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키오의 코는 길어질까?

이 여자의 생존법 - 지윤이 앙숙

by Lali Whale

나는 쓸 수 있는 신용카드를 모두 모아 백화점 오픈런을 하러 갔다. 연차까지 내고 이게 무슨 일인가 현타가 왔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고등학교 동창들의 단톡방에서 괜스레 한마디 했다가 아침부터 이 고생을 하고 있다니 스스로 발등을 찍을 일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얄미운 지윤이 때문이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공부도 못하는 게 아이돌 싸인이나 애들이 혹할만한 비싼 패딩이나 신발 따위를 둘러메고 자랑질을 해대더니 그 버릇을 못 고치고 성인이 되어서도 인스타에 삑 하면 허세를 떨어댔다. 대학도 라디오에서 광고나 하는 삼류 지방대 출신이면서, 집에 돈 좀 있다고 명품을 휘감고 사진을 찍어 올리는 꼴이 너무 같잖았다. 동창회를 얼마 앞두고 그 년이 이전 모임에서 내가 메고 간 나의 환경을 위한 숭고한 에코백을 #수연이장바구니#동창회패셔니스타라고 사진과 함께 올리고 비아냥 거리는 통에 순간 이성을 잃었다. 부글부글 했지만 시크하게 사무실 옆자리 써니의 짭퉁 샤넬백을 메고 사진을 찍어 올린 것이 사단이 되었다. 갑자기 단톡에 친구들이 네가 웬일이냐며 어디서 난 거냐며 벌떼같이 달려 나를 물고 뜯고 침을 흘렸다. 나는 한번도 이렇게 관심의 중심이 된 적이 없었는데 당혹스러우면서 살짝 으쓱한 기분이 되었다.


문제는 갑자기 화제의 중심에 선 나의 가방은 이미 확고한 내 가방이었고, 나는 그 가방을 다음 주 동창회에 메고 가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이 지윤이 년이 '짭 아님?ㅋㅋ'이라고 올리는 바람에 '뭐 눈에 뭐만 보이지. 역시 넌?'이라고 올리며 서로를 디스 하면서 이제는 짭을 사서 가져갈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단톡방 친구들 중에 가장 공부를 잘했던 내가 졸지에 피노키오가 되어 지윤이 앞에서 굴욕을 당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체육시간에 반 학생들이 나란히 매트 위에 누워 윗몸일으키기 수행을 봤었다. 나는 내 발목을 잡아주던 지윤과 짜고 서로 개수를 높여주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의례 조금씩 개수를 늘려줬었다. 40개 이상이 A였던 때 20개를 겨우 넘던 나는 43개로 둔갑을 했고 10개를 겨우 하던 지윤은 25개를 훌쩍 넘어 보고 해 주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선생님이 지윤을 콕 집어 횟수를 세고 계셨고, 우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다시 윗몸일으키기를 해야 했다. 이미 스무 개가 넘게 윗몸일으키기를 한 후여서 나의 근육한오라기 없는 배는 당기고 아파왔다. 하지만, 이대로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체육 수행평가를 망쳐버릴 수도 없었다. 지윤이 이번에는 채 5개를 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조금만 더하지 지지배. 아직 숨도 다 안 고른 상태에 내 차례가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에서 땀이 삐질 나왔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열셋.


이미 숨이 턱에 찼다.


열넷.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


이것이 데드포인트인가?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배와 허리 등을 타고 목까지 아파왔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마흔. 마흔하나. 마흔둘. 마흔셋.


어느 순간 내 배는 내 것이 아니었고, 내 허리도 등도 마치 남의 것처럼 고통이 옆에 있는 듯 느껴졌다. 나는 무려 윗몸일으키기를 45개를 해냈다. 살면서 그렇게 빨리 많은 윗몸일으키기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얼굴이 시뻘건 체육선생님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나에게 A를 줄 수밖에 없었다. 스무 개에서 5개가 된 지윤은 울면서 나를 흘겨보았다.


'그래. 내가 돈이 없어 안 샀냐. 환경을 사랑해서 안 산거거든!'


이라고 속으로 되뇌며 은행어플에 들어가 나의 적금과 마통의 깊이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연차를 내고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새벽같이 왔는데도 내 앞으로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줄을 서있었다. 삼백 년 만에 찾아온 백화점 쇼윈도에는 내가 사진으로 찍어 올린 써니의 샤넬백을 멘 마네킹이 같은 메이커의 투피스를 입고 손목 관절을 꺾고 서있었다.


'이번 동창회 메고 갔다 고대로 모셔두고 내년에 팔면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으려나?'


나는 45개의 윗몸일으키기를 성공했던 그날의 통쾌함을 되새기며 입장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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