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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Aug 22. 2024

뇌생리학 수업을 들어야 해?

5학기 때 Brain Physiology를 수강했다. 오 마이갓이었다. 심리학과 상담심리학 석박사 과정의 필수 과목이었다. 나는 사람도 죽일 수 있을 만한 벽돌 같은 뇌생리학 책을 보고 압도되었다. 아직 미지의 영역이라는 인간의 뇌, 그래서 빙산의 일각만이 밝혀진 그 영역은 방대했다. 무슨 명칭이 그렇게 많은지 깨알 같은 글씨로 실지렁이 같은 주름 하나하나에 각각의 이름과 쓰임이 적혀있었다. 그 책으로 죽을 사람은 바로 내가 확실했다.


그래도 위안인 것은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영어로 되어있지만, 미국인들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한국인이 이라고 한국에서 의사가 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듯, 미국인이라고 영어로 뇌생리학을 배우는 게 쉬운 게 아닌 거다. 적어도 이 과목에서 만큼은 같은 페이지에 있다는 기분이었다. 교수님은 산타 같은 하얀 수염이 턱 전체를 덮고 있는 나이 든 백인 할아버지였다. 3번째 수업을 듣고 교수님과의 면담을 청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수업에 가야 할지 질문했다. 교수님이 지극히 정상이니 그냥 오면 된다고 하셨다. 3학점 수업을 듣는다고 다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고 평생을 연구한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고 하셨다. 그냥 모르면 모르는 대로 수업을 따라오라고 하셨다. 풀린 것은 없는데 마음은 편해졌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국 교수들이 가지고 있는 여유가 있다. 우리나라의 권위적인 면을 느낀 적은 많지가 않다. '넘어오지 마.' 하는 선이 다르긴 하지만, 분명 우리나라가 미국에 비하면 더 권위적인 것은 맞다. 우리는 교수님을 '모시는 문화'고, 미국은 '함께 연구하는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결국 박사학위를 주는 것이 지도교수와 학과 교수들이기 때문에 잘 보여야 하는 것은 맞지만, 잘 보여야 하는 강도가 한국보다는 약하다. 사실 교수도 연구가 업무인 직장인일 뿐인데, 우리나라는 좀 더 높은 계급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처음 지도 교수는 하와이안계 혼혈 여자 교수였는데 학교 청소부랑 연애 중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소문이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여자 교수와 청소부가 교내에서 연애를 한다는 것에 처음 놀랐고, 미국 친구들은 그 대상이 청소부인 것에 큰 편견이 없다는 것에 두 번째로 놀랐다. 누가 누구랑 사귄다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흥미로운 이슈이지만, 그게 누구인지 어디에서 사귀는지는 나라와 시대별로 그 이해 범위가 참 다르다. 아마도 그 당시 미국은, 또 내가 있던 서북부의 미국 시골은 학력이나 직업의 차별이 나의 기준보다 훨씬 평평했던 것 같다.     


뇌생리학 수업이 나에게 충격이었던 것은, 정확히 모르면 모르는 대로 들어도 된다는 교수님의 가벼운 조언과 달리 수업에 대한 투자는 매우 컸다는 것이다. 수업 중에 해부시간이 있었는데 우리가 직접 해부를 하는 것은 아니고 해부가 된 시체의 뇌와 척수를 관찰하는 것이었다. 해부실험실의 6개 정도의 테이블에는 엎드려있는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 해부에 참여하는 것은 초등학교 때 오징어 해부를 한 것 이외에 처음이었다. 학생들을 위해 시신을 기부한 분들에게 감사의 묵념을 했고, 나 역시도 굉장히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조의 테이블에는 백인 남성이 엎드려 있었는데 그의 뇌는 열려서 잘려 있었고 목으로 타고 내려가는 뼈도 열려 있었다. 안 보려고 했지만, 난 그의 얼굴을 보고야 말았다. 오래 눌려 있어서인지 높은 코 끝이 'ㄴ' 자로 꺾여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고령의 백인 남성의 얼굴이 한 동안 떠올라, 잠을 잘 때는 무교임에도 성경과 염주를 침대 옆에 두고 자야 했다. 이들은 참 교육에 진심이라는 생각에 부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막 다시 듣고 싶은 수업은 아니었다. 사실 상담현장에서 말할 일이 없는 지식이라 지금 기억에 남는 것은 거의 없다. 해부 시간에 본 시체와 이를 닦을 때 얼마나 많고 복잡한 뇌의 작용이 있는지를 들었던 것 정도이다. 


처음의 투지는 3년 차에서 많이 꺾여 있었다. 학기 초에 겨우 살려 놨던 불씨가 중간고사 기간을 넘기기도 전에 빠르게 사그라 들었다. 나는 결국 그 과목을 끝까지 듣지 않고 드랍했다. 대학교 1학년 때 멋모르고 들었던 일본어 수업을 수강포기 한 이후의 최초의 포기였다. 그 당시의 포기는 3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1학년 여름방학 부터 1년간 시사일본어 학원을 다닌 후 재수강하여 끝내는 일본어 1, 2 수업에 A+를 받아냈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단 한번도 힘들다는 이유로 스스로 그만둔 적이 없었다. 사장님이 사업을 접거나 내가 한국을 떠나거나 한국에 돌아가야 할 정도의 이유가 아니면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는 수학을 진짜 못했고, 1년간 나를 가르쳐준 과외 선생님이 수학은 포기하고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고 했었다. 그 때도 난 기여이 수학을 놓지 못하고 수능을 망쳤다. 길을 잃어도, 나는 끝까지 갔다. 가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설령 목표한 그 지점 까지 가지 못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 얻는 성취감이 있었다. 그것이 자존심이든 끈기든 똥고집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내 정체성이라고 믿었다.   


불안이 낮아지고 외로움이 증폭되었던 그 시기에 나를 쫀쫀하게 붙잡고 있던 고무줄이 느슨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험 볼 때면 혼자 3시간을 앉아 10장이 넘는 시험지에 빽빽이 답안을 작성하던 나는 더 이상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자에서 꼭 해야 할까 하는 마음이 들 때,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힘들어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버텨왔던 마음이 붕괴되고 있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나의 뇌의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고장이 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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