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비명

이 여자의 생존법 - 옥란

by Lali Whale

- 다음주 일요일에 시간 어땨?

- 일요일은 좀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 아니.. 뭐.. 추석 다가오니까.. 벌초도 좀 하고.. 묘에 비를 좀 세울까 혀서… 니 아버지 하고 삼촌이 도와준다고는 혔는데 그래도 노친네 둘이는 힘들지.

- 묘비를 세운다구요? 누구 묘에 말이에요? 비석이 없었나? 

- 거기 묘에 비를 세울 곳이 있어. 시간 비워 놔.

- 거기 어디? 일요일은 좀 그런데... 다음날 출근도 해야하구. 그냥 사람을 쓰시는게 어뗘? 비용을 내가 내드릴게.

- 그거 하루를 못 빼! 됐어. 관둬.


준수의 노모가 평소같지 않게 화를 내며 전화를 먼저 끊었다. 준수는 신호가 끊긴 핸드폰 소리를 들으며 당황스러우면서도 짜증이 밀려왔다. 이렇게 되면 안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벌초도 지지난 벌초도 회사일이 바쁘다고 모두 빠졌던 차여서 왠지 더 부담이 느껴지기도 했다. 죽었으면 그 뿐이지 비석을 새로 세운 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준수네 조부모님이 묻힌 선산은 유독 가팔라서 짐이 없이 올라가도 발을 디딜 때 신중을 기해야했다. 자칫 한눈을 팔았다가는 깍아지는듯한 경사에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그런 곳에 무거운 돌덩이를 노친네들이 무슨 수로 들고 가려고 한다는 것인지 갑갑한 마음이 들었다.


본가로 내려갈 날이 왔다. 추석을 2주 남겨놓은 때라 벌초를 가는 차들 때문에 고속도로가 막혀 약속한 시간보다 좀 지체 되었다. 준수의 부모님은 일찌 감치부터 준비를 끝내고 마당에 나와 준수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평소 같았다면 때가 언제이든 밥은 먹었냐 밥부터 먹으라고 막 끓인 된장찌개를 내오셨을 어머님이 그날따라 멍하니 문 앞에 앉아 계셨다.


- 어여가자.

- 바로요?


준수는 차에서 내리고 한숨 돌릴 세도 없이 다시 아버지의 트럭에 올라탔다. 세 명이 겨우 탈수 있는 앞자리에 준수와 어머니가 나란히 앉았다. 비석을 찾으러 가는 길 내내 세 사람은 말이 없었다. 보통은 준수의 노모가 대화를 이어 나가는 편인데 오늘은 왠지 입이 무겁게 닫혀있었다.


트럭이 비석을 만드는 곳에 도착했을 때 주인이 이미 나와 준수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시골 동네여서 서로서로 다 아는 처지이고 건너건너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 오셨어?

- 그려. 이거여?

- 싣고 갈 수 있것어?

- 그려. 차 위로만 같이 올려.


묘비는 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막상 들어 올리려하니 무게가 꽤 나갔다. 삼베 천에 감싸져서 뭐라고 쓰여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선산까지는 비를 만드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차가 끝까지 올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중간 지점부터는 비석을 수레에 싣고 갔다. 삼촌은 먼저 나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준수의 노모는 과일과 북어, 술 등을 간단하게 싼 보자기를 들고 비석을 옮기는 이들의 뒤를 따랐다.


선산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묘지들이 어릴적 만들던 두더지 집처럼 여기저기 있었다. 어떤 묘에는 묘비가 있었고 어떤 묘에는 아무것도 있지 않았다.


- 아부지. 여기가 맞어요? 할아버지 묘는 저쪽 아녀?

- 여기여. 가.


준수는 묘에 자주 오지는 않았었지만, 이 길이 이전의 기억과 다르다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준수의 아버지와 삼촌은 산 안쪽으로 방향을 잡아 들어갔다. 머지 않아 새로 세운 듯한 묘가 보였다. 아직 잔디도 제대로 자리잡혀있지 않았다. 산의 안쪽이었지만, 해가 잘 드는 자리였다. 그들은 손수레에서 비석을 내렸다. 준수의 아버지가 비석의 천을 벗겨 내었다.


김옥란


낯설면서 또 그렇지 않은 이름이었다. 준수의 노모는 묘에 돗자리를 펴고 앉아 담배를 피어 물었다. 어머니에게 이게 누구의 묘인지 묻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김옥란...


준수는 그 이름을 다시 되뇌였다. 김옥란... 란이누나! 란이누나는 어릴 적 준수네 집에 잠시 살던 예쁜 누나 이름이었다. 준수에게 유독 잘해주어 따랐지만, 누나가 있는 동안 집안이 살얼음 같았던 기억이 났다. 준수의 어머니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계속 화가나 있었다. 눈이 펑펑 오던 날 새벽녘이 었던가.. 준수의 어머니 앞에 란이 누나가 죄를 지은 사람마냥 눈물을 훔치며 울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준수는 더 이상 누나를 보지 못했다. 그 란이 누나의 묘비를 나와 아버지, 삼촌이 들고 오른 것이었다.


땅을 깊숙이 파 비석을 묻었다. 그 앞에 준수의 어머니가 과일과 북어포를 일회용 접시에 담아 올리고 잔에 술을 채웠다. 노인의 서늘한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었다.


- 따스한 자리로 했다. 여서는 춥지마라. 니 아들 왔다.

- 절해라. 니 엄니다.


김옥란이란 이름 밑으로 작게 子 朴俊秀 라는 이름이 보였다.


- 내는 약속 지켰다. 아들이래 델꼬 왔다.


묘비는 가을의 햇볕에 따뜻하게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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