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쉽게 사지 못하고 쉽게 버리지 못하는 나는 미국에서 차를 사는데 2년이 걸렸다.
2월에 입학 허가 메일을 받고 5월에 한 달간 학원을 다녀서 6월에 2종 오토 운전면허를 땄다. 평행주차를 잘 못해서 아예 꽁지만 찍고 주차는 포기하고 다른 부분에서 감점을 최소화했다. 한 번의 낙오 없이 인생 첫 면허증을 받았다. 따로 연수를 받을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엄마연수를 받았다. 엄마의 볼 일을 겸해 분당 집에서 인천까지 갔는데 미쳤던 것 같다. 동네 운전도 제대로 안 해보고 고속도로를 타고 세상 복잡한 인천의 도심을 달리는데 진짜 살아온 게 기적이었다. 인적이 좀 드물어진 도로에서 좌회전을 해서 샛길로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역주행이었다. 진짜 다행히도 다른 차가 오지 않았는데 역주행이라는 것을 안 엄마가 보조석 손잡이를 잡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라면 돌아올 때는 왕초보 딸에게 생명을 맡기지 않았을 것 같은데 엄마는 그럴 거면 처음부터 시작도 안 했다며 나에게 끝까지 핸들을 맡겼다. 그러도고 가는 내내 손잡이를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그렇게 운전면허를 급하게 따고 나는 바로 미국 운전면허 시험을 봤다. 언니가 사는 시애틀에서 필기를 완료하고 캠퍼스로 들어가서 주행을 봤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지만, 미국 운전면허는 우리나라처럼 학원에서 다 알아서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차를 가지고 시험을 봐야 했다. 운전면허가 없는데 차를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 이상했지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아마도 가족차로 연습하고 시험도 보러 가지 않았을까 싶다. 시험 비용도 있고 렌트비도 따로 들어가니 운전을 까먹기 전에 빨리 시험을 봤다. 운전면허 시험을 보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스포츠카를 타봤다. 내가 예약한 차에 문제가 생겼는지 훨씬 좋은 차를 준다며 선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안내한 직원이 기억난다. 짙은 회색의 투도어의 늘씬한 스포츠카였다. 보통 타던 세단이나 SUV와 달리 차 바닥이 낮고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으면 한 번에 쑥 나갔다. 이 좋은 차로 고작 운전면허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까웠지만, 오랜만에 부자가 된 기분으로 시험을 보고 남은 시간에는 마트에 가서 장을 봤다. 차가 좋아서였는지 한 번에 턱 하니 붙었다. 운전면허가 있으면 외국인이라도 미국 국내를 이동하는 비행기를 탈 때 여권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상징적으로는 미국에서 신분증이 생긴다는 것이 뭔가 인정받는 기분이라 좋았다. 하지만 운전면허가 생기고도 1년 넘게 차를 사지 않고 장롱 속에 고이 보관했다.
처음 1년은 미국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를 사지 않았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데 차를 사는데 비용과 시간을 쓰고 또 팔면서 손해를 보기 싫어서 버텼다. 하지만, 차가 없어서 적응을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2년이 다 되어갈 무렵 차를 샀다. 처음 산 차가 크라이슬러 은색 PT 크루져였다. (그래도 첫 차인데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뒀어야 했는데, 사진이 없다.) 중고였고, 그 당시 비용으로 9000달러 정도였다. 개인 간 거래였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허술해서 다운계약서를 써서 세금을 아끼는 일이 많았다. 돈 없는 학생들이 사는 시골의 캠퍼스 타운이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도 슬쩍 다운계약서를 제안했는데 그때 차주였던 백인 중년 남성의 말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Taxes are a part of life.
다운 계약을 하는 것이 그에게도 세금을 줄일 수 있는 편법이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나를 무안 주려는 것도 아니고,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치대로 사는 삶을 설명했다. 너무 나이스 했고 당당해 보였다. 나는 세금이라면 그게 얼마라도 아까워했는데, 그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멋있었다. 모든 미국인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때 내가 만난 금발의 백인 중년 남성이 보여준 그 신념과 세련된 표현 방식이 인상 깊었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미국에 있는 3년 동안 차별을 당하기도 하고 잘 몰라서 손해를 보는 일도 있었지만, 미국이 왜 선진국인가를 배운 선례도 많이 있었다.
괘씸하긴 했지만 국립공원에 가면 감탄이 나왔다. 다른 나라의 숲과 산은, 밀림은 초토화시킬지언정 미국 내의 산림은 철저히 보존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수천년된 나무들, 옐로우스톤의 온천과 간헐천들을 정말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시애틀의 마운튼레이니어도 겨울에 가면 사람 키보다 높게 쌓여있는 설원의 풍경도 진짜 멋있다. 국립공원도 있지만 각 주의 작은 공원들도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잘 관리하고 있었다.
GA로 대학의 스포츠센터에서 일을 할 때도, 잔업이나 개인적인 일을 부당하게 시키는 상사는 없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조교를 하는 학생이라면 부당한 교수들의 잡무를 감당하는 일이 꽤 많았다. 다행히 내가 함께 일하던 교수님은 아니셨지만, 연구실에서 일하는 친구들은 정해진 업무 시간이라는 개념자체가 무의미했다. 아침에 출근해서 샛별을 보고 퇴근하기도 하고 주말이나 방학도 없이 연구실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 그렇게 받는 임금은 형편없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학생은 주 20시간만 일하면 됐다. 나머지는 자기 공부와 개발을 위한 시간이었다. 물론 그중에 아닌 교수들이나 교직원들도 있었겠지만, 한국의 문화에 비하면 월등히 합리적이었다. 지금은 나아졌을까? 부디 그렇게 되었기를 기도해 본다.
국가에서 정한 정당한 세금을 내는 것이 삶의 일부라고 말하는 지역의 중년 아저씨.
자국의 산과 들, 나무 한그루와 호수와 강의 환경을 보호하는 정책.
너는 직원이지만 학생이니 우리는 너를 발전을 도울 의무가 있다고 말해주는 나의 보스.
미국은 아름다운 나라였다.
내 나라는 아니었지만...
*8월8일 목요일은 여름휴가로 한 주 휴재합니다. 즐거운 연휴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