 말랐지만 팔과 다리에 근육이 장난 아니었다. 그녀와 일관련해서 학회를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 같은 방을 썼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왜 인터뷰를 할 때 미국인이 아닌, 영어도 완벽하지 못한 나를 뽑았냐고 물어봤다. 네가 그 자리에 적임자였기 때문이라고 스윗하게 말해주었고 덧붙여, 학교는 효율만을 목표로 직원을 뽑는 것이 아니라 학생을 발전시키는 목표도 함께  있다고 했다. 이곳은 회사가 아니라 학교라는 것이 참 따뜻한 울타리로 들리는 말이었다.              


내가 대학원에 간 것은 영어를 잘하려고 간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나를 뽑은 것도 영어를 잘하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영어가 아니라 영어를 못한다는 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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