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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Aug 29. 2024

논문, 그 족쇄

논문을 써본 사람들은 안다. 석박사 과정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논문이라는 족쇄가 발목에 채워진다. 야구공만 한 쇳덩어리는 해가 가면 갈수록 커져서 기어이 혼자 들기도 힘든 대왕 수박만 해진다. 어디를 가도 따라다닌다. 밥을 먹을 때도 카페에 갈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옆에 딱 붙어 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갈 때도 비용도 안 내면서 기내에 함께 탑승한다. 지긋지긋한데 벗어날 수가 없고 또 집중하고 있으면 재밌고 누가 가져갈까 두렵고 욕하면 화나는 애증의 존재다.


석사 때는 스트레스와 진로결정자기효능감에 관한 논문을 썼다. 처음 석사를 시작할 때는 무지의 오만으로 석사 논문은 '껌'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1년 만에 그 생각은 바닥에 붙은 껌처럼 납작해졌다. 나중에는 지도교수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정말 끝내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읍소할 지경이었다.


보통 정기적으로 교수님 시간에 맞춰 논문지도를 받았다. 교수님이 가능하다고 하시면 밤 9시에도 가고 주말 오전에도 출동했다. 교수 연구실로 오라고 하시면 연구실로 가고, 개인 상담실로 오라고 하시면 상담실로 출동했다. 모든 스케줄은 논문이 첫 번째고 나머지가 다음이었다. 교수님이 우리를 오라 가라 하신 것은 갑질이 아니었다. 그 당시 석사 동기가 7~8명이었는데 상담 전공 교수님이 두 분 계셔서 나눠서 지도를 받았다. 네댓 명이 나와 함께 지도를 받았는데 적어도 한 명당 30분이 넘는 시간을 꼼꼼하게 리뷰하고 지적하고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많은 경우 업무 이외의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주중 낮시간에는 수업, 학부생 상담과 수업 준비, 학과 업무, 개인 연구를 하셨고 평일 오후와 밤시간에는 대학원 수업도 있었다. 그러니 논문지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야간이거나 주말 밖에 없으셨던 거다. 심지어 방학 때도 정기적으로 불러 논문을 봐주셨다. 그렇게까지 안 하고 평일 업무 시간에 5~10분 정도 만나 웃으며 진도 확인만 했어도 지도교수로서 최소한의 의무는 충족이니 말이다. 통계가 좀 형편없고 Literature Review가 좀 부실해도 '박사도 아니고 석사'라는 핑계가 있었고, 그래서 논문심사에 떨어진데도 학생 탓이지 교수 책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지도교수님은 그러지 않았다. 석사는 연구의 방법을 배우는 단계라는 생각에 더 잘 배워야 한다는 소신이 있으셨던 것 같다. 틀린 것을 완벽히 찾을 줄 모르는 단계니 어디서 논리적 오류가 있고 통계에서 무엇이 틀렸는지도 꼼꼼히 알려주셨다.


연구 주제를 잡고 그 주제가 과거 연구와 겹치지 않는지 상담에서 의의가 있는지 점검하는데 몇 달이 걸렸다. 그리고 비로소 연구필요성을 쓰고 또 쓰고 하는데 몇 달을 쓰고서야 비로소 본 연구에 들어갔다. 논문의 첫 장인 연구필요성이 통과된 것만도 환호할 일이었다. 물론 그 뒤로 설문지를 만들고 뿌리고 거둬서 미지의 언어인 통계와 싸우고 구르는 지고 지난한 과정이 남아있었다. 석사 논문 쓰고 Proposal 통과하고 논문심사 통과하기까지 뭐 하나 쉬운 과정이 없었다. 논문지도를 받고 올 때는 주변은 이미 어둑어둑했고 다들 어깨가 축 처져서 아무도 말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한국의 지도교수님은 자신의 직업적 책임 이상의 기여와 애정을 보여 주었고, 제자들은 그런 교수님에게 감사했다. 그것이 어쩌면 철저하게 비용을 지급받는 만큼 자신의 시간과 전문성을 제공하고 책임 범위를 구분하는 미국의 교수들과 다른 점이었다. 박사과정에서 미국의 지도교수는 자신이 월급을 받지 않는 방학기간 동안은 메일을 막아놓았고 금요일 오후에 보낸 메일은 월요일 이후에 답을 줬다. 학점에 포함된 논문 지도시간 이외에는 관련된 대화를 하는 것도 거부했었다. 단 5분도, 자신의 의무가 아닌 시간을 학생에게 공짜로 주지 않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지도교수들은 각각 그랬다. 한국 문화는 그 책임과 의무의 경계를 넘나 들며 사제관계를 형성한다. 그것이 어떤 때는 독이고 어떤 때는 득이다. 아마도 그것은 사제관계 만은 아닐 것이다. 가족관계에서도 상대적으로 가족 구성원 간의 책임과 의무, 개입과 존중의 바운더리가 모호하다. 머리로는 미국의 제도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한국문화에 익숙했던 것 같다.  


그렇게 쓴 논문에는 자부심이 있었다. 뿌듯했고 당당했다.


그 과정을 다시 시작한다고 마음먹는 데는 각오가 필요했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학위를 받으면서 과거의 절망은 잊었던 거다. 나는 또 오만해졌다. 바닷속에서 유영하듯 자유롭게 관심 주제를 오고 갔다. 문화 적응과 변용(acculturation), 청소년의 성정체성 (gender identity), 진로(career)와 상담의 역할 등 호기심은 머물지 않고 움직였다. 유학생이라는 신분에 맞게 할 수 있는 연구 범위와 기여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내가 더 원하는, 계속해보고 싶은 분야가 뭔지를 찾게 되었다. 사실 한국은 미국과 달리 단일민족이고 문화 변용이 심한 환경이 아니다. 처음에는 미국에서 팔릴 만한 연구를 찾았지만 결국은 내가 진심으로 관심 있는 연구 분야를 찾아야 했다. 정말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서는 그 힘든 과정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다행히 알았다. 설령 연구 방법과 샘플을 찾기 어렵고 설문을 걷어내기 힘들다 하더라도 말이다.


3년 차에 머물렀던 주제는 성에 대한 이중잣대 (sexual double standard; SDS)가 로맨틱한 관계에서 갖는 역동이었다. SDS는 성적인 행동이나 생각이 남녀에게 다른 기준으로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나는 한국의 보수적인 성문화 속에서 자란 탓에 뿌리 깊은 성적인 딜레마가 있었고 그것을 풀고 싶었다. 머리로는 남녀평등이라고 생각하면서 예기치 못한 순간에 경험으로 습득한 성에 대한 이중잣대가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상담을 해보면 여전히 여성이 갖는 성에 대한 교육받은 지식과 실제 행동 사이의 괴리가 있다. 또 남성이 경험하는 부당한 이중잣대도 시대와 함께 달라진 남성들을 괴롭힌다. 성역사 질문지를 돌려 보면 MZ 부부들 중에도 여성의 경우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발전시키거나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소극적이고, 남성의 경우 자신이 남자니 성적으로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부담을 갖는다. 성에 대한 관심이 많고 연애가 무엇보다 중요한 나에게는 딱 맞는 주제였다. 지금도 그 연구에 대한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제  연애보다 중하지는 않았다.  연구와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랑을 하고 함께 변하고 싶었다.


스스로 족쇄를 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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