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을이 깜박거리는 신호등처럼 재빨리 사라지고 있다. 짜구 산책을 하면서도 가을이 가는 것이 너무 아까워 벤치에 앉아 단풍과 하늘과 너무나 적정한 온도를 음미하곤 한다. 하지만 요새 내 감정은 날씨와 반대다. 난 내 글이 마치 나 인 것 처럼 휴지통에 처박혀 주구장창 우기다.
축축하게 젖은 마음을 간신히 말려 2024년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프린트해서 색볼펜을 손에 들고 읽어 보았다. 내 글은 휴지통 행이었는데 붙은 글들은 뭔가 배울게 있겠지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일간지 당선작들로 뽑았는데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다. 재미만 없는게 아니라 새롭지도 않았다. 심사 평에 이야기가 풍부하고 깊은 성찰이 있다는데 내 눈엔 안 보였다. 나의 글쓰기 동료들과 남편에게도 읽어 보라고 링크를 보냈다. 다들 같은 반응이었다. 난 잠시 신이나서 방구석 여포처럼 독설을 쏟아냈다.하지만 중요한 것은, 심지어 난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타인이 보기에는 내가 비웃은 그 어떤 글 보다 내 글이 더 재미없고 식상하며 깊이도 없었다는 것이 팩트 아닌가. 젠장.
반짝 신났지만 더 우울해졌다. 난 내가 쓴게 재밌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아닐까? 난 이렇게 평생 모르다 죽겠지 싶기도 하다.
지금은 그렇다. 난 마음만 먹으면 빨리 쓸 수 있다. 수능 영어 문제집 한 권을 하룻밤 사이에 다 풀었던 집중력으로 하루면 A4 10페이지 정도의 단편 초고를 완성할 수 있다. 1년 정도 매주 3분 만에 읽는 30분 소설을 쓰면서 빨리 쓰는 것에는 자신감이 붙었다. 문제는 거기 까지라는 것이다. 빨리는 만드는데 명품이 아니다. 정교하게 다듬어지지가 않는다. 그 어려운 무한반복 사포질이 너무 어렵다. 어쩌면 원재질이 후져서 사포질을 해도 프리츠한센이 안 되는건지도 모르겠다. 일회용기를 만드는 개발도상국의 공장장이 된 기분이다. 실상은 이 미친년 널뛰는 마음이 잘 잡히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더욱 이도 저도 아니다.
그래서인지 요새는 별로 쓰고 싶지가 않다.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에 마루에 엎어져서 오고가는 짜구를 바라본다. 난 결국 다시 일어날 것이고 다시 쓸 것이고 다시 실망하고 또 일어날 것을 안다. 내가 내 글에서 썼듯, 내 장기는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것이 아닌 언제든 다시 일어나는 힘이니 말이다. 그 때까지는 잠깐 마룻바닥에 따개비처럼 붙어서 죽은듯 살아있어야겠다.
글쓰기 동지와 신나게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물고 뜯고 맛본 후, 사실은 만신창이가 되어 터덜터덜 마트에 갔다.나의 본업은 주방의 여왕이니 말이다. 글쟁이의 무기가 펜과 종이라면 밥순이의 무기는 파, 양파, 당근, 감자, 계란, 두부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나의 주방에서 떨어지지 않는 식재료다. 그 중 파, 양파, 당근이가 부족했다.마트에서 파는 파와 당근이 비싸서 팝업 식 채소가게에 갔는데 마트보다 1/3 정도 쌌다. 파 한단에 무려 2000원! 깔끔하게 다듬어진 백화점 파가 아니어도 충분히 훌륭한 싸구려 파가 내 기분을 한껏 고양시켰다. (당근도 무려 3개 2000원!)
화요일의 감사
- 나의 의욕이 완전히 죽지는 않아서 감사
- 싸구려에 완벽히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도 충분히 가치가 있어 감사. 나의 싸구려 파와 당근아!
- 붙어 있을 나의 마룻바닥이 있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