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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li Whale Sep 20. 2024

10. 조각난 아버지의 얼굴

처음 본 여자 앞에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을 마주한 지수는 당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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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새벽, 지수의 방

윤영의 흐느낌에 놀란 지수가 그녀의 집 앞으로 달려간다. 오토바이를 타고 지수의 숙소로 온 둘은 서로의 온기에 젖어든다. 


윤영이 떠나고 지수는 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혼자 있으니 쓸쓸하기도 하고 그녀의 냄새가 남아있는 것 같아 좋기도 했다. 외롭지 않았냐는 그녀의 말이, 힘들었겠다는 위로가 낯설면서 좋았다. 아무도 그의 마음을 묻지 않았고 말한다고 들어주는 이도 없었다. 어느 순간 자신조차 외면해 왔다. 가족 얘기를 하면 예외 없이 기분이 안 좋아졌기 때문에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영의 질문을 피하거나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덮는다고 없어지지 않는 마음의 고통이 오랜만에 삐죽 고개를 들었지만, 이전처럼 기분이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 대한 생각에 기분 좋게 잠들었다. 


갑작스러운 벨 소리가 지수를 깨웠다. 핸드폰 화면에 ‘민정철’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아버지였다. 낯설지만 평생 잊지 않을 이름이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전화는 끊겼다. 잠이 확 깼다. 금세 메시지가 도착했다. 

          

“토요일 2시에 내 연구실에서 보자. 할 말이 있다.”     


내일이었다. 메시지 밑으로 단과대학 이름과 연구실 호수가 적혀있었다. 지수는 아버지가 일하는 대학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매주 주말마다 아버지가 서울 집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갈 일이 없기도 했지만, 아들을 직장에 데려갈 만큼 살갑지 않았다. 아빠가 교수라고는 들었지만, 학교에서 무슨 과목을 가르치는지,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과는 상관이 없었다.

      

지수는 ‘바빠요.’라는 글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지금 고등학교에 오고 한 번도 자신을 찾지 않은 아버지가 할 말이 있다는 것이 궁금하기도 했다. 아직도 자신의 학업을 포기하지 못하고 유학이나 대학 때문에 보자고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굳이 학교까지 불러 얘기할 만큼 아버지는 지수에게 성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달리 볼 이유는 없었다.      


“바빠요.”

     

지수는 결국 전송 버튼을 눌렀다. 윤영을 만나고 기쁨과 설렘으로 가득했던 마음에 뻥하고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김이 새고 짜증이 났다. 아버지랑 얘기하면, 아니 생각만 해도 답답했다. 레미콘 차가 와서 자신의 몸에 잘 반죽된 회색 시멘트를 가득 붓는 기분이었다. 시멘트 반죽이 머리끝까지 차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시 윤영에 관한 생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제 윤영이 다녀간 흔적을 깨끗이 치우고 오픈 준비를 했다. 작업 중이던 오토바이를 마저 손보기 위해 앉았지만, 집중이 잘 안 됐다. 알림이 다시 울렸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손가락이 이미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2시다.” 

    

벽창호 같은 아버지의 어투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조용한 불도저처럼 꿋꿋이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 그것이 아버지였다. ‘무슨 상관.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수는 답도 하지 않고 윤영의 프로필을 클릭했다. 

     

“잘 들어갔어요?”      


달콤한 말들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웃음이 났다. 스크롤을 위로 올리니 무뚝뚝한 그녀의 대답이 똑 끊어지듯 찍혀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투와 달리 몸은 유연하고 따뜻했다. 지수에게는 그것이 윤영의 진짜 모습 같았다. 그러는 사이 사장인 대니가 들어왔다. 지수도 아버지의 문자를 잊고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다음날 지수는 아침 일찍부터 잠이 깼다. 아버지의 문자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오전 일을 끝내고 결국 아버지의 연구실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2시간도 걸리지 않았지만, 국도로 가려고 하니 시간이 두 배 정도 더 걸렸다. 빨리 가도 3시에나 도착할 것 같았다.      


“3시쯤 도착할 것 같아요.”          


아버지에게 도착시간을 알릴지 말지 고민하다 결국 문자를 보내고 출발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산이었다. 지수는 점심도 거른 채 3시간을 달려 아버지가 일하는 대학에 도착했다. 오토바이를 탄 채 캠퍼스 안으로 쑥 들어갔다. 지수가 입시원서를 냈던 서울의 전문대학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오래돼 보이는 건물들이 듬성듬성 있었다. 캠퍼스 중앙에 커다란 호수가 있고 그 주변으로 벚나무가 둘러싸여 있었다. 산책길 중간중간 놓인 나무 벤치를 보니 윤영과 함께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들어 난생해본 적 없는 풍경 사진을 찍었다. 어제 아침에 보낸 자신의 인사 뒤에 1이 떨어진 ‘ㅇㅇ’이란 답이 있었다. 지수는 좀 전에 찍은 사진과 하트를 껴안고 있는 곰돌이 이모티콘을 윤영에게 전송했다.  

    

아버지가 알려준 연구동을 물어보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캠퍼스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핸드폰으로 학교 지도를 검색해 연구실을 찾아갔다. 3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연구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서니 내부가 서늘했다. 아버지가 말한 연구실은 건물 맨 윗 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 교수실이 양옆으로 쭉 늘어서 있는 복도에 서니 긴장감이 밀려왔다. 복도에서는 오래된 책 냄새와 비에 젖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냄새가 눅눅하게 묻어났다. 중앙 계단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불이 꺼진 연구실을 지나 문 너머로 환한 형광등 불빛이 문틈으로 새 나오는 곳이 보였다. 아버지가 알려준 506호였다.     

지수는 심호흡을 길게 하고 노크를 했다.      


- 들어와라.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연구실은 책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았다. 연구실의 한 면은 책장으로 꽉 채워져 있었고, 아버지의 책상과 직사각형의 회의 테이블 사이로 높은 책장이 가로막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아버지의 목소리만 들릴 뿐 보이지 않았다. 문 양쪽으로 넓은 벽면에 2인용 소파와 작은 협탁 하나가 놓여있었고 좁은 벽면에 조교가 쓰는 듯한 좁고 긴 책상이 놓여있었다. 평일이었다면 문을 열자마자 조교와 눈이 마주칠 구조였지만 조교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대신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높은 책장 옆 좁은 통로로 밝은 가을 햇빛이 그 사람에게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모자를 꾹 눌러쓰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성별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머리카락이 없는 듯 보였고, 옷으로 가렸지만 앙상한 뼈가 보이는듯했다. 테이블 위에는 김이 나지 않는 녹차가 종이컵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무릎 위에 까만 표지의 논문이 얹혀 있는데 영어로 쓰여 있어 무슨 내용인지 확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사람은 지수가 들어오고 잠깐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고개도 들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지수가 쭈뼛쭈뼛 서 있는 사이 책장 안쪽에서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손에는 유리병으로 된 작은 음료수가 들려있었다.      


- 앉아.      


지수는 회의 테이블 가장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가 지수 쪽으로 음료수  병을 건네주었다.            


- 손님 계시면 나중에 올까요? 

- 아니야. 곧 가실 거야.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며 말했다.      


- 먼저 가보겠습니다, 교수님. 이 논문은 제가 가져가서 봐도 될까요?

- 그래요. 이 교수.      


여자였다. 그녀는 얇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지만 미세하게 떨렸다. 여자는 눈매도 콧날도 입술도 선이 얇고 고왔다. 여자가 일어나려다가 앞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지수가 반자동적으로 일어나 여자의 팔과 몸을 잡았다. 여자의 몸은 뼈에 가죽을 붙여놓은 것처럼 아무것도 없었다. 꽉 잡으면 부러질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 괜찮으세요? 도와드릴까요?     


여자의 겨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있는 지수의 손을 두어 번 토닥이고는 꼭 잡았다. 차갑지만 부드러운 손이었다.     


- 괜찮아요. 고마워요.      


여자가 웃는 얼굴로 지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여자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지수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 민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는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이 그리고 천천히 인사했다. 여자의 눈빛에는 진심이 묻어있었다. 그런 여자를 보는 민정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까지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여자가 쓰러질 뻔했을 때, 이미 아버지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었다. 하지만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는 빌려 가겠다던 논문도 챙기지 않은 채 연구실을 나갔다.

      

여자가 나가고 둘은 회의 테이블에 앉아 아무 말도 안 한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아버지였다.      


- 대학은 어떡할 거니?

- 자동차 전문대학 들어갈 거예요. 원서 냈어요.

- 전문대?!    

 

지수는 시선을 돌렸다.      


- 집으로는 안 들어올 거니?

- 네. 안 들어가요.   

   

둘 사이에는 다시 말이 끊겼다.     


- 학비 좀 보냈다. 집에 한 번 들러라.     


지수는 아버지가 내밀었던 음료수의 뚜껑을 열어 꿀꺽꿀꺽 마셨다. 차가운 오렌지 주스가 목구멍으로 콸콸 쏟아졌다.      


- 가보겠습니다.      


아버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지수는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밖으로 나왔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소파에 앉아있던 여자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누군지 한 번 물어볼 걸 그랬나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도 묻지 못할 것이란 걸 알았다. 아마 ‘이 교수’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아는 후배 교수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단지 대학 얘기를 묻고자 자신을 연구실까지 불렀다는 것이 영 개운치 않았다. 차라리 2년제를 갈 바에는 때려치우라고 화를 내며 자신을 멸시했다면, 답답해하며 해외 대학의 브로슈어라도 던졌다면 깔끔했을 것이다. 조각조각 난 아버지의 행동과 표정, 말이 모두 알 수 없게 뒤틀려 맞지 않았다. 가장 맞지 않는다고 생각된 것은 여자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이었다. 냉담했고 무관심해야 맞았다. 그때 지수가 본 것은 슬픔과 안타까움, 후회와 회한이 깃든 표정이었다. 그가 이제까지 한 번도 아버지에게서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다음 이야기 

11. 이제 와서 네 아들이라고?

집으로 돌아온 윤영은 영철로부터 소장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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