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evere. 가혹함을 견뎌라.
Persevere. 가혹함을 견뎌라.
Per는 완전히, 철저히 란 의미의 접두사고 severe는 가혹한 이란 뜻의 형용사이다. 두 단 어가 합쳐져서 스스로에게 철저히 가혹해지는 것, 그 가혹함을 견디다의 의미가 된다. 불행한 단어인데, 우리에게 견딘다는 것은 숭고한 의미를 주는 것 같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처럼 견디면 나아질 것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지긋지긋한 고등학교 입시과정을, 햇볕 한 점 안 드는 지하방에서 IMF를,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박사과정을, 천방지축 야생동물 같은 아들의 양육을 견딘다. 그 견딤을 통해 대학을 갔고, 성인이 되었고,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고, 한 생명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길러낸다.
요새는 그냥 화가 난다. 스스로의 삶에 대해서... 치열하게 살았는데, 지금의 난 아무것도 아니다. 미국에 와서 줄곧, 일주일에 3-4일은 슬프고, 한 달에 20일 이상은 잿빛 속에 사는 것 같다. 밖에 나가면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고, 사람들에 대한 흥미도 잃었다. 기대도 기쁨도 없이 외로움만 가득하다. 사람은 오로지 견디는 것 밖에 할 게 없는 때가 있다. 지독히 싫지만, 그대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최선의 노력이라고… 내 삶에 맞서 견딘다는 건, 고독한 일이다.
2009.2.6
박사과정 4학기 때의 어느 겨울밤에 쓴 일기다. 목요일에 한 주의 수업과 GA업무가 끝나고,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 나는 붙박이 장처럼 그대로 있었다. 깜깜한 밤이었다. 창문 밖이 보이도록 둔 책상 앞에 앉아 나는 암흑 같은 밖을 내다봤다. 언제랄 것도 없이 대부분의 시간이 그랬다. 한국에서 가져온 노란 맥심 골드 믹스커피를 뜨겁게 타서 마셨다. 나의 노동주였다. 새벽까지 공부를 하고 아침에 일어나 혼자 밥을 먹었다. 일요일 아침이 되면 눈 때문에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세게 밀어 열고 나가 잠시 바깥 바람을 맞았다.
오히려 모든 것이 안정된 그때, 나는 길을 잃었다.
캠퍼스 안에 있는 기숙사에서 나와 대학원생들을 위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서 온전히 집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했다. 공동 주방에서 개인 주방이 생겼고, 굳이 집 밖을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미루고 미루던 차를 샀고, 월 2회 정도 장을 봤다. 가끔 상담실에 가서만 할 수 있는 서류 작업이나 사례 정리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 그대로 있었다. '수업에 적응하면 편하겠지, 장학금을 받으면 걱정 없겠지, 논문주제를 정하면 괜찮겠지, 상담실에서 상담 잘하면 뿌듯하겠지.'라고 생각하고 하루하루 To do List를 지워나가고 학기 별로 해야 할 일들을 달성했다. 편하고 걱정 없고 괜찮고 뿌듯하기도 했는데 우울했고 무기력했다. 살아가는 일은 줄곧 견디는 일이었다.
왜 그랬을까?
강력한 동력이었던 불안이 없어졌을 때 미친 듯이 증폭된 것은 그동안 억눌린 외로움이었다. 나에게는 성공보다 중요하고 명성보다 중요한 추동이었다. 외로움이 감당할 수 있는 게이지를 넘어서면 난 자폭한다. (참고. 09화 나는 똑똑한 척하는 겁쟁이 (brunch.co.kr)) 그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결국 아무도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의 영원한 마시멜로
사랑
내가 진정 원한 것은 성공도 명예도 아니었다. 지금도 존경받는 학자의 삶과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삶을 선택하라고 하면 난 지체 없이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없었다. 만났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 짝은 아니었다. 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었지 아무나 만나서 나 자신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혹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왔다면, 나는 끝까지 공부를 했을 것 같다. 공부는 그래도 가장 재밌었고, 나를 3년이나 미국에 있을 수 있게 해 준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그 재미나 훗날의 성취 때문에 계속 불행할 수는 없었다. 내가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외롭다고 외치는 소리는 거짓알람이 아니었다. 나는 나를 불행하게 둘 수 없었다.
정교수가 되려면 약 10년이 더 소요된다. 논문을 쓰고 박사수료하는데 1~2년, 미국에서 상담 인턴을 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하는데 또 1~2년, 한국으로 돌아가 교수가 되기 위해 시간강사를 하며 경력을 쌓는데 또 3~5년. 운이 좋으면 40살쯤 되어 정교수 트랙에 들어가 안정을 찾게 될 것이다. 원하는 것을 마침내 이룬 그때, 나는 정말 행복할까?
유학의 꿈을 이루고 미국에 왔을 때, 깜짝 놀랐다. 힘들게 올라왔는데 이 산은 내가 오르려던 그 산이 아니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오롯이 나의 선택이어 누구도 원망할 수 없었고 불평할 수도 없었다. 나를 속이고 이 산이 내가 원한 그 산이 맞다고 우길지, 나의 실패를 인정하고 진짜 내 산을 찾아 다시 오를지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